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비우스 로마사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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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비우스 로마사 4

로마와 지중해 세계

리뷰 총점 10.0 (6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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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 풍속/문화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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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리비우스 로마사4 평점10점 | YES마니아 : 플래티넘 이달의 사락 m****h | 2021.07.30 리뷰제목
4편 로마사는 한비발이 한 바탕 휘적고, 서서히 서로마의 내리막길을 걸어가게된다. 로마사에서 한니발은 중국 한과 흉과의 대립과도 같은 큰 전환점을 가져온 사건이었다. 한니발은 기원전 202년 자마 전투에서 스키피오에게 패한 후 로마와 강화협정을 맺었다. 그 후 한니발은 고위 행정관으로 카르타고 내정에 참여하여 개혁을 시도했으나 반대파로 말미암아 목숨을 위협받게 된다.
리뷰제목

4편 로마사는 한비발이 한 바탕 휘적고, 서서히 서로마의 내리막길을 걸어가게된다.

로마사에서 한니발은 중국 한과 흉과의 대립과도 같은 큰 전환점을 가져온 사건이었다.

한니발은 기원전 202년 자마 전투에서 스키피오에게 패한 후 로마와 강화협정을 맺었다. 그 후 한니발은 고위 행정관으로 카르타고 내정에 참여하여 개혁을 시도했으나 반대파로 말미암아 목숨을 위협받게 된다. 그는 야간에 몰래 카르타고를 떠나 먼저 티레로 갔다가 시리아의 안티오코스 왕에게로 가서 몸을 의탁했다. 그는 로마와의 전쟁을 준비하던 안티오코스에게 로마에 대항하려면 시리아-마케도니아-카르타고의 연합 세력을 형성하여 포위 전술을 펴는 것이 좋다고 건의했다. 한니발은 그리스와 아시아의 세력을 규합하여 로마를 공격하면 조국 카르타고가 이에 호응해올 것이라는 기대를 버리지 않았다. 하지만 안티오코스는 신하들의 반대로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로마 당국은 지중해 세계에 커다란 전쟁을 다시 일으켜 권토중래의 구상을 갖고 있는 한니발을 극도로 경계했다. 그래서 플라미니누스가 보낸 한니발 추적대는 한니발이 안티오코스 왕을 떠나 비티니아의 왕 프루시아스에게로 도피한 것을 발견하고, 프루시아스를 찾아가 더 이상 한니발을 보호하지 말고 신병을 로마에 인도하라고 요구한다. 마침내 한니발은 독약을 마시고 자결한다. 이렇게 하여 한니발은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했고 때는 기원전 183년이었다.
그런데 스키피오 또한 이해에 쓸쓸한 죽음을 맞이했다. 늙고 병든 데다 정치적 게임에 염증을 느낀 스키피오는 해안 도시 리투르눔으로 은퇴했다. 한니발을 정복했고 아프리카, 아시아, 스페인의 3개 대륙을 정복한 로마 권력의 창설자가 다시는 고향 로마 도시로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고 결국 은퇴지에서 쓸쓸하게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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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그리스, 헬레니즘 문화의 계승 평점10점 | k******m | 2021.01.15 리뷰제목
번역본 《리비우스 로마사 4》권에서 다루는 내용은 2차 포에니 전쟁 직후 그리스 반도에서 일어난 전투가 대부분인데, 원전의 권수로는 31 ~ 45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2차 포에니 전쟁 때 로마의 주적이었던 한니발은 그리스 지역의 실력자인 마케도니아의 왕 필리포스 5세와 연합 전선을 구성하여 로마를 압박했다. 한니발의 패배 이후 로마는 후방에서 계속 신경을 긁던 그리스 지역에
리뷰제목

번역본 《리비우스 로마사 4》권에서 다루는 내용은 2차 포에니 전쟁 직후 그리스 반도에서 일어난 전투가 대부분인데, 원전의 권수로는 31 ~ 45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2차 포에니 전쟁 때 로마의 주적이었던 한니발은 그리스 지역의 실력자인 마케도니아의 왕 필리포스 5세와 연합 전선을 구성하여 로마를 압박했다. 한니발의 패배 이후 로마는 후방에서 계속 신경을 긁던 그리스 지역에 대한 정벌을 시작했고, 그 결과 3차례에 걸친 마케도니아 전쟁 끝에 그리스 지역까지 세력권을 넓히는데 성공했다.

 

카르타고와의 전쟁에서 로마가 얻은 것은 무엇일까? 바로 해양(지중해)으로의 진출과 정복전쟁에 대한 자신감이다. 강대국 카르타고를 두 번이나 이겼다는 사실은 로마의 자존감을 높이기에 충분했다. 그럼 그리스 세력과의 전쟁에서 로마가 얻은 것은 무엇일까? 바로 헬레니즘 문화의 주도권을 가졌다는 점이다. 그리스는 서구 문명의 시초이자 철학의 근간으로 손꼽은 지역이다. 로마의 정치, 사회, 문화, 제도도 그리스 지역의 영향을 크게 받았는데 '그리스의 복사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로마의 공화정은 '자유'라는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자유 역시 그리스의 민주주의에서 비롯했다. 조선 시대까지 한반도의 지식인들은 중국의 문자인 한문으로 글을 읽고 썼는데, 마찬가지로 이 당시 로마의 지식인들은 그리스 헬라어를 바탕으로 그리스의 철학과 문화를 공부했다. 예로부터 동양 문화를 주도했던 나라가 중국이라면 고대 서양 문명을 주도했던 지역은 로마가 아닌 그리스였다.

 

여기서 문제가 생긴다. 서구 문화 나아가 헬레니즘 문화를 주도하는 지역은 그리스지만, 실질적인 힘은 카르타고를 무찌른 로마에게 있었다. 이 당시 그리스 지역은 로마처럼 하나로 통일되지 않고, 도시국가들끼리 합종연횡을 거듭하며 분열하고 있었다. 특히 마케도니아를 비롯한 몇몇 국가들은 로마에 적대적인 행동도 서슴지 않았는데, 카르타고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로마의 입장에서 그리스는 '언젠가는 정복되어야 할 대상'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리스 사람들에게 로마인들은 '난폭한 야만인'으로 통용되었고, 자부심이 강한 로마인들 입장에서 그리스인들은 '문화적 수준은 높지만 이를 지탱할 실질적인 힘이 없는 허풍쟁이들'로 비쳤다. 그렇기에 로마는 '그리스 인들을 해방'시킨다는 명분 아래에 그리스 지역으로 군사활동을 시작하는데, 이는 결국 '그리스 문명을 힘으로 계승'하겠다는 의도였다.

 

문화를 힘으로 쟁취하려는 행위는 결국 제국주의의 시작이다. 카르타고와의 전쟁에서 이긴 로마는 지중해를 이용하여 해양으로 세력 확장을 시도하기 시작했는데 그 타깃이 바로 그리스였다. 로마는 카르타고의 식민지 정책을 본받았는데 기존까지 로마는 점령한 도시에 대하여 동맹 관계로 예우하고 존중했지만 포에니 전쟁 이후 점령지들을 속국으로 다루기 시작했다. 한편 그리스의 맹주 마케도니아의 왕 필리포스 5세는 야심만만했으며 호락호락한 왕이 아니었다. 그는 한니발의 제의를 받아 로마의 신경을 건드렸는데 양국의 전황을 살피다 기회주의적인 태도로 대응하기 시작했다.

 

로마 입장에서 이는 결코 좌시할 수 없는 부분이었고, 그랬기에 포에니 전쟁 직후 사절을 파견하여 전쟁의 구실을 찾아 그리스 지역을 정벌하는데 이르렀다. 이 시기부터 로마는 제국주의를 추구하기 시작했는데, 스페인, 카르타고, 그리스를 시작으로 서쪽으로는 서부 유럽 갈리아와 영국, 동쪽으로는 소아시아 지방까지 세력권을 형성했다. 로마의 제국주의 정책에 있어 스페인과 카르타고 점령이 물리적인 실력 과시였다면, 그리스 점령은 영토 점령보다는 정신적인 사상과 문화를 흡수, 계승하는 측면이 강했다. 그리스 점령을 끝으로 로마는 서구 문명의 계승자임을 증명했으며, 제도와 군사에 있어서도 당대 최고 수준의 국가로 공인받았다.

 

고대 ~ 근세의 강대국들은 대부분 제국주의적인 입장을 견지했다. 왜 그랬을까? 노골적으로 꼬집자면 부유와 풍요 때문이었다. 로마도 마찬가지다. 전쟁은 고단하고 괴로웠지만 그 이득은 엄청났다. 포에니 전쟁에서 승리한 이후에 로마는 카르타고에게 전쟁 배상금을 비롯하여 엄청난 이권을 챙겼고, 이에 맛 들인 로마는 축적된 부를 바탕으로 더욱더 많은 영토를 추구하게 됐다. 여기서 생각해 볼 점은 부유와 풍요가 과연 국가의 발전에 있어 무조건적으로 도움이 되는가이다. 국가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부와 풍요가 필요하다. 아무리 좋은 제도와 의식이 높은 국가일지라도, 이를 유지할 수 있는 물적 토대가 없다면 한계가 있기 마련이니까. 로마도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면서 국가의 부와 풍요가 공화정을 유지하는 데 있어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로마는 넘치는 풍요가 국가 발전에 있어 반작용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점을 간과했다. 그리스를 점령하면서 로마는 그리스인들의 추구하던 사치와 쾌락, 환락들의 요소들도 남김없이 수용했고 이런 과도한 풍요는 결국 로마의 정신의 타락, 부정부패로 이어졌다. 또한 제국주의를 추구하던 로마는 광활한 영토를 다스리는 데에 있어 공화정이라는 시스템에 한계를 느꼈다. 로마의 원로원과 호민관들은 광활한 속주의 지방관들을 견제할 여력과 힘이 없었는데, 이런 틈을 타서 속주의 지방관들은 군벌 세력을 이루기 시작했다. 이런 군벌 세력들의 경쟁을 통해 로마는 1인 독재 체제로 전환되기 시작했는데, 여기에 방점을 찍은 것이 카이사르와 그를 계승한 아우구스투스다. 역대 이래로 로마의 지성인들은 공화정 체제를 무척 자랑스러워했는데 그 이유는 '자유'를 보장받았기 때문인데, 절대자의 노복이나 신민이 아닌 자유로운 시민으로 인정받는것을 명예로 생각했다. 그래서 리비우스를 필두로 하여, 타키투스, 플루타르코스 등등의 역사가들은 자신들의 저서에 노골적으로 공화정을 그리워하며 찬양하였다. 18세기 서양 사회에서 신분제 타파 운동이 일어난 것도 고대 그리스 이래로 '자유'에 대한 정신이 끊임없이 이어졌기 때문인데, 이런 정신의 근원을 고대 로마의 공화정에서도 찾을 수 있다.

 

정리해보자면 식민지 정책으로 인해 넘치는 풍요는 국가를 외향적으로 발전시켰지만, 반대로 공화정이라는 정치 제도를 붕괴시키는 시초가 된다. 공화정이 사라진 뒤, 로마는 탐욕스러운 황제들의 지배를 받는 제정 사회로 진입하였다. 물론 황제의 지배를 받는 로마 제국 역시 전성기를 맞이하여 세계적인 제국으로 인정받았지만, 공화정 시대보다 시민들의 자유의지나 사회적 활력이 결여된 것은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번역본 《리비우스 로마사 4》권의 메인은 그리스 정벌이지만, 포에니 전쟁의 주축이었던 한니발과 스키피오의 최후도 자세하게 나와있어 흥미를 끈다. 2차 포에니 전쟁 직후 한니발은 카르타고에 남아 내정 개혁을 시도하지만 친로마 의원들에 의해 정치적으로 축출되고 시리아의 안티오코스 왕에게 의탁했다. 한니발은 강적 로마를 이기기 위해서는 그리스의 마케도니아, 시리아와 카르타고가 연합하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마케도니아와 안티오코스는 차례로 로마의 침략 앞에 무너졌고 한니발 역시 소아시아 지역을 떠돌며 망명자 생활을 이어갈 수밖에 없었다. 카르타고를 굴복시킨 스키피오는 동생 루키우스의 그리스 정벌에 군사 참모로 참여하였는데, 소아시아에서 감찰을 나갔을 때 숙적 한니발과 마주하게 된다. 두 장군은 여기서 허심탄회하게 서로를 인정했으며 훈훈한 이야기를 이어나갔는데, 역사가들 사이에서는 이 만남을 두고 리비우스가 지어낸 허구로 의심했다.

 

스키피오의 최후 역시 한니발과 비슷했다. 조국을 구원한 스키피오는 명성과 권력이 정점에 달했고, 이로 인해 많은 원로원들의 질시와 질투를 받았다. 결국 자신을 음해하는 세력들의 압박을 받아 해안 도시 리투르눔으로 은거하여 고향인 로마를 다시 찾지 않았다. 로마를 구원했으며 스페인과 아프리카, 그리스, 소아시아 영토를 정복한 스키피오의 업적은 너무나도 거대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런 거대한 업적 때문에 스키피오는 시기와 질투를 받아야 했으며, 자신 스스로도 그런 상황을 뼈져리게 인식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스키피오는 자신의 정치적 야심을 버리고 공화국의 자유를 수호하는 입장을 상기하며 정계에서 은퇴하였다. 이렇듯 포에니 전쟁 직후까지만 하더라도 로마의 군벌 세력은 권력과 세력이 강하여도 공화정이라는 시스템을 파괴하는 것에 있어 극도로 신중한 모습을 보였다.

 

번역본 《리비우스 로마사 4》 권을 끝으로 현재 전해지는 《리비우스 로마사》 완독을 완료했다. 책을 통해 로마에 대해 한층 더 깊이 있게 알 수 있었으며, 로마 초기의 활동적이고 생생한 모습을 직접 확인할 수 있어서 너무나도 즐거웠다. 비록 온전하게 전해 내려오지 않고 부분적으로 전해지는 고전이지만 이번 번역을 통해 리비우스의 수려한 필력을 접할 수 있게 된 점도 큰 의의라고 생각한다. 아무튼 묵직하고도 의미 있는 고전으로 새해를 열게 되어 무척 행복하다. 이번 《리비우스 로마사》 완간을 계기로 대한민국의 인문학 도서 시장에 깊이 있고 의미 있는 고전들이 많이 소개되었으면 좋겠다. (개인적으로 '《리비우스 로마사》의 요약본'과 '폴리비우스의 《역사》'도 번역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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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구매 헬레니즘 세계의 몰락 평점10점 | YES마니아 : 플래티넘 x***2 | 2020.12.28 리뷰제목
로마 이전에 지중해를 지배했던 세력은  바로 그리스였다. 유명한 알렉산더 대왕이 페르시아를 정복한 이후, 비록 그리스인들이 로마인들처럼 정치적으로 단결을 하지는 못했으나, 그래도 그리스인들은 여러 개의 왕국을 세워서 지금의 그리스 본토에서 이집트와 서아시아 및  심지어 인도의 국경 지역에 이르는 방대한 영토를 지배했다.   고대 로마라고 하면 으레 떠올리는 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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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이전에 지중해를 지배했던 세력은 

바로 그리스였다.

유명한 알렉산더 대왕이 페르시아를 정복한 이후,

비록 그리스인들이 로마인들처럼 정치적으로 단결을 하지는 못했으나,

그래도 그리스인들은 여러 개의 왕국을 세워서

지금의 그리스 본토에서 이집트와 서아시아 및 

심지어 인도의 국경 지역에 이르는 방대한 영토를 지배했다.

 

고대 로마라고 하면 으레 떠올리는 유명한 인사 중 한 명인

고대 이집트의 여왕인 클레오파트라도

일부 매체에서 묘사하는 것처럼

무슨 흑인이나 동양인이 결코 아니라,

알렉산더 대왕의 부하 장군인 프톨레마이오스의 피를 받은

그리스인이었다. 

 

클레오파트라에 비하면 그 인지도가 매우 낮지만,

200년 넘게 존속하면서

전성기에는 지금의 터키에서 인도까지 지배했던 

초강대국인 시리아의 셀레우코스 왕조도 빼놓을 수 없다.

왜냐하면 이 나라는 로마 제국 이전까지

지중해 세계에서 가장 강력하고 번성했기 때문이었다.

 

이렇듯 로마가 강대국으로 발흥하기 이전까지

지중해 세계는 그리스 세력의 지배 하에 있었고,

로마는 사실 그들에 비하면 보잘 것 없는 신출내기였다.

 

그런데 믿을 수 없게도 그토록 강력하고 거대했던 

셀레우코스 왕조가 

기원전 190년에 벌어진 마그네시아 전투에서

로마군에게 어이없는 패배를 당하면서

계속 세력이 약해지며 내리막길을 걷더니,

결국에는 로마 장군 폼페이우스에게 힘없이 멸망당했다.

 

로마가 카르타고와의 전쟁에서 계속 패배하면서도

끝끝내 회복하여 결국 카르타고를 멸망시킨 것과는

너무도 대조적인 역사다. 

 

셀레우코스 왕조는 왜 로마처럼 되지 못했던 것일까? 

그 이유를 요약하자면 셀레우코스 왕조의 구성원들은

로마처럼 공동체를 위한 희생과 봉사의 정신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렇기 때문에 그토록 거대했던 초강대국이

마그네시아 전투라는 단 한 번의 패배로 인해

불과 100년도 못되어 해체와 소멸이라는 비극을 겪게 되었던 것이다.

 

희생과 봉사의 정신이 결여된 공동체는

겉으로 보기에 제아무리 크고 화려해 보여도

속빈 강정처럼 언제든지 형편없이 무너질 수 있다는 교훈을

이 책을 읽으면서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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