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은 질병이 발생하고 전파되는 공간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재생산되고 가공되고 상상되는 공간이기도 하다. 지역이라는 장소에서 벌어지는 이러한 전염병의 복잡한 동학을 이해하는 것이 어떤 의미에서는 전염병의 원인과 치료법을 찾아내는 것만큼 중요하다. 우리의 정치적, 경제적, 지적 욕망 혹은 헛된 신념이나 선입견이 전염병과 그로 인한 위기를 증폭시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들어가며」중에서
템스강은 런던을 동서로 관통하여 북해로 흐르는 강으로 런던 대부분 지역의 상수원 역할을 했다. 강은 산업혁명 이후 철강, 화학, 석탄, 방직 산업 등의 폐수에 의하여 심하게 오염되었고, 인간과 동물의 분뇨, 도살장 폐기물, 병원과 가죽 공장의 악취 나는 오물, 때로는 시체 등의 도착지였다.42 런던의 빈약한 하수도는 각 가정에서 버린 오물로 가득한 긴 배관에 지나지 않았고, 오물이 자주 막혀 정기적으로 파내야 했다. 런던을 가로지르는 템스강은 구역질 날 정도로 악취가 심했다. 코를 찌르는 악취가 나는 템스강에서 런던 주민들은 빨래하고 목욕하며 식수를 얻었다.43 콜레라가 퍼져 나가는 데 최적의 조건이었다.
---「제1장 제국주의와 함께 온 콜레라, 콜레라가 만든 근대 도시」중에서
전염병은 예나 지금이나 죽음을 떠올리게 하는 원초적인 공포의 대상이다. 질병의 발생은 생물학적 현상이지만 질병에 대한 반응은 사회적으로 만들어진다. 공포와 불안감을 느낀 대중은 “불안의 원인을 누가 제공했는가, 누가 책임져야 하는가?”를 묻고, 공포를 제공했다고 간주하는 개인이나 집단을 배척하며 단죄함으로써 위험과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착각한다. 사람들은 위험을 심각하게 인식할수록 문제를 선과 악으로 이분하고 타자를 악으로 규정하여 자아의 경계 밖에 위치시킨다. 위험이나 공포 상황은 타자에 대한 적대감과 혐오감을 증폭시키고 그들을 경멸하거나 공격하는 계기가 된다.
---「제2장 장티푸스보다 빠르게 번지는 혐오」중에서
메리는 아일랜드 이민자이면서 여성이었기에 미국에서 언론을 통해 지나치게 노출되었고 심각한 인권 침해에 시달렸다.44 편견은 어떤집단에 소속된 사람들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로, 차별적 행동으로 이어지기 쉽다. 차별은 정상과 일탈(비정상)의 경계를 설정하기 위한 일종의 권력적 기술로, 대부분 원칙적으로 편견을 가진 이와 차별받는 대상 간에 존재하는 권력의 불균형에서 기인한다. 특히 인종, 계급, 젠더와 같은 차별 요인이 독립적으로 존재할 때보다 서로 결합할 때 그들을 향한 편견과 차별은 더욱 부끄러움 없이 그 폭력성을 드러낸다.
---「제2장 장티푸스보다 빠르게 번지는 혐오」중에서
중국은 코로나19 발생의 책임을 물을 최적의 대상이었다. 언론은 중국 우한에서 코로나19 첫 환자가 발생했다는 보도를 하면서 코로나19 발생이 중국인의 비위생적이고 미개한 식문화 때문이라고 했다. 서구인들은 중국인, 나아가 아시아인에 대해 불쾌감과 혐오감을 드러냈고, 건강한 자신들을 감염시키는 보균자로 간주하면서 경멸하고 회피해야 할 대상으로 보았다. 세계화 이후 세계의 공장으로 부상한 중국은 서구와 경제적 경쟁 관계에 놓이게 되었다. 세계금융위기 이후 세계 최대 외환 보유고를 가진 중국을 파산 상태의 서구 경제를 살릴 구원 투수라고 봤던 관점이나 떠오르는 중국의 경제 성장이 서구 사회를 위협할 수 있다는 중국 위협론 모두 적어도 중국의 물리적 힘에 대해서 의심하지는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코로나19에 대한 공포는 중국 책임론과 중국을 향한 공격으로 쉽게 옮겨 갔다.
---「제3장 코로나바이러스에서 오리엔탈리즘을 읽다」중에서
미국이나 영국 등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국가들은 병사들의 사기를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 1918년 봄에 발생한 인플루엔자 대유행을 보도하지 않도록 언론을 엄격히 통제했다. 그렇지만 당시 전쟁에 참전하지 않고 중립을 지켰던 스페인은 인플루엔자 독감 유행 상황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이로 인해 최초의 환자가 스페인에서 발생하지 않았음에도 스페인독감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
---「제4장 공포만큼 크지 않았던 혐오, 스페인독감」중에서
인류는 스페인독감을 겪으면서 중세 때처럼 전염병 공포에 떨었다. 세 차례 유행하는 동안 인플루엔자바이러스는 인종이나 계급과 무관하게 사람들을 감염시켰다. 권력을 가진 자와 그렇지 못한 자, 부자와 가난한 자를 가리지 않았다. 인종과 국경도 따지지도 않았다. 인플루엔자는 평등했다. 그렇지만 어디에서 사느냐에 따라 사망률은 달랐다. 기존 인플루엔자바이러스에 접촉한 경험이 거의 없었던 알래스카의 고립된 마을이나 아프리카 밀림 지역의 사람들은 매년 바이러스에 노출된 인구 밀집지역의 사람들보다 면역력이 떨어져 훨씬 취약했다. 실제로 알래스카에서는 독감에 걸린 한 명의 우편배달부로 인해 이누이트 주민들 대부분이 사망한 마을도 여럿 있었다. 아프리카의 어떤 마을은 스페인독감으로 완전히 사라지기도 했다.
---「제4장 공포만큼 크지 않았던 혐오, 스페인독감」중에서
미군 부대에서 첫 환자가 발생했음에도 미국에서는 인플루엔자의 발원과 확산의 주범으로 이민자 집단을 지목했다. 언론이나 학계는 발생 책임을 미국의 주류 백인 사회가 아니라 사회적 약자였던 빈민이나 외국의 이민자에게 돌리기 위한 근거를 샅샅이 찾았다.
---「제4장 공포만큼 크지 않았던 혐오, 스페인독감」중에서
퀴닌 덕분에 아프리카 내륙에 진출하게 된 유럽의 제국들은 효과적인 식민 통치를 위해 말라리아 방역이 필요했다. 영국의 군의관이었던 로스는 시에라리온의 수도인 프리타운의 아노펠레스 모기 서식처를 빨간 점으로 표시했는데, 그 결과 중앙 고지대를 제외하고 동서 양쪽으로 펼쳐진 저지대에 모기가 골고루 서식하는 것을 확인했다. 영국 식민성은 그의 발견을 근거로 1904년에 말라리아 위험이 적은 프리타운 고지대에 백인 주거 전용 지역인 힐스테이션을 건설하고, 말라리아 위험이 많은 저지대를 토착민의 거주지로 구분하는 거주지 분리 정책을 시행했다. 그리고 힐스테이션과 저지대인 평지를 연결하는 고산 철도를 부설해 백인 정착과 원주민 통제를 가능하게 했다.
---「제5장 전 지구적 질병에서 열대 풍토병으로 변한 말라리아」중에서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보니화가 끝난 1939년, 새로 개척된 폰티네 지역에 사람들이 모여들어 농사를 지었고 소와 양을 키우면서 최고급 치즈도 만들었다. 이 지역은 농?축산물 생산지로 변모했고 말라리아도 사라졌다. 말라리아 근절보다는 빈곤 퇴치에 더 무게를 두고 막대한 비용을 들여 습지를 개간한 결과 말라리아가 자연스럽게 사라진 것이다.
---「제5장 전 지구적 질병에서 열대 풍토병으로 변한 말라리아」중에서
제약 기업이 말라리아 백신 개발에 관심을 꺼 버린 결정적인 이유는 약을 살 수 있는 소비자 집단의 부재였다. 북미와 유럽에서는 생활 환경이 개선되면서 말라리아 백신 수요가 감소했고 아프리카나 아시아의 가난한 환자들의 경우 비싼 말라리아 약제를 살 수 있는 여력이 거의 없어 판매 시 이윤이 남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제약 기업은 까다롭고 비용이 많이 들면서도 가난한 환자들을 치료하는 말라리아 약제 개발을 우선순위에서 밀어냈다. 대신 그다지 까다롭지도 않고 비용도 상대적으로 덜 들면서도 선진국의 부유한 환자들을 치료하는 고혈압이나 당뇨병 약제 개발에 우선 투자했다. 빈곤한 국가는 예산 부족으로, 제약 기업은 이윤 부족으로, 국제 사회는 관심 부족으로 말라리아를 오랫동안 외면했다.
---「제5장 전 지구적 질병에서 열대 풍토병으로 변한 말라리아」중에서
빌앤드멀린다게이츠 재단과 같은 민간 기업은 자선 활동에 참여하면 좋은 평판과 대중의 존경을 얻어 정치적?사회적 영향력을 강화할 수 있다. 이를 활용하여 정부의 보호, 반경쟁적 관행, 유리한 법적 대우를 받아 더 많은 이윤을 추구할 수 있다. 민간 기업의 자선 활동은 그 기업에 대한 증세 요구를 잠재우고, 기업에서 재단으로 자금이 이동하는 과정에서 자금 운용의 투명성은 저하된다. 이는 부의 재분배를 위한 복지 정책에 쓸 세수가 감소하는 것을 뜻한다. 심지어 자선 기부금 대부분이 저소득층의 경제적 부담을 줄이는 데 사용되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민간 기업의 자선 활동은경제적 불평등이나 빈곤 해소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경제 불평등과 종속성을 강화했다.
---「제5장 전 지구적 질병에서 열대 풍토병으로 변한 말라리아」중에서
결핵에 대한 인식도 빈부에 따라 극명하게 갈렸다. 사람들은 부유한 환자의 결핵을 두고 결백한 사람이 겪는 불행이라고 안타까워했고, 가난한 환자의 결핵에 대해서는 도덕적으로 타락하고 위생 관념이 없어서 자초한 재난이라고 비난했다. 부유한 결핵 환자에게는 공기 좋은 곳에서 요양이 필요하다며 위로를 건넸고, 가난한 결핵 환자는 병균을 퍼트리고 다니기에 사회에서 격리되거나 배제되어야 할 존재라고 생각했다. 결핵은 부유한 자와 가난한 자, 강한 자와 약한 자, 부지런한 자와 게으른 자를 무차별적으로 공격했지만, 사회는 부유한 결핵 환자와 가난한 결핵 환자를 상이한 시선으로 보았다. 물론, 시선뿐 아니라 치료에도 차이가 존재했다.
---「제6장 구소련과 함께 붕괴된 결핵 방어선」중에서
이후 서구 유럽과 북미에서 결핵이 개인적 질병을 넘어 사회적 질병이라는 인식이 퍼졌다. 빈곤한 사람에게 만연했던 결핵이 부유한 사람에게 전염될 것을 걱정했던 이들을 중심으로 빈곤한 사람을 위한 결핵 요양소를 설립하자는 주장이 나왔다.13 물론 이와 같은 주장은 공중보건을 위한 것이 아니라 가난한 결핵 환자로부터 부유한 상류층을 보호하기 위한 일종의 분리 전략으로 제기된 것이었다. 그렇지만 가난한 이를 위한 요양소를 건립할 자선 사업가는 없었다. 가난한 결핵 환자를 위한 공공 결핵 요양소를 설립하는 일은 재정 마련, 부지 선정 등시작 단계부터 어려움에 봉착했고 실현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제6장 구소련과 함께 붕괴된 결핵 방어선」중에서
빈곤한 지역의 질병과 부유한 지역의 질병이라는 이분법은 더 이상 무의미하다. 불안정한 삶에 노출될 수밖에 없는 계급과 결핵 간 관계는 고정적이라기보다 사회ㆍ경제적 불평등의 전개 양상과 정치적 포용 수준의 차이에 따라 특정 지역 내에서도 시기별로, 상황별로 달라지는 역동적 과정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결핵은 빈곤과 사회경제적 불평등이 심한 곳이라면 그곳이 빈곤한 국가이든 부유한 국가이든 어디서나 발생할 수 있다.
---「제6장 구소련과 함께 붕괴된 결핵 방어선」중에서
2014년 에볼라바이러스 유행 당시 세계보건기구 사무총장이었던 마거릿 챈은 이들 국가가 에볼라바이러스에 2년 이상 시달리면서 그 확산을 통제하지 못했던 가장 중요한 이유로 빈곤을 꼽았다. 빈곤은 나쁜 정치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이들 국가는 독립 이후 정치적 불안정과 내전에 오랫동안 시달렸고, 부패한 지도자는 탐욕스럽고 무능했다. 전염병 통제는 일차적으로 국가가 책임져야 할 문제이며 국가 기능이 정상적으로 작동할 때만 성공할 수 있다. 2014년 에볼라가 유행할 당시 이들 국가는 정치적·경제적으로 불안정하고 부패했으며, 전염병을 통제하고 체계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국가 시스템이 취약한 상태였다.
---「제7장 에볼라 비상 버튼을 누른 세계」중에서
2019년 에볼라 백신이 국제적으로 빠르게 승인될 수 있었던 까닭은 2014년 에볼라가 세계화의 흐름 속에서 아프리카 대륙 밖으로 확산할 수 있다는 경고음을 강하게 보냈기 때문이다. 유엔과 같은 국제기구와 미국을 비롯한 여러 선진국은 자신들이 에볼라바이러스에 감염될 수 있다는 위험을 인지하자 보건 안보를 위해 민간 기업이 에볼라 백신을 개발하도록 물심양면으로 지원했다.
---「제7장 에볼라 비상 버튼을 누른 세계」중에서
에이즈를 일으키는 HIV를 찾은 이후의 에이즈 연구는 HIV의 기원을 찾는 데 초점이 맞춰졌다. 이 과정에는 인종 차별적인 편견이 강하게 작동했다. 에이즈의 지리적 기원을 찾는 연구자들은 자연스럽게 아프리카 대륙에 대한 자신들의 오래된 편견과 낯선 바이러스를 연결하였다.
---「제8장 에이즈와 치료받을 권리」중에서
빅 파마(거대 제약 기업)는 돈 없는 환자에게 관심이 없다. 개발도상국 국민의 건강 문제는 그들의 관심사가 아니고, 해결할 의지도 없다. 특히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남아시아와 동남아시아 등 빈곤한 지역에서 주로 발생하는 질병 관련 백신이나 치료제를 개발하는 데 소극적이다. 비싼 약을 구매할 소비자가 많지 않기 때문이다.
---「제8장 에이즈와 치료받을 권리」중에서
코로나19 이후 팬데믹 상황에서 서구 민주주의 국가의 지도자들은 허둥댔고, 정치는 분열했으며, 정책은 무력했다.57 일반적으로 정부가 민간에 개입하는 범위가 넓고, 정책을 계획?집행할 수 있는 역량이 강한 국가는 그렇지 않은 국가에 비해 코로나19에 더 효과적으로 대응했다. 코로나19를 겪으면서 사회적 위험에 체계적으로 대응하고 개인의 삶을 보호하기 위한 정부의 역할이 확대될 필요가 있다는 목소리가 커졌다. 위기 상황에서 시민의 일자리를 보장하고 복지?의료 서비스를 제공하며 사회적 위험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것은 국가의 몫이지 결코 시장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제9장 코로나19, 실패한 시장 그리고 소환된 국가」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