언어‘들’ 사이에서만 거둘 수 있는 것이 있다. 경계에서 사는 삶은 고단하지만, 경계에서만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 낯선 언어가 익숙한 세계를 휘젓는 철학적 순간을 만나는 것은 고단한 경계인이 얻는 축복이다. 그 축복을 나누고 싶었다.
--- p.10
다른 사회와의 비교를 통해 한번 생각해 보면 좋겠다. 우리 사회가 어느 쪽을 향해 몸을 기울이고 있으며, 무엇 앞에서 뒤돌아 앉아 있는지. 어린 시절, 어른들은 ‘큰일’ 하는 사람이 되라고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곤 했다. 나는 세상엔 큰일과 작은 일이 있구나 생각하며 자랐고 큰일을 우선하는 걸 당연하게 여겼다. 일보다 월을, 월보다 연도를 당연하게 앞에 두듯이. 그런데 살다 보니 세상 사람들이 큰일이라고 하는 것이 반드시 큰일은 아닌 것 같았다. 더 중요하게는, 큰일과 중요한 일은 동의어가 아니라는 의심도 들었다.
--- p.58
온 국민이 다 아는 독일어 단어가 있다. 아르바이트(Arbeit). 줄여서 알바라고도 한다. 독일에서는 ‘노동, 일, 작업, 과제’ 등의 뜻으로,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근무를 뜻한다. 그런데 일본에서 이 독일어 단어를 가져다 본래의 일이 아니라 임시로 하는 부업, 시간제 근무나 단기로 돈을 버는 일 등에 붙였고, 우리도 이를 그대로 가져와 쓰고 있다.
--- p.64
‘이네레 슈바이네훈트(innere Schweinehund)’는 우리말로 ‘내 안의 돼지개’, 영어로 옮기자면 inner pig dog 정도로 표현할 수 있는 말이다. 우리는 ‘개돼지’라고 하는데 독일은 소시지가 유명한 돼지의 나라라 그런지 돼지가 앞에 온다. ‘돼지개’다. 우리의 개돼지는 슬프게도 일부 고위 관료나 정치인들이 국민들을 바라보며 떠올리는 단어로서 보통은 입에 담아서는 안 될 말이지만, 독일의 돼지개는 ‘내면의 약한 자아’를 뜻하는 말로 평소에 친근하게 자주 등장하는 녀석이다. 즉, 우리의 개돼지가 비하하는 말이라면 독일의 돼지개는 자기 합리화에 관련된 일상적 표현이다.
--- p.144
멜덴(melden)은 발표에 관한 규칙이다. 하지만 멜덴을 잘한다는 것은 발표를 똑 부러지게 잘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한국 교실에서 발표를 잘한다는 것은 아이가 자신감 있고 똘똘하게 수업 시간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는 말이지만, 독일 교실에서 멜덴을 잘한다는 것은 자신의 의견을 말할 때 남을 배려하고 규칙을 잘 지킨다는 말이다. 답을 안다고 해서 내가 불쑥 말해버리거나 다른 친구의 말에 끼어들지 않고, 손을 들고 조용히 차례를 기다릴 줄 아는 것. 선생님은 손을 든 아이들이 골고루 의견을 말할 수 있도록 공평하게 기회를 준다.
--- p.160~161
독일에는 ‘발하이마트(Wahlheimat)’라는 단어가 있다. ‘내가 선택한 고향’이란 뜻이다. (…) 사실 고향을 택할 수 있다는 것은 안정적인 나의 고향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역설이기도 하다. 고향은 본래 그 안에 살고 있는 자들을 위한 단어가 아니다. 낯선 곳에서 분투하는 자들, 스며들지 못하는 자들이 더 진하게 맛보는 단어다. 한마디로, 고향을 느끼는 자들은 그곳을 떠난 자들이다. 그러므로 발하이마트라는 단어는 태생적으로 어느 정도의 아픔과 그리움을 담는다.
--- p.199~200
나는 불평불만 1급 자격증 소지자인 독일인들이 날씨에만큼은 꽤 관대한 것이 마음에 든다. 불평할 수 있는 부분, 고칠 수 있는 부분에는 목소리를 높이지만 자연의 힘 앞에서는 미소를 띠는 것. “당연하지(Naturlich)!”라는 말은 자연(Natur)에서 왔다. 자연스러운 것이 당연한 것이다. 그러니 이 거지 같은 날씨도 당연한 것이다.
--- p.211
지허하이트(Sicherheit)라는 단어 주변의 이야기를 써 내려가면서, 독일 사람들은 자기들이 쓰는 언어와 굉장히 닮아 있다는 생각을 했다. 호기심이 많은 편이라 여러 나라의 언어들을 건드려보았는데 독일어는 굉장히 규칙적인 언어다(그 규칙이 좀 많아서 그렇지). 발음도 정직하고 예외가 별로 없는 편이다. 영혼을 담는 그릇인 언어가 규칙적이라서일까. 독일 사람들 역시 예외를 두는 일에 엄격하고 규칙 안에 있는 것을 좋아한다. 이렇게 보면 언어가 우리에게 미치는 힘이란 얼마나 크고도 재미있는지.
--- p.232~2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