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부터 다시 배우는 서양고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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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다시 배우는 서양고대사

메소포타미아·이집트 문명부터 서로마제국 멸망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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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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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처음부터 다시 배우는 서양고대사 - 정기문 평점9점 | g*******7 | 2021.04.28 리뷰제목
시대 면에서 서양고대사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출범부터 서로마제국의 멸망까지 다루어야 한다. 일반적으로 고대 그리스를 서양 문명의 원류로 규정하고 메소포타미아?이집트 문명을 소홀히 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나 서양 문명의 기둥이라고 할 수 있는 종교, 철학, 법은 모두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에서 유래했다.   - p. 5中에서 -  서양고대사라고 하면 보통 고대 그리
리뷰제목

 


 시대 면에서 서양고대사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출범부터 서로마제국의 멸망까지 다루어야 한다. 일반적으로 고대 그리스를 서양 문명의 원류로 규정하고 메소포타미아?이집트 문명을 소홀히 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나 서양 문명의 기둥이라고 할 수 있는 종교, 철학, 법은 모두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에서 유래했다. 

 - p. 5中에서 -


 서양고대사라고 하면 보통 고대 그리스와 로마를 떠올리기 마련이다. 하지만 [처음부터 다시 배우는 서양고대사]의 서문에서는 기존의 그러한 관점에서 벗어나서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 문명을 서양 문명의 원류로 보려는 시도를 엿볼 수 있다. 역사에 관심이 많은 나로서도 저자가 새롭게 설명하는 서양고대사에 대한 내용들을 배우면서 시야를 넓힐 수 있었는데, 특히 나에게 도움이 되었던 내용들로 이 책에 대한 리뷰를 써보고자 한다. 

 

 우선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 문명에 대한 상세한 내용을 첫번째로 손꼽고 싶다. 전공이 아니라면 대부분 이 두 문명은 세계사 초반에 거대한 강 유역에서 생겨난 4대문명으로 짧게 언급되는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4대문명 중 가장 먼저 발전하였음을 시작으로 그 문명의 특징과 역사를 상세히 다루고 있다. 특히 이 지역의 세계관을 지형적인 특징과 함께 언급한 부분이 흥미롭다. 메소포타미아는 높은 산이 거의 없고 끝없이 평야갸 펼쳐져 있었다. 즉, 자연적 방어물이 없는 개방적인 지형이었기 때문에 도시를 건설할 수밖에 없었고, 산악 지역에 사는 주변 종족들의 침입이 찾았다. 이 지역에 각기 다른 종족들이 다양한 왕조가 등장한 것도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따라서 자연재해와 전쟁에 시달리던 메소포타미아 사람들은 현세의 삶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으니 이들은 내세를 중요시하지 않는 현세 중심 세계관을 발전시키게 되었다. <메소포타미아 = 개방적 지형, 이집트 = 폐쇄적 지형>임을 감안한다면 이집트가 왜 내세 중심의 세계관을 갖게 되었는지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서양 문명의 원류임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1929년 영국의 고고학자 레너드 울리가 '우르(수메르인의 중심지)'의 유적 발굴1849년 고고학자 레이어드가 '니느웨(아시리아의 수도)'에서 발견한 3만 개의 점토판을 꼽고 있다. 먼저 '우르'의 유적 발굴 과정은 가장 오래된 유적층을 발굴하기 위하여 계속 땅을 파들어가다가 그 마지막층이 점토층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서양인들에게 충격을 안겨주었다. 단단한 땅이 아닌 점토층이라는 사실은 그지역에 거대한 홍수가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고, 실제 그 점토층에는 바다 생물들의 잔해와 소금기가 남아있었다. 이는 대홍수가 거대한 해일임을 뜻한다. 또한 1849년에 발견된 점토판을 해독하다가 1872년 [길가메쉬 서사시]가 발견된다. 해독 내용은 영웅인 길가메쉬가 영생을 얻기 위한 여정에 관한 것인데, 그 안에서 우트나피슈팀이라는 인물이 길가메쉬에게 영생의 비결을 이야기하는 부분에서 다음과 같은 대목이 등장한다.


 "옛날 하고도 아주 옛날 지상의 인간들이 타락하자, 신들은 살아 있는 모든 창조물을 절멸시키기 위해 대홍수를 일으켰다. 그때 위대한 지혜의 신 에아가 나에게 나타나 배를 만들고, 살아 있는 생물들을 모두 한 쌍씩 태워 멸망을 피하라고 말씀해주셨다. 나는 에아 신의 조언대로 거대한 방주를 만들고, 살아있는 동물을 한 쌍씩 태워, 멸망을 피할 수 있었다. (중략)"

 - p. 28 中에서 -


 

 '우르' 지역의 지질 탐사와 [길가메쉬 서사시]의 발견은 유럽 교회의 입장에서는 충격적인 것이었다. [길가메쉬 서사시]의 일부 내용은 바로 성경에 등장하는 '노아의 방주'와 너무나 흡사하였으며, 실제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거대한 해일로 인한 홍수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지질 탐사 결과가 그것을 뒷받침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이 등장하기 이전에 이미 그러한 내용들이 쐐기문자로 점토판에 기록되어 있었으니 교회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참고로 [길가메쉬 서사시]는 기원전 21세기 경에 기록이 되었다. 유럽에서 교회가 서양 문명의 한 축이었음을 감안한다면 이러한 실질적인 증거와 기록은 서양 문명의 원류가 바로 그들이 '오리엔트'라 부르던 메소포타미아 지역임을 잘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이집트의 문명과 왕조에 대한 역사도 기존의 책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상세하게 잘 정리되어 있다. 특히 1922년에 이루어진 투탕카문의 무덤을 거의 원형에 가깝게 발굴한 고고학적인 성과는 우리에게도 꽤 익숙한데, 이 무덤의 주인인 투탕카문을 통하여 저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이집트의 고대 역사를 들려준다. 황금 마스크로 잘 알려진 투탕카문의 무덤은 다른 이집트 왕의 무덤에 비하여 완성도가 뛰어나지 않으며 전반적으로 무덤이 급하게 만들어진 것인데, 이는 투탕카문이 급사 또는 살해되었음을 의미한다. 이집트에서 파라오의 권력을 감안한다면 도대체 투탕카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투탕카문은 아멘호테프 4세(기원전 1353 ~ 1335)의 아들로서 2년 남짓 재위에 올랐던 형을 대신하여 왕위에 오른 인물이다. 투탕카문은 선왕인 아멘호테프 4세, 즉 아켄아텐의 정책을 수행하려다가 결국 정적들에 의하여 살해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투탕카문의 아버지였던 아켄아텐의 정책은 무엇이었을까?

 

 기원전 1353년에 즉위한 아멘호테프 4세는 테베의 수호신인 아문 신을 모시는 사제들의 권력이 강하여 이들을 견제하기 위하여 새로운 태양신을 도입하여 그 이름을 '아텐'이라 명명하였으며, 자신의 이름 역시 '아텐 신을 위해 유용한 권능을 가진 이'라는 의미의 '아켄아텐'으로 바꾸었다. 이러한 새로운 종교의 도입으로 사제들의 권위는 낮아졌고, 파라오의 권위는 강화되었다. 심지어 당시 이집트 왕조의 수도인 테베를 버리고 '아마르나'로 천도하면서 개혁 정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게 된다. 그는 내치에 힘을 쓰고 외부의 적들과는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고자 노력했지만, 그의 개혁정책은 결국 실패로 돌아간다. 이로 인하여 그가 사망한 이후 그가 도입한 종교도 금세 사라졌으며, 다시 사제와 귀족들이 득세를 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아켄아텐의 아들 투탕카문은 아버지의 개혁을 이어가려고 시도하다가 결국 귀족들의 힘에 눌려 암살당하였음을 추론해 낼 수 있다. 이런 부분은 우리에게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이집트 왕조의 역사를 이 책에서 꽤 상세히 다루고 있음을 보여준다. 대부분 이집트 문명에 대한 짧은 설명과 소설로 유명해진 '람세스', 유대인의 애굽 탈출, 클레오파트라의 등장과 같이 짧막한 사건과 인물을 통하여 이집트를 알던 많은 사람들에게 저자는 서양 문명 원류의 또 하나의 축인 고대 이집트에 대하여 보다 체계적으로 다루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저자는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의 문명과 역사를 상술한 이후 비로소 고대 그리스를 다루게 된다. 원래 서양고대사의 시작을 그리스로 보는 경향이 우세하다보니 이 책에서 등장하는 고대 그리스의 역사는 그리 새롭다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저자는 서양인들 스스로가 원래부터 고대 그리스를 그들의 문명의 뿌리로 생각한 것은 아니었음을 설명하는 부분은 꽤 흥미롭다. 19세기까지 서양 문명의 뿌리는 그리스가 아닌 로마와 기독교였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분명 그리스는 민주주의와 함께 페르시아의 침입을 물리치고 번영을 이룬 역사를 지니고 있지만, 그 이후로는 사실 잘 언급되지 않는다. 알렉산더의 마케도니아와 로마에 의하여 점령당하거나 식민지의 지위를 유지하다가 나중에는 아예 오스만 제국의 지배까지 받게 되니 고대를 제외하고는 딱히 유럽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는 볼 수 없다. 심지어 유일신을 신봉하는 기독교가 서양에 자리하면서 다신교의 상징인 그리스는 더욱 이질적으로 보일 수밖에는 없었으니 서양인들은 로마의 유산, 기독교, 게르만족의 유산을 서양 문명의 3대 기둥으로 보는 견해가 강했던 것이다. 하지만 19세기 서양인이 민주주의를 지향하게 되고, 또 그리스가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하여 서양 세계의 일원이 되면서 비로소 그리스를 서양 문명의 뿌리로 받아들였다고하니 고대 그리스가 서양고대사의 시작이라는 생각이 정립된 것이 그리 오래 되었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책에서 다루는 로마 역사에서 눈여겨 볼만한 부분은 바로 '기독교 박해'이다. 로마의 공화정이라든지 실용적인 문화, '팍스 로마나'와 같은 것을 제쳐두고 '기독교 박해'에 눈길이 쏠린 이유는 이 부분이 그동안 상세히 다뤄지지 않았으며 또 그것을 통하여 로마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다는 점이다. 그동안 기독교에 대한 박해는 잘 알려지지 않은 상황에서 훗날 기독교가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하여 공인되고, 테오도시우스 황제에 이르러서는 로마의 국교로 선포되었다는 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로마 시대의 기독교에 관한 전부니이게 기독교에 대한 박해를 시기별로 나누어 그 특징을 다룬 부분은 소중한 자료가 아닐 수 없었다. 먼저 저자는 기독교 박해를 다음과 같이 구분하여 설명한다.


1기의 박해 : 비종교적인 이유로 가해진 박해

2기의 박해 : 기독교를 불법 종교로 규정하다

3기의 대박해 : 대위기 속에 가해진 혹독한 박해



 1기의 박해와 2기의 박해는 기독교를 로마가 불법 종교로 간주했는지의 여부에 따라 갈라진다. [쿠오바디스]로 잘 알려진 네로의 기독교 박해는 사실 정치적인 목적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후 로마의 몇몇 황제는 민심을 달래거나 정치적인 관심을 다른 곳으로 분산시키기 위하여 기독교를 희생양으로 삼았던 것이다. 따라서 1기의 기독교 박해는 간헐적으로 그다지 크게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기독교인이 점점 증가하면서 세상의 종말이 임박했다고 선전하고 로마인이 숭배하는 신을 우상이라고 비난하며 로마의 전통적인 가족 윤리마저 거부하면서 갈등의 양상은 점점 커지게 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결국 트라야누스는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기독교인을 처형한 속주 총독의 행위가 정당하다고 판단함으로써 이제 기독교는 로마에서 불법 종교로 규정되었다. 참고로 트라야누스는 '5현제' 중 한명으로써 기독교가 로마의 전성기 시절에 불법 종교로 규정이 되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하지만 2기의 박해의 규모 역시 그다지 크지 않았다. 기독교를 믿는 것이 불법이라고 해도 사형에 처하기 위해서는 총독의 재판으로 결정되는데, 대부분의 총독은 핵심 지도자만 처형하고 나머지는 유배 또는 징역형에 처했기 때문이다. 

 

 249년 '데키우스 박해'는 3기의 대박해의 시작으로 본다. 2기의 박해는 오랜 기간 동안 수백 명의 기독교 신자가 순교한 것과는 달리 3기의 박해는 말 그대로 '대박해'로 진행되었다. 그 이유는 이 시기에 로마가 외부의 적들과의 전쟁에서 점점 압박을 받으며 몰락의 길을 걷고 있었기 때문이다. 로마는 그 이유를 바로 기독교인에게 돌린 것이다. 그들이 로마의 우상 숭배라든지 가족 윤리를 거부하고 있기 때문에 로마의 내부 질서를 어지럽히고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래서, 249년을 시작으로 기독교에 대한 박해는 더욱 강화된다. 그럼에도 결국 기독교의 확장은 멈추지 않았고, 훗날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하여 공인되며 이후 유럽의 종교로 자리하게 된다. 이런 점들은 로마의 기독교 박해가 특정 종교에 대한 박해로 끝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로마의 기독교 박해의 특징을 각각 분리하여 살펴본다면 로마의 상황과 더불어 기독교가 로마를 어떻게 변화시켰으며 이러한 변화가 훗날 유럽의 역사에 어떻게 영향을 끼쳤는지를 파악할 수 있게 된다. 이 또한 기존의 책에서는 쉽게 살펴볼 수 없는 것이어서 소중한 자료가 아닐 수 없다.

 

 이처럼 [처음부터 다시 배우는 서양고대사]는 애초 저자가 의도한 것처럼 기존의 내용과는 다른 고대 서양의 문명과 역사를 새로운 관점에서 들여다 볼 수 있다. 서양 문명의 기저에 깔린 메소포타미아?이집트 문명의 출범부터 다룬 부분, 문화사 분야의 비중을 높여 서양 문명의 이해를 위한 핵심적인 주제 배치, 그리고 고고학적인 발견과 같이 흥미로운 사례를 통하여 설명한 부분은 그러한 새로운 관점을 보다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요소라 할 수 있다. 누구에게나 익숙한 틀을 깬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상당히 가치가 있다. 책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도 가치가 있지만, 장구한 역사의 흐름을 하나 또는 특별한 관점으로만 서술하는 것이 꼭 맞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언급된 19세기 유럽인 조차도 자신들의 역사와 문명의 원류가 그리스가 아닌 로마로 생각했던 점을 떠올린다면 역사에 대한 평가와 관점은 분명 다양하게 이루어지고 형성될 수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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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명이 이 리뷰를 추천합니다. 공감 15 댓글 6
종이책 처음부터 다시 배우는 서양 고대사 평점10점 | 이달의 사락 k******4 | 2021.03.04 리뷰제목
처음부터 다시 배우는 서양 고대사 정기문 책과함께/2021.3.2. sanbaram   일반적으로 고대 그리스를 서양문명의 원류로 규정하고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문명을 소홀히 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나 서양 문명의 기둥이라고 할 수 있는 종교, 철학, 법은 모두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에서 유래했다. 그렇기 때문에 서양고대사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출범부터 서로마제국의 멸망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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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다시 배우는 서양 고대사

정기문

책과함께/2021.3.2.

sanbaram

 

일반적으로 고대 그리스를 서양문명의 원류로 규정하고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문명을 소홀히 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나 서양 문명의 기둥이라고 할 수 있는 종교, 철학, 법은 모두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에서 유래했다. 그렇기 때문에 서양고대사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출범부터 서로마제국의 멸망까지를 다루어야 한다고 말하는 처음부터 다시 배우는 서양 고대사의 저자는 서울대학교 역사교육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군산대학교 역사철학부 역사 전공 교수로 있다. 지은 책으로 역사를 재미난 이야기로 만든 사람들에 대한 역사책>, <역사는 재미난 이야기라고 믿는 사람들을 위한 역사책>, <역사란 무엇인가>, 로마는 어떻게 강국이 되었는가?> 등 다수가 있다.

 

수메르인은 도시를 건설하면서 중심지에 도시의 수호신을 위한 신전을 짓고, 신전에 수호신의 신상을 설치하고 예배를 드렸다. 이렇게 신전을 도시의 중심에 설치하고, 수호신을 위한 종교 활동을 도시 유지에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기는 관념은 그리스, 로마 시대까지 계속된다. 로마제국 말기에 기독교가 국교가 되면서 다신교도 신전이 기독교 성당으로 교체되었지만, 성당을 중심으로 도시를 건설하고 신에 대한 예배를 사회 운영에 가장 중요한 활동으로 여기는 관념은 근대까지 지속되었다고 처음부터 다시 배우는 서양 고대사서문에서 말하고 있다. 또한 최초의 철학이라고 이야기되는 그리스 철학도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의 영향을 받았다. 이는 무엇보다 그리스 철학의 초기 중심지가 밀레토스를 비롯한 소아시아의 이오니아 지방이었다는 사실에서 드러난다고 한다. 전체 내용을 1부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문명. 2부 고대 그리스. 3부 고대 로마 등 3부로 나누어 서양의 고대사를 설명하고 있다.

 

성경은 거대한 탑을 쌓은 것을 왜 신에 대한 도전이라고 규정했을까? 바벨탑이 다신교의 상징이었기 때문이다.(p.35)” 바벨탑을 쌓은 네부카드네자르는 아시아 일대를 정복했고 그 과정에서 예루살렘을 멸망시켰다. 바로 그 왕 때문에 유대인이 바비론으로 끌려와 바빌론 유수를 겪었다. 따라서 유대인은 네부카드네자르가 자신들의 신에게 도전하는 사람이며, 그가 탑을 쌓은 것도 신의 권위에 대한 교만한 도전이라고 생각했다. 성경의 바벨탑 전설은 유대인의 이런 시각을 반영한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뿐만 아니라 바빌론 유수를 전후하여 조로아스터교의 부활, 천사, 천국과 지옥, 심판 등의 신앙이 유대교로 편입되었다. 이후 유대교는 부족 종교에서 보편성을 추구하는 종교로, 현세 중심적 종교에서 내세 중심적 종교로 변하게 되었고 유일신 신앙이 자리 잡았다고 한다.

 

플라톤은 초기 기독교 교회의 신학 체계가 형성되는 동안 모범이 되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은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기독교적으로 재해석한 것이다.(p.163)” 플라톤주의는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시대에도, 계몽주의 시대에도, 그리고 20세기에도 되살아났다. 그는 서양 문명이 낳은 가장 위대한 저술가로 평가되기도 한다. 플라톤의 제자이면서도 다른 노선의 사상을 발전시킨 아리스토텔레스는 이후 2,000년 동안 그를 능가하는 철학자가 없었다고 할 만큼 철학의 거인으로 평가된다. 유럽에서는 12세기에 아리스토텔레스 저작이 재도입된 뒤에야 사상다운 사상이 발전했고, 중세의 스콜라철학도 아리스토텔레스가 없었다면 발전하지 못했을 것이다. 한마디로 그리스 철학은 스스로 생각하는 능력을 크게 키운 데 의미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철학이 탄생하기 전 거의 모든 그리스인은 신-종교 중심적인 세계관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신이 인간보다 절대적으로 우월하다고 생각했으며, 인간의 역사와 삶은 전적으로 신들의 결정에 좌우된다고 믿었다.

 

그리스인은 이탈리아 남부의 여러 도시, 즉 나폴리, 파이스툼, 엘레아, 크로톤, 시바리스 등을 건설했다. 이곳을 대그리스라고 불렀다. 이 지역의 문화수준은 그리스 본토 못지않게 높았다.(p.259)” 원래 그리스인은 자신들을 헬렌의 후예라는 의미의 헬레네스라고 불렀는데, 로마인이 그들을 그리스인이라고 불렀다. 그들이 나폴리만의 정착지에서 처음 만난 그리스인이 그라이키인이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현재 그리스라는 나라 이름이 널리 쓰이고 있지만, 엄격하게 이야기하면 그리스는 그들의 언어대로 헬라스로 불러야 한다. 현재도 그리스인은 자기나라를 헬라스 공화국이라고 부른다.

 

법과 함께 통치 체제도 정비되었다. 로마는 이탈리아반도를 통일하는 과정에서 정복지를 로마와 동등한 권한을 가진 지역으로 만들거나 동맹국으로 편제했다. 동맹국은 로마에 군사력을 제공하는 대신 자치를 인정받았다.(p.290)” 로마는 원래 자신의 적이었던 나라들을 정복한 후 동맹국으로 삼았고, 그들과 협력관계를 맺었다. 동맹국은 로마가 보여준 관용과 신의에 감동하여 점차 로마와 자신들을 하나로 여기게 되었다. 이렇게 적을 동지로 만드는 능력이 훗날 로마가 세계적인 대제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덕목이었다. 그러나 1차 포에니 전쟁에서 승리한 로마가 시칠리아를 차지하게 되었을 때는 상황이 달랐다. 카르타고와 싸우면서도 로마는 시칠리아인에게 군사적 지원을 요구했지만, 시칠리아인은 제대로 군대를 보내지 않았고 그나마 전투에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에 로마는 시칠리아인에게 돈이나 농작물의 형태로 세금을 바치도록 했다. 이 결정으로 기원전 241년 시칠리아는 로마 최초의 속주가 되었다. 속주 주민은 군대에 가지 않는 대신 수확의 10분의 1을 로마에 바쳐야 했다.

 

“2차 포에니 전쟁이 끝나자 카르타고는 히스파니아를 잃고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해야 했다. 카르타고는 50년에 걸쳐 배상금 1만 탈렌툼의 지불을 완수하고 점차 세력을 회복했다.(p.301)” 기원전 149년 카르타고는 이웃 국가인 누미디아와 전쟁을 일으켰으나 로마의 도움을 받은 누미디아와의 전쟁에서 완전히 패망했다. 로마는 정복전쟁의 결과 귀족들은 더 부유해진 반면, 자영농들은 대거 몰락하여 빈민이 되었다. 자영농의 몰락은 도시 문제와 곡물부족 문제를 야기했다. 자영농의 감소는 병력의 심각한 부족을 야기했다.

 

카이사르는 로마를 점령했고, 폼페이우스는 동방으로 도망가서 군사를 다시 모았다. 둘은 기원전 48년 파르살로스에서 최후의 결전을 벌였다. 폼페이우스는 두 배의 병력을 가지고도 패배했다. 카이사르는 이집트로 도망간 폼페이우스를 쫓아갔고, 카이사르가 온다는 소리에 겁먹은 이집트인이 폼페이우스를 죽였다. 거기서 카이사르는 클레오파트라를 품에 안고 서쪽으로 방향을 돌려 폼페이우스파 잔여 세력을 소탕했다.(p.332)” 카이사르가 생전에 신격화되었다는 것은 그의 권력이 절대적인 수준에 도달했음을 의미한다. 카이사르는 종신 독재관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의사당에서 그가 신임하던 브루투스에게 암살되었다.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의 복수를 하면서 최고 권력자가 되려고 했다. 그러나 카이사르의 후계자였던 옥타비우스는 19세의 어린 나이로 안토니우스에게 도전하여 로마를 점령했다. 결국 안토니우스와 제휴하여 23두정치의 시대를 열었다.

 

로마 문화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실용성이고, 이는 법과 건축 분야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p.357)” 가장 유명한 로만가도에 버금가는 시설은 상수도이다. 로마는 인구 백만이 넘었던 로마 시를 비롯한 제국의 여러 도시에 상수도 시설을 이용해서 물을 공급했다. 로마의 건축을 논의할 대 가장 먼저 살펴보아야 할 곳은 포룸 로마눔이다. 포룸 로마눔은 로마의 광장이라는 뜻이다. 포룸 로마눔의 주요 시설로는 먼저 신전을 들 수 있다. 그리고 원로원 의사당과 민회장을 들 수 있다. 이밖에 가장 유명한 건축물은 콜로세움이다. 그리고 판테움 돔, 대전차 경기장 등이 중요 건축물이다.

 

예수가 죽은 뒤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가 부활했다고 믿고 새로운 종파를 형성했다. 그들은 예수가 구약에 예언된 진정한 메시아이고, 그가 부활하여 머지않아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 재림하실 것이라고 주장했다.(p.374)” 베드로와 함께 초대 교회의 양대 기둥이라고 불리는 바오로는 율법 없는 선교를 기독교의 확고한 교리로 발전시켰다. 바오로는 유대인의 신앙을 거부하고, 율법은 수명을 다했으며 야훼는 유대인만의 하느님이 아니라고 선언했다. 이로써 야훼에 대한 유대인들의 독점은 깨어졌고 새로운 세상이 열렸다. 이후 기독교는 유대교에서 떨어져 나와 새로운 종교로 성장하게 된다. 먼저 기독교는 종족의 벽을 허물었다. 기독교가 부족신의 개념을 극복하고 보편신을 섬기게 되면서 고대사회의 지형도에 새로운 변화가 나타났다. 기독교는 또한 계층의 장벽을 제거했다.

 

콘스탄티누스의 기독교 공인으로 기독교는 비약적으로 발전하다가 마침내 로마제국의 국교가 되었다. 392년에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모든 이교 신앙을 금지하는 칙령을 내렸고, 이 칙령에 따라 기독교를 제외한 모든 종교는 로마제국에서 소멸하게 되었다.(p.398)”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제국의 질서를 근본적으로 바꾸지 않으면 위기가 계속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먼저 황제의 권력을 강화했다. 그리고 임기제 황제를 구상한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생각은 너무나 혁신적이었지만 오래 가지 못했다. 2기가 끝나고 혼란에 빠졌다. 콘스탄티누스가 병사들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켰다. 307년 그는 황제를 칭하면서 서방 지역을 차지했다. 이에 자극받은 막시미아누스의 아들 막센티우스도 반란을 꾀해 황제를 칭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가 꿈꾸었던 임기제 황제 시스템이 붕괴한 것이다. 재국은 다시 일시적 내란 상태에 빠졌다.

 

“395년 데오도시우스 황제가 죽으면서 로마제국은 동서로 갈렸다. 이후 서로마 제국은 476년 게르만 용병대장 오도아케르에게 멸망했고, 동로마제국은 1453년까지 계속되었다.(p.406)”

동서로 갈린 후 로마제국의 정통성은 동로마제국에 있었다. 흔히 비잔티움제국이라고 불리는 동로마제국은 어디까지나 로마제국이었다. 그곳에서 로마의 정치제도와 법률, 종교와 관습, 문화와 예술이 계승발전 되었다. 그러나 서양에서는 동로마제국을 크게 인정하지 않고 있다. 어쨌건 동로마제국이 멸망하며 로마는 멸망하게 되지만 그 영향력은 오늘날 까지 미치고 있다. 고대 서양의 역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다.

 

(예스24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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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처음부터 다시 배우는 서양 고대사 평점10점 | 이달의 사락 k******4 | 2022.11.08 리뷰제목
처음부터 다시 배우는 서양 고대사 정기문 책과함께/2021.3.2.   일반적으로 고대 그리스를 서양문명의 원류로 규정하고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문명을 소홀히 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나 서양 문명의 기둥이라고 할 수 있는 종교, 철학, 법은 모두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에서 유래했다. 그렇기 때문에 서양고대사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출범부터 서로마제국의 멸망까지를 다루어야
리뷰제목

처음부터 다시 배우는 서양 고대사

정기문

책과함께/2021.3.2.

 

일반적으로 고대 그리스를 서양문명의 원류로 규정하고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문명을 소홀히 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나 서양 문명의 기둥이라고 할 수 있는 종교, 철학, 법은 모두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에서 유래했다. 그렇기 때문에 서양고대사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출범부터 서로마제국의 멸망까지를 다루어야 한다고 말하는 처음부터 다시 배우는 서양 고대사의 저자는 서울대학교 역사교육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군산대학교 역사철학부 역사 전공 교수로 있다. 지은 책으로 역사를 재미난 이야기로 만든 사람들에 대한 역사책>, <역사는 재미난 이야기라고 믿는 사람들을 위한 역사책>, <역사란 무엇인가>, 로마는 어떻게 강국이 되었는가?> 등 다수가 있다.

 

수메르인은 도시를 건설하면서 중심지에 도시의 수호신을 위한 신전을 짓고, 신전에 수호신의 신상을 설치하고 예배를 드렸다. 이렇게 신전을 도시의 중심에 설치하고, 수호신을 위한 종교 활동을 도시 유지에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기는 관념은 그리스, 로마 시대까지 계속된다. 로마제국 말기에 기독교가 국교가 되면서 다신교도 신전이 기독교 성당으로 교체되었지만, 성당을 중심으로 도시를 건설하고 신에 대한 예배를 사회 운영에 가장 중요한 활동으로 여기는 관념은 근대까지 지속되었다고 처음부터 다시 배우는 서양 고대사서문에서 말하고 있다. 또한 최초의 철학이라고 이야기되는 그리스 철학도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의 영향을 받았다. 이는 무엇보다 그리스 철학의 초기 중심지가 밀레토스를 비롯한 소아시아의 이오니아 지방이었다는 사실에서 드러난다고 한다. 전체 내용을 1부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문명. 2부 고대 그리스. 3부 고대 로마 등 3부로 나누어 서양의 고대사를 설명하고 있다.

 

성경은 거대한 탑을 쌓은 것을 왜 신에 대한 도전이라고 규정했을까? 바벨탑이 다신교의 상징이었기 때문이다.(p.35)” 바벨탑을 쌓은 네부카드네자르는 아시아 일대를 정복했고 그 과정에서 예루살렘을 멸망시켰다. 바로 그 왕 때문에 유대인이 바비론으로 끌려와 바빌론 유수를 겪었다. 따라서 유대인은 네부카드네자르가 자신들의 신에게 도전하는 사람이며, 그가 탑을 쌓은 것도 신의 권위에 대한 교만한 도전이라고 생각했다. 성경의 바벨탑 전설은 유대인의 이런 시각을 반영한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뿐만 아니라 바빌론 유수를 전후하여 조로아스터교의 부활, 천사, 천국과 지옥, 심판 등의 신앙이 유대교로 편입되었다. 이후 유대교는 부족 종교에서 보편성을 추구하는 종교로, 현세 중심적 종교에서 내세 중심적 종교로 변하게 되었고 유일신 신앙이 자리 잡았다고 한다.

 

플라톤은 초기 기독교 교회의 신학 체계가 형성되는 동안 모범이 되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은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기독교적으로 재해석한 것이다.(p.163)” 플라톤주의는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시대에도, 계몽주의 시대에도, 그리고 20세기에도 되살아났다. 그는 서양 문명이 낳은 가장 위대한 저술가로 평가되기도 한다. 플라톤의 제자이면서도 다른 노선의 사상을 발전시킨 아리스토텔레스는 이후 2,000년 동안 그를 능가하는 철학자가 없었다고 할 만큼 철학의 거인으로 평가된다. 유럽에서는 12세기에 아리스토텔레스 저작이 재도입된 뒤에야 사상다운 사상이 발전했고, 중세의 스콜라철학도 아리스토텔레스가 없었다면 발전하지 못했을 것이다. 한마디로 그리스 철학은 스스로 생각하는 능력을 크게 키운 데 의미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철학이 탄생하기 전 거의 모든 그리스인은 신-종교 중심적인 세계관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신이 인간보다 절대적으로 우월하다고 생각했으며, 인간의 역사와 삶은 전적으로 신들의 결정에 좌우된다고 믿었다.

 

그리스인은 이탈리아 남부의 여러 도시, 즉 나폴리, 파이스툼, 엘레아, 크로톤, 시바리스 등을 건설했다. 이곳을 대그리스라고 불렀다. 이 지역의 문화수준은 그리스 본토 못지않게 높았다.(p.259)” 원래 그리스인은 자신들을 헬렌의 후예라는 의미의 헬레네스라고 불렀는데, 로마인이 그들을 그리스인이라고 불렀다. 그들이 나폴리만의 정착지에서 처음 만난 그리스인이 그라이키인이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현재 그리스라는 나라 이름이 널리 쓰이고 있지만, 엄격하게 이야기하면 그리스는 그들의 언어대로 헬라스로 불러야 한다. 현재도 그리스인은 자기나라를 헬라스 공화국이라고 부른다.

 

법과 함께 통치 체제도 정비되었다. 로마는 이탈리아반도를 통일하는 과정에서 정복지를 로마와 동등한 권한을 가진 지역으로 만들거나 동맹국으로 편제했다. 동맹국은 로마에 군사력을 제공하는 대신 자치를 인정받았다.(p.290)” 로마는 원래 자신의 적이었던 나라들을 정복한 후 동맹국으로 삼았고, 그들과 협력관계를 맺었다. 동맹국은 로마가 보여준 관용과 신의에 감동하여 점차 로마와 자신들을 하나로 여기게 되었다. 이렇게 적을 동지로 만드는 능력이 훗날 로마가 세계적인 대제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덕목이었다. 그러나 1차 포에니 전쟁에서 승리한 로마가 시칠리아를 차지하게 되었을 때는 상황이 달랐다. 카르타고와 싸우면서도 로마는 시칠리아인에게 군사적 지원을 요구했지만, 시칠리아인은 제대로 군대를 보내지 않았고 그나마 전투에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에 로마는 시칠리아인에게 돈이나 농작물의 형태로 세금을 바치도록 했다. 이 결정으로 기원전 241년 시칠리아는 로마 최초의 속주가 되었다. 속주 주민은 군대에 가지 않는 대신 수확의 10분의 1을 로마에 바쳐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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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처음부터 다시 배우는 서양 고대사 평점10점 | 이달의 사락 k******4 | 2022.08.21 리뷰제목
처음부터 다시 배우는 서양 고대사 정기문 책과함께/2021.3.2.   일반적으로 고대 그리스를 서양문명의 원류로 규정하고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문명을 소홀히 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나 서양 문명의 기둥이라고 할 수 있는 종교, 철학, 법은 모두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에서 유래했다. 그렇기 때문에 서양고대사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출범부터 서로마제국의 멸망까지를 다루어야
리뷰제목

처음부터 다시 배우는 서양 고대사

정기문

책과함께/2021.3.2.

 

일반적으로 고대 그리스를 서양문명의 원류로 규정하고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문명을 소홀히 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나 서양 문명의 기둥이라고 할 수 있는 종교, 철학, 법은 모두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에서 유래했다. 그렇기 때문에 서양고대사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출범부터 서로마제국의 멸망까지를 다루어야 한다고 말하는 처음부터 다시 배우는 서양 고대사의 저자는 서울대학교 역사교육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군산대학교 역사철학부 역사 전공 교수로 있다. 지은 책으로 역사를 재미난 이야기로 만든 사람들에 대한 역사책>, <역사는 재미난 이야기라고 믿는 사람들을 위한 역사책>, <역사란 무엇인가>, 로마는 어떻게 강국이 되었는가?> 등 다수가 있다.

 

수메르인은 도시를 건설하면서 중심지에 도시의 수호신을 위한 신전을 짓고, 신전에 수호신의 신상을 설치하고 예배를 드렸다. 이렇게 신전을 도시의 중심에 설치하고, 수호신을 위한 종교 활동을 도시 유지에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기는 관념은 그리스, 로마 시대까지 계속된다. 로마제국 말기에 기독교가 국교가 되면서 다신교도 신전이 기독교 성당으로 교체되었지만, 성당을 중심으로 도시를 건설하고 신에 대한 예배를 사회 운영에 가장 중요한 활동으로 여기는 관념은 근대까지 지속되었다고 처음부터 다시 배우는 서양 고대사서문에서 말하고 있다. 또한 최초의 철학이라고 이야기되는 그리스 철학도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의 영향을 받았다. 이는 무엇보다 그리스 철학의 초기 중심지가 밀레토스를 비롯한 소아시아의 이오니아 지방이었다는 사실에서 드러난다고 한다. 전체 내용을 1부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문명. 2부 고대 그리스. 3부 고대 로마 등 3부로 나누어 서양의 고대사를 설명하고 있다.

 

성경은 거대한 탑을 쌓은 것을 왜 신에 대한 도전이라고 규정했을까? 바벨탑이 다신교의 상징이었기 때문이다.(p.35)” 바벨탑을 쌓은 네부카드네자르는 아시아 일대를 정복했고 그 과정에서 예루살렘을 멸망시켰다. 바로 그 왕 때문에 유대인이 바비론으로 끌려와 바빌론 유수를 겪었다. 따라서 유대인은 네부카드네자르가 자신들의 신에게 도전하는 사람이며, 그가 탑을 쌓은 것도 신의 권위에 대한 교만한 도전이라고 생각했다. 성경의 바벨탑 전설은 유대인의 이런 시각을 반영한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뿐만 아니라 바빌론 유수를 전후하여 조로아스터교의 부활, 천사, 천국과 지옥, 심판 등의 신앙이 유대교로 편입되었다. 이후 유대교는 부족 종교에서 보편성을 추구하는 종교로, 현세 중심적 종교에서 내세 중심적 종교로 변하게 되었고 유일신 신앙이 자리 잡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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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정말 재미있었던 서양고대사, 서양고대사를 한 눈에 평점10점 | YES마니아 : 로얄 j*****3 | 2021.03.15 리뷰제목
세계 4대 문명은 강을 중심으로 발달했던 메소포타미아 문명, 인더스 문명, 황하문명, 이집트 문명이다. 이 사실은 잘 알고 있지만 세부적인 사실은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었고, 서양 고대사라고 하면 당연히 그리스 로마로부터 시작이라고 생각했다. 저자는 서양 문명의 기둥이라고 할 수 있는 종교, 철학, 법은 모두 미소포타미아와 이집트에서 유래했기에 서양고대사는 메소포타미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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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 4대 문명은 강을 중심으로 발달했던 메소포타미아 문명, 인더스 문명, 황하문명, 이집트 문명이다. 이 사실은 잘 알고 있지만 세부적인 사실은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었고, 서양 고대사라고 하면 당연히 그리스 로마로부터 시작이라고 생각했다. 저자는 서양 문명의 기둥이라고 할 수 있는 종교, 철학, 법은 모두 미소포타미아와 이집트에서 유래했기에 서양고대사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출범부터 서로마제국의 멸망까지를 다루어야한다고 말했다. 서문에서 여러가지 근거를 통해 그러한 이유를 설명하고 있었는데, 책을 읽으면서 저자가 말한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있었다.메소포타미아 문명과 이집트 문명은 많이 생소한 부분이라 정리가 필요했다.

 

1부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문명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유역인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가장 먼저 문명이 발달했다. 두 강 사이에 형성된 평야지역에는 농업이 발달하기 시작했고 최초로 정착한 사람들은 수메르인이었다. 농토가 비옥한 반면 두 강의 범람도 잦아 공포의 대상이었으며 지진도 자주 발생했다. 개방적인 지형 탓에 주변 종족들의 침입이 잦았고, 전쟁이 계속되면서 왕조와 지배하는 종족이 자주 바꼈다. 이런 불안한 삶이라 현세의 삶에 매달릴 수 밖에 없었기때문에 메소포타미아인들은 내세를 중요시하지 않는 현세 중심의 세계관을 가지게 되었다. 쐐기문자를 사용했고, 인류 최초의 서사시이며 문학작품으로서 완벽한 구도를 가지고 있는 <길가메쉬 서사시>를 남겼다. 산을 신성시했고 산이 하늘과 땅을 연결해주는 곳이라고 여겼던 메소포타미아인들은 인공 산인 지구라트라는 신전을 지었다. 노아의 방주와 인간의 오만함을 심판했다는 바벨탑의 진실, 어디선가 들은적 있다는 생각만 가지고 있었던 '바빌론 유수'등 정말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가득했다.

 

 기원전 6000년경 수메르인이 정착, 기원전 2350년경 북쪽에서 내려온 아카드인에 의해 멸망했다. 기원전 1950년 무렵 서쪽에서 아모리족이 메소포타미아로 진출했는데 그들이 바로 바빌론을 수도로 하는 바빌로니아 왕국의 건설자였고, 이 왕국의 가장 위대한 왕이 함무라비였다. 뛰어난 정복왕이었으며 함무라비 법전을 만들었다. 함무라비 법전의 의미는 이 글에서 충분히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함무라비가 확립한 법치의 전통은 이후 서구 사회를 움직이는 기본 원리가 되었다. 윤리나 도덕이 아니라 법을 통해 사회를 작동시켜야 한다는 생각은 그리스를 거쳐 로마에서 모든 사람이 공유하는 원칙이 되었고, 로마법은 근대 서양 모든 나라 법의 토대가 되었다. -p 46

 

 기원전 1500년경  소아시아에서 일어난 히타이트 족에 의해 멸망했다. 히타이트는 강력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었고, 철기문화를 서아시아에 전파하기도 했다. 기원전 14세기 초부터  메소포타미아의 강자가 되었던 아시리아의 붕괴 이후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최종단계인 신바빌로니아 시대가 되었다. 7대 불가사의 가운데 하나인 공중정원이 지어졌던 시기였다. 기원전 539년 페르시아에 의해 멸망했다. 현대 알파벳의 기원으로 이야기된다고 하는 페르키아 문자를 남긴 페니키아는 해상무역을 주도했는데, 카르타고도 이들의 식민도시였다. 이집트에서 탈출해서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이동한 히브리인이 세운 이스라엘 왕국은 다윗과 솔로몬 왕 시기에 전성기였고, 유일신 신앙인 유대교를 창시했다. 신바빌로니아 제국을 정복함으로써 소아시아의 그리스 도시와 이란 동쪽의 인더스 유역에 걸친 모든 지역을 다스리게 된 페르시아까지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이루고 있었다.

 

 이집트 18세기 말 볼네는 <시리아와 이집트 여행>이라는 책을 썼고, 그 책을  읽은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은 이집트 역사 재발견에 커다란 성과를 거두게 되었는데, 그건 로제타석의 발견이었다. 샹폴리옹이 로제타석을 해독해냈고,이집트에 대해 밝혀지기 시작했다. 나일강의 범람은 예측할 수가 있었고, 그것은 태양력,기하학, 수학의 발전을 가져왔다. 지리적으로는 폐쇄되어 있어 외침으로부터 안전했다. 기원전 3100년경 상이집트와 하이집트로 분리되어있던 이집트를 상이집트의 왕 나르메르가 통일했다. 이집트인들은 그들의 왕인 파라오가 신과 동등한 존재로서 세상을 통치한다고 생각했고, 죽은 후 그의 무덤은 성스러운 곳이 되었는데, 이런 사상들은 피라미드, 미라등과 자연스럽게 연결이 된다. 고왕국 시대의 대표적인 왕 조세르가 거대한 피라미드를 최초로 건설했는데, 그것은 파라오의 권력이 강력해졌다는 것을 의미했다. 중왕국 시기에는 거대한 피라미드가 건축되지 않는 대신 수로와 관개시설등 공공사업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힉소스의 침입으로 신왕국으로 넘어가게 되었는데, 힉소스의 지배로 인해 이집트의 대외 교규가 확대되고 외부 세계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는 긍정적인 면도 있었다. 신왕국 (기원전 1550~ 1070)시대에 동방의 강국이 되었고, 우리에게 익숙한 이집트의 이미지는 신왕국 시대로 투탕카문의 무덤에서 나온 유물들을 통해서라고 할 수 있다. 기원전 333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이집트 정복,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후에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들어서면서 그리스 세계의 일부가 되었고, 뒤이어 로마제국의 일부가 되어 제국의 성장을 뒷받침하게 되었다.

 

  피라미드, 스핑크스, 오벨리스크,  왕들의 계곡에서 투탕카문의 무덤 발굴과정, 영원에 대한 갈망으로 인해 미라를 만드는 과정 등의 이야기는 신비롭게도 느껴지면서 감동적으로 다가왔다. 고대 이집트의 영웅들로 일신교의 창시자 아켄아텐, 이집트의 번영을 이끈 람세스 2세, 마지막 여왕 클레오파트라의 이야기등 흥미로운 이야기는 끝없이 이어졌다.

 

2부 고대 그리스

 그리스 본토의 해안 지역에 발달한 문명을 통칭해 에게해 문명이라고 한다. 그 중심지는 크레타섬이었고, 전설적인 왕인 미노스의 이름을 따서 미노스문명, 크레타문명이라고도 한다. 기원전 1400년경 그리스적 요소와 미노스적 요소를 결합한 최초의 서양 문명이라고 할 수 있는 새로운 문명 미케네 문명이 시작되었다. 미케네 문명은 슐리만에 의해 발견되었는데, 그는 1829년 아버지가 선물한 책 <그림으로 본 세계사>, 아이네아스의 이야기등을 통해 트로이를 찾겠다는 꿈을 가지게 되었다. 메소포타미아문명이나 이집트 문명, 미케네 문명등 과거의 많은 유적들은 미래의 우리에게 인류문명에 대해서 정말 많은 것을 알려주고 있다. 그런 것이 가능하게 했던 것은 슐리만과 같은 많은 사람들의 지적 호기심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나쁜 의도로 시작했던 사람도 물론 있었겠지만 그들의 노력이 있었기에 우리는 과거를 만날 수 있으니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그리스라고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올림포스 12신의 탄생, 호메로스의 <일리아스> , 헤로도토스의 <역사>에 대한 이야기들은 책에 쏙 빠져들게 했다. 이오니아 학파로부터 시작해 소피스트, 소크라테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로 이어지는 철학 이야기는 평소 어렵다고 생각했던 것이 이상할 정도로 재미있게 읽혀졌다. 그리스 비극과 희극, 연극 공연을 통해 그리스 문학을 이해할 수 있었다. 소포클레스의 <엘렉트라>, <안티고네>, 에우리피데스의 <메데이아>등을 읽었던 것이 생각나 많은 도움이 되었다. 기원전 800년경 그리스에는 새로운 형태의 나라 폴리스가 탄생했다. 아테네의 출현으로부터 민주주의가 완성 되어가는 과정을 알 수 있었다. 강력한 스파르타의 등장과 강한 교육 방식의 대명사 스파르타 교육, 그리스의 분열, 펠로폰테소스 전쟁,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영웅적인 행보와 헬레니즘 문화의 탄생에 이르기까지 고대 그리스로의 숨가쁜 여행을 했다.

 

3부 고대 로마

 

 로마 건국을 이야기하면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와 늑대젖을 먹고 자란 로물루스와 레무스의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는데, 로마인들이 두 이야기를 결합했던 것은 자신들의 조상이 그리스인 못지않은 문화인임을 내세우기 위한 전략이었다. 로마는 에트루리아와 그리스의 영향을 받았는데, 로마의 문화 세계를 그리스인이 장악해서, "정복당한 그리스가 정복한 로마를 정복했다"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왕정시대를 시작으로 공화정으로 가는 과정을 볼 수 있었다. 로마가 인류에게 남긴 위대한 유산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로마법의 모체라고 하는 12표법은 법 앞에 모든 시민이 평등하다는 원칙을 구현했다는 점에서 인류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중요한 사건이었다. 로마가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하는 과정을 통해 로마가 대제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중요한 덕목을 알 수 있었다. 로마와 카르타고 사이에 벌어진 포에니 전쟁을 통해 지중해를 완전히 장악하고 로마는 강력해졌는데 사치풍조가 만연해지는등 부작용이 커졌다. 그라쿠스 형제는 개혁을 시도했지만 특권을 빼앗기기 싫었던 원로원 귀족들에 의해 실패했다. 마리우스와 술라,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로 이어지며 로마 공화정은 끝이났다. 최종적으로 승리를 거둔 옥타비아누스는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받았고, 최고통치자가 제 1시민으로서 통치하는 프린키파투스 (원수정) 시대가 열렸다. 아우구스투스가 평화를 확립한 후 다섯 명의 위대한 통치자들에 의해 다스려지던 평화로운 시대를 팍스 로마나라고 불렀다. 팍스 로마나 시기에는 로마가 모든 사람을 포용하는 보편 제국이 수립되었고, 학문이 발달했으며, 실용적인 문화로서 법과 건축 분야에서 두드러진 발전을 가져왔다. 그 결과물인 수도교, 포룸 로마눔, 콜로세움, 판테온을 만날 수 있었다. 로마 건축의 위대함을 보고 중세 서양인들은 로마인이 악마가 아닐까 의심했다고까지 한다.  기독교의 탄생과 발전을 다루고, 서로마 제국의 멸망으로 길었던 서양고대사의 이야기를 마쳤다.

 

 기원전 6000년경 수메르인이 메소포타미아 남부 지역에 정착한 순간부터 476년 서로마제국이 멸망할때까지 긴 역사를 400페이지의 책에 담아놓았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서양 고대사를 제대로 공부해본 적이 없어서 궁금한 마음에 읽어보기로 했지만 따분하면 어떡하나하는 걱정도 있었다. 그건 기우였다.  당연히 역사서니 시간순으로 써내려가긴 하지만, 주변 국들과의 관계를 같이 짚어주니 한 권을 다 읽었을 때는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그리스, 로마가 따로 노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맥락으로 정리가 되었다. 평소 정리가 잘 되지 않고 있었던 역사적 사건들이 있었는데 그것들도 깔끔하게. 무엇보다도 유적들, 문학 작품등에 대한 문화사와 인물들의 개인사들을 아우르는 재미있는 에피소드들이 곳곳에 자리 잡고 있었기에 지루할 틈이 없었다. 관심을 확장시킬 수 있는 계기도 되었다.

 

 저자는 역사 연구의 성과를 대중에게 알리려는 마음으로 역사 입문서를 여러 권 집필했다. 로마사를 전공하고 삼십여년간 서양고대사를 공부해왔고 최근에는 서양 고대사를 이해하는데 핵심요소인 기독교의 역사를 탐구하는데 힘을 쏟고 있다고 한다. 저자 덕분에 서양고대사는 어렵다는 편견을 깨게 되었다. <처음부터 다시 배우는 서양고대사>, 이 책을 기본으로 잡고 고대사에 대한 지식을 쌓아나가볼 생각이다.

 

YES24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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