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 그게 불가능하다고 알고 있었다. 어느 날 그것도 모르는 바보가 나타났고, 그 바보는 결국 해냈다." 프랑스 극작가 마르셀 파뇰의 말이다. 한국 불교사에 길이 남을 큰 바보가 성철스님이시다. 큰 바보야말로 반야검, 취모검의 진정한 주인이라고 할까. 불교소설의 대가 백금남은 선과 교의 갈림길에서 방황하던 성철의 구도기를 흥미롭게 들려준다. 만공과 조우한 성철, 심검당의 문지기 노릇을 하며 수행에 정진한다. 그리고 임제의 고함과 덕산의 몽둥이가 본격화되는데 10년 동구불출, 8년 장좌불와가 산증표다. 산승의 큰 깨침에 이어, 속가의 어머니는 물론, 아내와 딸마저 출가하게 된 기연은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성철스님의 말씀대로, 불교는 진리를 궁구하는 최고의 길이다. 깨달음과 깨침에 대한 욕구 혹은 발원은 대욕이다. 세상에서 가장 큰 욕심이 깨침에 대한 욕심인 것이다. 성철스님의 이상은 높았고 성취욕은 컸고 근성은 질겼다. 돈오돈수에 대한 강조는 스님의 구도자적 품성을 잘 드러낸다. 성철스님은 돈오점수와 돈오돈수에 대한 논쟁을 크게 불러일으켰는데, 이 논쟁은 진제와 속제의 분별이 없으면 정말 혼동하기 쉽다. 성철스님이 말씀하신 돈오돈수가 진제라면, 보조국사 지눌의 돈오점수는 속제에 해당한다.
이 소설을 보기 전까지 나는 돈오돈수의 의미를 곡해했었다. 깨침과 깨달음을 구분하고, 진제의 차원에서 불성 각성의 의미를 강조한 가르침이란 것을 잘 몰랐었다. 스님은 참선하는 이는 바쁘고 바쁜 때에도 화두가 한결같은 동정일여, 꿈속에서도 변함없는 몽중일여, 잠이 완전히 들어서도 화두가 밝은 숙면일여의 경지를 넘어서야 한다고 했다. 돈오돈수는 한소식했다고 경솔하게 나대는 사이비 수행자들의 어깨에 내리는 큰 죽비가 아닐 수 없다.
어느 종교를 막론하고 수도자가 된다는 것은 보통의 사람이 하는 것은 아니다.
유혹, 비움, 중도, 사랑 등 평범한 인간으로는 알 수 없는 많은 화두를 갖고 수행하고
실천하는 것임을 귀로 듣고 글로 읽어 알고 있었지만 승이 되는 수도자의 길을 자세히
알게 되는 것은 처음이라 할 수 있다.
평범한 가장에서 세속의 연을 끊고 수도자의 길을 택했던 영주. 그는 가족들에게
무책임하고 불효막심한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세속의 연보다 부처의 깨달음을
택했던 것은 역시 평범하지 않는 아무나 수도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소설 성철'을 읽으면서 수도를 하는 성철의 생활과 법문을 보면서 나는 자꾸만 예수의
성장과 전도 생활이 생각이 났다. 성공한 위인은 못난 꼴 보이던 고향으로 가지 말라는 말
처럼 예수님도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했다. 마음의 검은 까마귀와 흰 까마귀의 이야기도
그렇다. 예수님도 광야에서 마귀들의 꼬임을 받았던 것을 보면 인간의 심리는 비슷한 것 같다.
꼿꼿한 기계와 마음가짐으로 흔들림 없이 중도를 내세웠던 성철 스님의 가르침이 고스란히
들어 있는 '소설 성철'은 알듯도 하고 모를듯한 내용들이 가득하다. 그럼에도 책을 읽으면서
손에서 놓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세상일에 찌들어 있는 마음 때문이었던 같다.
수행을 고통으로 여기지 않았던 부처와 같이 그는 수행의 고통을 즐겁게 받아들이며 정진했다.
그렇게 삶자체에서 깨달음을 터득하면서 많은 제자들에게 글을 남기고 욕심으로 가득한
불자들에게 경종을 울렸던 것이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부처님은 이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것이 아니요.
이 세상이 본래 구원되어 있음을 가르쳐주려고 오셨습니다.
이렇듯 크나큰 진리 속에 살고 있는 우리는 참으로 행복합니다.
다 함께 길이길이 축복합시다. (P283-자기를 바로 봅시다 중)
부처나 예수나 세상은 이미 구원을 받았고 용서를 받았음을 이야기하지만 사람들은 대다수는
자기의 욕심을 챙기려 죄를 짓고 시시비비를 따지고 산다. 수많은 선각자들이 그랬듯이
성철 스님도 자신의 죄보다 남의 죄를 참회 함으로써 극락세계를 이루기를 빌었다.
소설 성철을 통해 그가 평생 수행에서 얻는 지혜를 거저 얻었다. 예수가 자신의 죄보다
인간의 죄를 대신해서 죽음으로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처럼 불교계의 많은 선각자들이 자신의
죄보다 타인의 죄를 위해 참회하고 기도하므로 오늘날 우리가 사는 것이는 생각이 된다.
수도자는 자신의 자리에서 수행을 하는 것이고 평범한 우리는 세속에서 자기의 자리에서
수행을 하면서 사는 모두가 수행자라는 말이 있다.
'우리가 승려로서 절에서 수행하면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실행하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지만 그래도 가까이는 가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설사 가르침을 다 실행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부처님이 하신 말씀을 실천하기는 커녕 역행하여 정반대 쪽으로 가지
말아야 합니다. (P190)
소설 성철에서 내게 가장 중요하게 다가오는 글귀라 적어 보았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만을 제공받아 읽고 작성한 글입니다.]
1권에 이어 금방 다 읽어내려갈 것 같은 큰스님 이야기
내가 평소에 항상 존경하는 큰 스님의 일대기를 그린 작품이 소설로 출간돼
우연히 서점을 방문하였다가 바로 눈에 들게 되었습니다.
가르침을 늘 새기고 따르려 노력 하는 재가불자의 한 사람으로서
이번 작품이 상당히 기대됩니다.
늘 그리고 마지막으로 당부하신 "참선 잘 하그래이"
라는 말이 오늘따라 귓가에 맴도는 듯 하네요
가셨지믄 항상 곁에 계신 듯한 스님
감사합니다.
잘 읽겠습니다.
"사람들이 모두 세속이 물들지 않은 모습으로 되돌아가야만 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으며, 그제야 비로소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 된다'라는 것이었다. (p.220)
'한결같다'라는 말이 생각난다. 그 한결같음이 없었다면, 성철 스님에 대해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일제강점기와 6.25를 거쳐 1980년 민주화 운동이라는 큰 시대적 흐름 속에서 그의 발자취는 끊임없는 수행의 연속이었다.
'장좌불와'란 눕지도 자지도 않는 수행을 말한다. 대승의 길을 가기 위해 성철 스님은 8년이라는 시간 동안 수행을 이어간다. 남들과는 다른 삶을 살아가는 성철 스님을 바라보면서 부럽다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일제 강점기 하의 상황들과 자신과 관련된 인연들을 끊고 자신이 원하는 길을 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지금 이 글을 적어가고 있는 약간의 부러움을 느끼지만, 나한테 그렇게 살라면 살 수 있을까?
스스로 지은 '수도 팔계'라는 계율을 지켜가면서 수행을 계속하는 성철 스님은 드디어 자신의 굴레에서 벗어난다. 그러나 수행은 끝나지 않는다. 일제 강점기하에 왜색 불교의 유입으로 타락한 한국 불교를 살리기 위해 '봉암사 결사'를 시작으로 해서 왜색 불교의 많은 부분을 걷어낸다.
"소승은 남의 깨침에 연연하지만, 대승은 오직 자신만의 체험으로 깨침의 세계로 들어간다." (p.105)
무엇인가에 연연해한다는 것이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아닐까.
그런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은 어쩌면 행복한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가족과의 연을 끊고 오로지 구도자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그들도 분명히
자신들의 가족들이 있었겠지만, 그들은 선택을 하고 그 길을 오롯이 걸어간다.
<소설 성철>은 성철 스님의 일대기를 다룬 장편 소설로써 성철 스님의 가족사와 함께
우리나라의 100년 역사를 돌아볼 수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평생을 수행하는 사람으로 살아 간 성철 스님의 진면목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리딩 투데이를 통한 출판사 지원 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