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영 굉오(圓瑛 宏悟, 1878~1953)
원영(圓瑛) 굉오(宏悟) 대사는 1878년 중국 복건성(福建省) 고전현(古田縣)에서 태어났다. 속성은 오(吳)씨이고 이름은 형춘(亨春)이다. 18세에 큰 병을 앓은 후 출가를 결심하고 19세에 고산(鼓山) 용천사(涌泉寺)에서 증서(增西) 스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출가하였다.
21세에 복주(福州)에서 강소성 상주(常州) 천녕사(天寧寺)로 와서 야개(冶開) 선사를 모시고 6년간 선(禪) 수행을 했다. 여러 가지 선의 경지가 자주 나타나 보였고, 몸과 마음이 넓게 텅 비어있음을 선정에서 보고 게송을 남겼다. 26세에 영파(寧波) 천동사(天童寺)의 기선(寄禪) 스님께 의지하여 일심으로 참구하였다. 28세 겨울 수행하던 중 선정에 들어 공(空)을 체득하다. 1906년 29세에 대사는 영파 칠탑보은사(七塔報恩寺)에 주석하고 계시던 자운(慈運) 스님을 참배하고 직접 법인(法印)을 받아 임제종(臨濟宗)의 제40대 조사(祖師)의 법맥을 이어받게 되었다. 법명은 굉오(宏悟), 자는 원영(圓瑛)이며, 호는 도광(韜光)이다.
36세부터 정토의 기연이 성숙하여 영명(永明) 연수(延壽) 대사와 운서(雲棲) 연지(蓮池) 대사 등 많은 정토법문과 경전을 열람하면서 정토염불법문을 깊이 믿게 되었다. 그 이후로 40여 년 동안 선과 정토를 함께 닦았으며, 사염불(事念佛) 수행에서 이염불(理念佛) 수행의 경지로 들어갔다. 이것은 바로 연수 대사께서 『사료간(四料簡)』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것과 같다.
“선(禪)이 있고 정토(淨土)가 있으면, 마치 뿔을 가진 호랑이와 같이 현세에서 사람의 스승이 되고, 내세에는 부처님과 조사가 될 것이다(有禪有淨土 猶如帶角虎 現世爲人師 內生作佛祖).”
원영 대사는 1935년 가을 상해에 원명강당(圓明講堂)을 창설하여 경을 강의하고 가르침을 설하면서 사람들에게 염불을 권하였다. 일찍이 『아미타경요해』, 『아미타경』, 『무량수경』, 『관무량수경』, 『대승기신론』, 『대세지보살염불원통장』, 『성암대사 권발보리심문』 등 많은 정토법문의 경론을 강의하였다. 아울러 위와 같은 경론을 세상에 유통시키면서 중생들을 유익하게 하였다. 이 『권수염불법문』은 대사의 세수 62세 때 원명강당에서 강의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1928년 처음으로 전국불교대표 대회가 상해에서 열렸고 여기에서 ‘중국불교회’가 창립되어 비로소 전국 불교도의 통일조직이 성립되었다. 대사는 일찍이 일곱 번이나 중국불교회의 주석과 이사장을 역임하였다. 1949년 공산당이 집권한 후 대사는 조복초(趙?初), 허운(虛雲), 거찬(巨贊), 진명추(陳銘樞) 등과 공동으로 발기하여 중국불교협회를 조직하였으며, 아울러 제1대 회장(주석)으로 선출되었다. 그 후 대사는 국가가 혼란한 가운데서 중국 불교계의 단결과 불교를 보호하는 데 노력하였으며, 전국 불교도의 존경과 추대를 받게 되었다.
그리고 대사는 50여 년 동안 시종일관 ‘승가는 불교를 진흥시키고 중생을 교화하는 데 앞장서야 한다.’고 주창하면서 승려 교육에 평생을 바쳐서 많은 인재를 양성하였다.
대사는 선종의 종지뿐만 아니라 경전에도 통달하였고, 해(解)와 행(行)이 상응하였으며, 변재에 걸림이 없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널리 알리는 데 힘써서 국내외로 두루 다니시면서 경을 강의하였다. 1952년 세계불교협회 회의가 부산에서 열렸을 때 한국을 방문한 적도 있다. 주로 『능엄경』, 『법화경』, 『반야심경』, 『금강경』, 『아미타경』, 『아미타경요해』, 『대승기신론』 등의 경전을 강의했는데, 늘 법석이 가득 차고 듣는 사람마다 법열을 느끼고 찬탄하였다.
또한 대사는 오래되고 유명한 여러 사찰에 머물면서 사찰의 면모를 새롭게 다듬었다. 청규(淸規)를 엄격하게 다시 세우고, 신도들이 서로 화합하게 하였다. 또한 고아원을 세우고, 주변 지역의 어려운 이웃을 돕고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을 교육하는 등 자선 사업에도 적극적으로 힘을 쏟았다.
일본군이 중국을 침략했을 때에는 항일구국운동에 참가하여 한때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그때 옥중에서 너무도 의연하게 대처하여 오히려 일본 헌병대장의 존경과 찬사를 받기도 하였다. 대사의 업적은 너무 많아 일일이 다 열거할 수 없을 정도이다. 대사는 1953년 음력 8월 12일에 세수 76세로 원적하였다. 그는 병이 깊어졌을 때에도 염불을 놓지 않았다. 그때 주변에서 간호하던 여러 제자들에게 이런 말씀을 남겼다.
“지금 나의 몸과 마음은 늘 안락하고 걸림이 없고 장애가 없다. 출가수행자는 생사에 마음을 두지 않고 병으로 수행을 도와야 한다. 나는 늘 나 자신을 ‘삼구당(三求堂)’ 주인이라고 불렀다. 그것은 내가 평생토록 복을 구하고(求福) 지혜를 구하고(求慧) 정토왕생을 구하는 것을(求生淨土) 종지로 삼았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복과 지혜는 이미 얻었고, 마지막으로 단지 정토왕생만이 남았다. 너희들도 이 세 가지를 구하는 것으로 수행의 지침을 삼도록 하여라. 뿐만 아니라 더 많은 출가수행자와 재가수행자들도 이 세 가지를 구하는 것으로 불법의 진정한 종지로 삼기를 바란다.”
대사는 말을 마친 후 게송을 읊었다.
오직 중요한 일이 하나 있으니,
오로지 아미타불 염불하여
극락정토를 구하여
상품의 자금대에 왕생하는 일이네.
唯有一宗事 但念阿彌陀
求生于淨土 上品紫金台
어느 날 저녁 제자들이 대사를 위하여 조념염불하고 회향을 하고 난 뒤였다. 대사는 그들을 침상 가까이 오라고 부르더니 이런 부촉을 남겼다.
“너희들이 염불할 때 늘 마음을 안으로 거두고 생각을 깨끗이 하여(攝心淨念) 자성(自性)을 알아야 한다. 지금 내가 너희들에게 물어보겠다. 방금 너희들이 염불할 때 염불하는 한 구절의 소리가 어느 곳으로 떨어졌는지 아느냐? 빨리 답해라! 빨리 답해라!”
원영 대사가 병석에서 마지막으로 남긴 이 법문을 거듭 읽고 그 뜻을 마음에 새겨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