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행복과 참다운 자유
분명히 순수생명(純粹生命)의 불성광명(佛性光明)은 지금 우리 눈앞에 실존(實存)하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나 마음이 맑아지면 참으로 볼 수밖에는 없습니다. 우리가 부질없는 생각을 많이 하고 있기 때문에 부처님, 하느님, 알라를 못 볼 뿐입니다.
우리 마음이 얼마나 오랫동안 무지무명(無智無明)에 가렸던가? 깨달은 성인(聖人)들이 공부할 적에 번뇌의 때 묻은 생활을 해왔던 것을 땅을 치고 후회하고 통탄한다는 것입니다. 그동안 내가 무엇 때문에 부질없이 망상(妄想)을 했던가? 마음공부를 바로 해서 어느 날 갑자기 번뇌(煩惱)가 다 녹아서 정말로 진여불성 광명이 훤히 나올 때는 제아무리 점잖고 근엄한 분도 너울너울 춤을 춘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억제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어떠한 행복(幸福)보다도 제일 큰 행복이 열반제일락(涅槃第一樂)입니다. 본래 공(空)한 번뇌 망상을 여의고 참 자기를 찾는 마음공부처럼 큰 일, 영원한 행복과 참다운 자유의 길은 없습니다.
--- 「프롤로그, [청화 큰스님 법어]」 중에서
부처님 가르침, 즉 2,500년 동안이나 가지가지 비판을 다 거치고, 또는 여러 가지 사상체계를 다 수용하고도 오히려 남음이 있는, 즉 ‘인간이 구하는 행복이라 하는 문제에 있어서 가장 명확한 해답을 내릴 수 있는 것이 부처님 가르침’이라는 확신이 서기 때문에 그 가르침에 대해서 다시 한 번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 p. 24
『법화경(法華經)』처럼 부처님 결론 같은 경전을 보면 부처님께서 사바세계(娑婆世界)에 나오신 뜻이 무엇인가 하면 무상대도(無上大道)를, 중도의 대도(大道)를,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은 중도의 대도를 우리 중생이 알고 느끼고 깨달아서 자기 것으로 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우리 불자님들도 마땅히 ‘중도(中道)’라고 하는 부처님의 마지막 법문을 꼭 느끼시고 아셔야만 참다운 해탈과 자유와 참다운 행복이 있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 pp. 42-43
「보리방편문」, 이것은 우주의 체계입니다. 우리 마음의 체계인 동시에 또는 불성(佛性) 체계, 우주의 체계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것을 소화한다고 생각할 때에는 외람된 말씀이 아니라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을 거의 다 소화하는 것이나 같은 것입니다.
--- p. 68
분명히 잘 새기셔야 합니다. 염불하는 방법에 방편과 진실이 있습니다. 방편염불은 부처님을 자기 밖에다 두고서, ‘나와 부처님은 다른 것인데 내가 부처님한테 간절히 기원드리면 부처님이 나를 돕는다’고 하는 것이 방편염불인 것입니다.
참다운 진실염불은 부처와 내가 둘이 아닙니다. 내 본래면목(本來面目), 내 본래생명자리도 역시 똑같은 법신·보신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과 나와 마음 바탕은 조금도 차이가 없이 똑같습니다. 강도나 내 마음이나 마음자리는 똑같습니다. 예수 마음이나 내 마음이나 마음자리는 똑같습니다. 다만 겉만 차이가 있습니다. 상만 차이가 있지 본 성품은 똑같습니다.
따라서 일체존재는, 나나 너나 산이나 내[川]나 하나의 곤충이나 모두 가 다 부처님 성품을 바탕으로 했습니다. 어떤 거품이나 어떤 파도나 똑같이 물을 바탕으로 했듯이 어떤 사람이나 어떤 존재나 모두가 다 불성(佛性)이라 하는 부처님을 바탕으로 했습니다.
--- pp. 69-70
모든 것을 다 부처로 수용하고 부처가 보는 안목을 내 안목으로 하는 공부가 참선공부입니다. ‘옴마니반메훔’을 하든, 염주를 헤아리든 그런 모양은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 마음이 나나 너나 천지우주가 다 본래로 부처구나. 천지우주가 부처 아님이 없구나’ 이렇게 생각하면 결국 참선입니다.
--- p. 80
우리 중생들이 비록 느끼고 있지 못한다 하더라도 우리 본래 마음은 바로 불성인 것이고, 불성 자리를 바로 도파(道破)하신 법문이 이와 같이 「보리방편문」 법문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마음이 바로 부처[심즉시불(心卽是佛)]’인 것을 말씀한 것이고, 또 조금 더 구체화시켜서 분석하면 마음의 본체(本體)는 법신(法身)이고, 법신 자리에 들어 있는 일체공덕(一切功德)은 보신(報身)인 것이고, 거기에서 일어나는 일체존재(一切存在)는 화신(化身)인 것입니다. 이것을 다 합한 것이 아미타불(阿彌陀佛)이기 때문에 ‘나도 아미타불 너도 아미타불, 모두가 다 바로 아미타불’인 것이고, 이와 같이 우주가 바로 부처임을 느끼면서 하는 염불이 참다운 염불입니다. 지장보살도 관세음보살도 모두가 이 가운데 다 들어 있습니다. 본래면목(本來面目)을 안 떠나는 염불은 바로 참선과 염불이 둘이 아닌 참선 염불이 하나가 되는 진실한 공부인 동시에 바로 이것이 성불의 첩경인 것입니다. 바로 알고 들어가는 길입니다. 과학과의 차이, 종교 간의 우열(愚劣) 차이, 그런 것 저런 것이 모두가 다 이런 방편문적인 것의 차이입니다.
--- p. 83
우주의 진리를 깨닫는 가르침 가운데서 제일 으뜸 가르침, 가장 압축된 가르침, 그것이 참선(參禪)입니다. 오늘 우리가 모인 것은 참선을 하고자 해서입니다. 인류문화사 가운데 참선 같이 가장 고도한 가르침은 없습니다. 참선이 무엇인가를 모르면 참된 의미에서 지성인이라 할 수 없을 정도로 참선은 귀중합니다.
--- p. 99
참선이 무엇인가? 제가 예언가는 아닙니다만 앞으로 두고두고 해를 거듭할수록 참선 문제는 더욱더 중요한 이슈로 부각될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지금 번잡하기도 하고, 이와 같이 혼란스러운 산업사회의 위기를 극복하는 문제, 이 문제에 있어서 제일 소중한 해결책, 산업사회의 혼란상, 물질문명사회의 여러 가지 폐단, 이것을 구제하는 면에서 참선 같은 양약(良藥)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참선을 하고자 해서 이 자리에 모인 것입니다.
--- p. 100
우리 범부는 고향을 잃어버린 사람들입니다. 내 고향은 어디인가? 우리가 떠나온 가장 시초의 근원적인 우리 고향, 이것은 역시 부처님입니다. 불성입니다. 따라서 불성을 스스로 체험 못하면 우리 고향에는 못 갑니다. 따라서 우리 불안의식을 해소시키지 못합니다. 우리는 더 이상 헤매지 말아야 합니다. 비록 우리의 선근(善根)이 부족하고 노력이 게을러서 못 간다 하더라도, 방향 설정만은 옳게 해야 합니다. 우리는 진리인 행복과 자비와 지혜와, 그런 공덕을 다 갖춘 내 고향, 거기를 가야 합니다. 이렇게 방향을 설정해 놓고서 그때그때 자기힘 따라서 공부를 해야 합니다.
--- p. 108
참선이라 하는 것은 어제 말씀드린 것처럼 불도(佛道)의 정문(正門)입니다. 불도의 첩경(捷徑)입니다. 불도의 지름길, 불도의 정문, 이것이 참선인데, 비록 지금 내가 범부일망정 이론적으로는 우리가 부처가 되어버린단 말입니다. 부처가 먼저 되고서 그 기분으로 닦아야만 이것이 참선입니다.
--- p. 157
참선이라 하는 것은 한마디로 하면 모양은 부처님 같고, 말은 부처님 같은 그런 유연스러운 말, 우리 생각은 부처 같은 생각, 이것이 우리 참선의 가장 이상형(理想型)입니다. 모양[身]은 부처 같은 모양, 말[口]은 부처 같은 말, 생각[意]은 부처님 생각, 이것이 참선의 가장 이상적인 모양입니다.
--- p. 166
참선 이것은 몇 번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 불교에서 제일 수승(殊勝)한, 제일 압축된 법문(法門)일 뿐만 아니라, 인류의 모든 문화유산의 총 결론 가운데서 제일 수승한 최고도의 수행법(修行法)입니다. 따라서 현대 지성인들은 참선이 무엇인가? 선(禪)이 무엇인가? 이러한 것을 모르면 인류문화의 골수를 모른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만큼 참선의 문제는 중요합니다.
--- p. 176
여기서 중요한 점은 보통 염불(念佛)과 염불선(念佛禪)은 어떤 차이가 있는가? 이것을 또 알아야 합니다. 관음보살(觀音菩薩)이나 아미타불(阿彌陀佛)이 저만큼 밖에 계신다, 우리가 구하고 기도를 하면 그분들 기운이 우리를 돕는다, 이런 정도는 염불선이 못됩니다. 법당에 들어가서 여러분들이 기도할 때 자기 운수라든가 자기 행복을 구하는 것 그런 정도로 부처님의 이름을 외워서는 염불선이 못됩니다. 그것은 방편염불(方便念佛)에 불과합니다. 염불이 염불선이 되려면 부처를 자기 마음 밖에서 구하지 않고서, 내 마음의 실체(實體), 내 마음의 실상(實相)이 바로 부처다, 이와 같이 분명히 느껴야 합니다. 또는 천지우주의 실상이 바로 부처다, 이와 같이 느낌으로 해야 비로소 염불이 염불선이 됩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선(禪)을 하고 있습니다. 성불(成佛)의 가장 지름길, 성불의 정문(頂門), 성불의 첩경(捷徑), 참선이라는 것은 인간이 가야할 길 가운데서 가장 탄탄대로로 가는 것입니다.
--- pp. 181-182
참선은 꼭 선오후수(先悟後修)라, 먼저 천지우주의 모두가 부처 아님이 없다는 생각, 내가 바로 부처라는 생각 말입니다. 내가 봐서, 못난 내가 봐서 범부로 보는 것이지, 부처가 보면 내가 똑같이 석가모니와 같은 부처인 것입니다. 어떤 누구나가 다 부처인 것입니다.
만해 한용운 스님의 「님의 침묵」 시에도 임만이 임이 아니라 바로 보면 산도, 내도, 풀도, 다 임입니다. 바로 보면 다 부처님입니다. 이와 같이 느끼고 천지우주를 하나의 부처 덩어리로 봐야 참선이라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못 보면 참선이라는 말을 못 붙입니다. 이렇게 보고서 그다음 문제는 정혜쌍수(定慧雙修)라, 정(定)과 혜(慧)가 같이 아울러 가야만, 마치 수레바퀴가 둘이 되어야만 갈 수가 있고, 나는 새는 날개가 둘이 되어야 높은 하늘로 고상(高翔)하듯이 우리는 꼭 정(定)과 혜(慧)가 함께 가야 합니다. 그래야 조화롭게 공부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빠릅니다.
--- p. 195
처음부터 참선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할 것인가? 그때는 우리 마음이 불심(佛心)에서 안 떠나야 합니다. 불심에서 안 떠나기만 하면 다 참선입니다. 염불, 참선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비록 우리가 관세음보살을 소리 내어서 외운다 하더라도, 우리 마음 자세가 우리 마음의 현 위치가 불심을 딱 간직하면 그때는 그것이 참선입니다.
--- p. 2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