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의 일생에서 만년(晩年)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한다. 혈기 왕성한 청년기를 지나고 원숙한 인생의 황금기까지 지나, 생의 마지막을 준비해가는 시기가 이른바 만년이라고 부르는 시기일 것이다. 지나온 생을 돌이켜보며 정리해나가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자신의 만년이 도래했는지, 그 만년이 얼마나 지속될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나이가 일흔쯤 되었을 때 내게 얼마나 많은 날이 남아 무엇을 더 할 수 있고, 정리할 수 있는 시기는 얼마나 되는지 확신할 수 없다. 아무것도 정리하지 못한 채 느닷없이 저 세상으로 떠나기도 하고, 너무 오랜 시간 동안 의미 없는 세월을 보내기도 한다. 생의 마지막을 누구도 확신할 수 없기에 만년의 업적이라고 하는 게 별로 없거나 청년기, 중년기의 것과 비교할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
미켈란젤로의 만년은 어떠했나.
미켈란젤로 전문가 윌리엄 월리스가 그려내고 있는 천재 예술가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의 만년은 그의 청장년기와 비견할 수 있을 만큼 성취가 드높았다. 당시 평균적인 생몰의 나이보다도 더 많은 70대에 교황청의 수석 건축가가 되어 성 베르로 성당의 건축을 맡고 거의 20년 동안 그 일에 매달렸으며, 또 다른 건축물들을 설계했고 조각과 그림을 완성했다(혹은 미완성인 채로 남겼다). 곧 닥쳐올 것 같은 죽음에 대한 예감 속에서, 개인적인 좌절과 상실을 딛고서 물러서지 않고 죽기 바로 전까지 최선을 다하여 하느님으로부터 소명 받았다고 여긴 건축가로서, 예술가로서 최선을 다했다.
미켈란젤로 하면 다비드 상과 피에타와 같은 조각과 <천지창조>와 같은 그림이 떠오른다. 미켈란젤로는 ‘초년기-조각’, ‘장년기-회화’라는 공식으로 설명되곤 한다. (장년기 회화 중 가장 빛나는 업적인 시스티나성당 천장화 <천지창조>에 대해서는 로스 킹이 《미켈란젤로와 교황의 천장》에서 자세히 다뤘다) (http://blog.yes24.com/document/15210406). ‘만년기-건축’은 그 공식의 연장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미켈란젤로는 초년기에도 그림을 그렸고, 건물을 설계하고 건설했으며, 만년기에도 뛰어난 조각과 그림을 남겼지만 말이다. 하지만 일흔에 넘은 나이에 성 베드로 성당의 건축을 떠맡은 것은 의외였다. 금방 죽음의 그림자가 덮쳐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에, 오랫동안 지지부진한 대성당의 건축을 맡긴 교황 파울루스 3세에게 여러 차례 사양했지만 결국은 수락했다. 그리고는 원래의 설계에 얽매이지 않고, 이전 건축가의 잘못된 점을 극복하면서 자신의 설계가 바뀌지 않을 만큼의 진도를 만들어놓고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건축 기간 중 20%도 채 못되는 기간 책임을 맡았던 미켈란젤로를 성 베드로 성당의 건축가로 기억되고 있다.
그런데 이 책은 그런 미켈란젤로의 위대함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지는 않다. 월리스 스스로 이 책을 쓴 이유가 예술적 성취를 탐구하려는 것이 아니라 미켈란젤로라는 인물이 만년에 어떤 생활을 했는지 더 중점적으로 살펴봤다고 했다. 그래서 그런지 미켈란젤로라는 인물의 여러 새로운 면모를 많이 보여준다(잘 아는 이에겐 이미 새로운 게 아닐지도 모르지만).
우선 미켈란젤로는 괴팍하여 사람들과의 접촉을 꺼리며 혼자 지냈던 인물이 아니었다. 물론 그는 우울한 사람이었지만, 그렇다고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했던 인물이 아니었다. 로마에 있는 그의 집에는 사람들이 늘 들끓었으며 여러 부류의 사람들과 우정을 나누었다. 그를 보좌했던 하인들이 오랫동안 그와 함께 했다는 점도 그가 생각만큼 괴팍하지는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자신을 보좌하다 죽은 이의 미망인과 자식에게 (재혼 후에도) 오랫동안 후원했다는 점도 그렇다.
미켈란젤로가 남들은 어떻게 받아들이든 자신이 귀족의 후손이라는 점을 강변하고 다녔다는 것은 로스 킹의 책에서부터 알았다. 그래서 자신은 결혼도 하지 않았고, 그래서 자식도 없었지만, 자신의 동생을 통해서 핏줄을 이어가는 데 무척 신경 썼다.
그가 연모했던 인물이 있었다는 것도 의외였다. 그는 비토리아 콜론나라고 하는 시인자 귀족 부인에게 연모를 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녀의 시집을 소중히 보관했고, 그녀에게 편지를 주고받고 시를 지어 보내며 자신의 마음을 언뜻언뜻 비치기도 했다(그렇다. 미켈란젤로는 시인을 꿈꾸기도 했다). 그런 연모와 우정은 비토리아 콜론나 갑자기 사망하면서 미켈란젤로에게 더욱 큰 좌절감을 선사했지만.
그가 성 베드로 성당을 맡은 이래 교황 다섯 명이 교체되면서도 여전히 수석 건축가로서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이 중에는 그가 처음 그 임무를 맡을 때 탐탁치 않게 여겼던 이도 있었으나 다행스럽게(?) 교황에 오른 지 석 달 만에 죽었던 행운도 작용했다. 하지만 그만큼 미켈란젤로는 건축가로서의 역량을 의심받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그가 젊었을 때 끝내 마치지 못한 건축물 때문에 괴로워했음에도 그랬다).
미켈란젤로는 성 베드로 성당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 죽었다. 하지만 성당은 그가 생전에 계획한 대로 지어졌다. 러시아의 위대한 소설가 고골은 <로마>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은 썼다고 한다. “성 베드로 대성당의 장엄한 돔은 멀리 벗어날수록 더 크게 보인다. 그러다가 지평선의 둥그런 아치 위에 오로지 그 돔만 남는다. 심지어 도시가 완전히 사라져 버릴 때조차도.”
미켈란젤로는 천재였다(에릭 와이너가 《천재의 지도》에서 피렌체를 이야기할 때는 미켈란젤로는 피렌체의 대표적 천재였다). 그러나 그의 성 베드로 성당 건축에 대해 우리가 가져야 할 마음은 그의 천재성이라기보다는 최선을 다한 그의 마지막에 대한 깊은 경외이지 않을까
동시대인들은 미켈란젤로가 슬픔과 절망으로 제정신이 아니었다고 전한다. 그는 정말로 절망했고 고령에 너무나 외로웠다. 이제 친구가 없었다. (p.81)
미켈란젤로. 아마 그림이나 종교를 전혀 모르는 사람도 미켈란젤로의 이름은 알 듯하다. . . 그리고 와 . 그의 작품은 어느 하나 유명하지 않은 것이 없고, 그저 바라보기만 해도 “하!”하는 경탄이 흘러나온다. 내가 아직 어린 시절, 그가 에 고뇌하는 자화상을 그려 넣었다고 하는 글을 읽고 “이정도 예술의 경지에 이른 사람이 무슨 고뇌를 하는가. 물론 창조는 힘이 들겠지만, 이정도 작품을 낳을 수 있다면 매일 손뼉을 치고 다닐 텐데” 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 그 오랜 궁금증을 풀어낼 책을 드디어 만났다.
사실 미켈란젤로나, 대성당, 바티칸에 관련된 책은 꽤 많이 읽었다. 그런데도 이 책은 매우 새롭다. 보통의 책들은 정점을 기록하고 있기에, 미켈란젤로가 소위 가장 잘나가던 시절을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 책은, 70세에서 88세에 이르는 마지막 생을 기록하고 있다. 비록 예술가로서의 찬란한 시절은 한 끗 비껴갔을지라도 그의 일상과 생각, 예술과 종교에 대한 신념을 제대로 만나볼 수 있다. 어쩌면 이제 인생의 절반 정도를 살아온 내게 이 책은 말한다. “인생의 목적이 무엇인가. 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잘 걷고 있는가.”
피렌체 는 미켈란젤로의 신심을 웅변적으로 표현한 작품으로, 애초에 그 자신의 무덤에 묘표로서 그 쓰임새를 의도했던 작품이다. 그러나 거기에 딜레마가 있었다. 그 조각을 완성한다는 것은 대리석을 생생하게 살려내는 것이지만, 그 자신은 죽음에 숙명 해야 했다. (...)그러나 여러 기술적 심리적 이유 탓에 이 작품은 미완으로 남을 운명이었다. (P.243)
생각해본다. 그는 무슨 이유로 이 작품을 그리도 오래 간직하고 있었을까. 그리고 왜 를 포기했을까. 그리고 칼카니가 이 작품을 보수하지 않았더라면, 그 앳되고 아름다운 성모마리아님은 세상에 나올 수 있었을까. 나는 를 처음 볼 때 (물론 실물은 못 봤지만) 미완성인 것도, 예수님의 다리가 한쪽이 없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저 너무 눈이 부시게 아름답다고, 성모마리아님의 얼굴의 깊은 감정이 놀라울 뿐이었다. 그런데 이 책을 읽고 난 지금, 이런저런 생각이 나를 휘감는다. 미켈란젤로는 이 작품을 만들 때, 가슴이 매우 아프지 않았을까. 고뇌하지 않았을까. 스스로 불완전함을, 스스로 미완의 인간임을 아파한 것은 아닐까.
사실 이 책은 꽤 두꺼움에도 순식간에 읽혀지는 책이다. 며칠만에 나는 이 책을 두번 반복하여 읽었다. 처음에는 그저 술술 읽었고, 두번째에는 기존에 알던 이야기까지 살을 입혀 그의 마음을 좀 더 고스란히 느껴보려고 노력했다. 그래서일까. 수십년을 함께 한 지기를 잃고, 가슴아파하는 그의 편지들을 읽는데 눈물이 핑 돌았다. 슬픔의 한 가운데에서 홀로남은 외로움을 이야기하는 그가 처음으로 위대한 예술가가 아닌, 그저 나같은 한 사람의 인간으로 느껴져 그의 작품들이 더 대단함으로 느껴진다면 역설일까.
미켈란젤로는 <모세>와 함께 살았다. 그 둘은 함께 늙어갔다. 매일 아침 예술가는 눈을 뜨면 석상을 보았다. 그가 외출했다가 집에 돌아오면 그 거대한 석상이 주인을 맞이했다. 그 석상과 함께 사는 것은 어쩌면 불평했을 것이다. 석상의 노려보는 시선은 미켈란젤로에게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교황율리우스 2세의 영묘가 아직도 미완성인 상태로 남아있지 않소,그분에게 그 일을 주문받은지 대체 몇 년이요? 10년,20년, 30년 그리고 이제 근 40년이 다 되어가고 있지 않소? (-28-)
미켈란젤로는 네개의 외부 기둥 안쪽에다 나선형 경사로를 설계하여 설치했다. 경사로는 완만하게 위로 올라가는 통행로이므로, 발디딤이 단단한 당나귀와 노새가 건설자재를 기둥의 가장 높은 곳까지 수송할 수 있었다.이 역축들은 수천장의 벽돌, 모르타르에 들어갈 모래와 석회, 밧줄, 나무 기둥, 비계용 널판, 대형물통에 든 작업 용수와 마실 물 따위를 날랐다. (-141-)
게다가 교황 율리우스 3세가 새로 하고 싶은 공사가 많았으나 교황청의 금고는 거의 고갈된 상황이러서, 미켈란젤로는 깊은 구상은 고사하고 간단한 대화나 스케치 단계에 그치는 공사에도 여러 번 관여했다. 그리하여 이런 공사들은 상당수가 미켈란젤로의 사후에 착수되거나 완공되었다.그러나 어떤 공사가 위대한 예술가의 이름과 조금이라도 결부됨변 미켈란젤로의 이름이 거론되다가 결국에는 그의 작품으로 돌려졌다., (-224-)
미켈란젤로는 로레토까지 ,가능하다면 달마티아까지 여해을 계속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는 조카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는 그런 계획을 수행할 수가 없었단다. 사람을 보내 내가 로마로 돌아와야 한다는 기별이 왔기 때문이지." 로마로 소환된 것을 다소 자랑스럽게 여기며 우쭐했을 수도 있으나 그 기별은 그가 여전히 교황청의 직원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었다. (-289-)
생애 만년에 미켈란젤로는 미르첼로 베누스티, 다니엘라 다 볼테라, 티베리오 칼카니 같은 몇몇 젊은 예술가들과 가깝게 지냈다. 이런 친구들은 나이 든 얘술가에게 말동무가 되어주었을 뿐만 아니아 그의 미완성 공사들을 완공하는 데에도 크게 기여했으며, 그 결과로 미켈란젤로의 권위가 미치는 범위를 더욱 크게 확대했다. 미켈란젤로의 후기 경력 중 가장 큰 특징은 작업 요청이 점점 더 늘어났다느 것이다. (-336-)
미켈란젤로는 편지를 쓰는 게 어려워서 답신을 보내지 못한 데 대하여 사과했다. 그러던 어느 한 시점에 리오나르도는 미켈란젤로의 집안사람들이 그를 홀대한다는 잘못된 정보를 전달받았다. 떨리면서도 잘 통제된 글씨로 미켈란젤로는 자신의 상황을 아주 분명하게 리오나르도에게 적어 보냈다. (-397-)
이탈리아 천재 예술가 미켈란젤로는 1475년에 태어나 , 1564년에 세상을 떠나게 된다. 90년 동안 이탈리아 위대한 예술가이자 건축가이며, 조각가였던 그가 남겨놓은 작품을 피에타, 다비드, 최후의 심판, 시스티나 대성당의 천장화를 그려냈으며, 바티칸의 성베드로 대성당을 계획하게 된다. 그느 이렇게 자신의 예술적 업적을 그 시대에 녹여내었으며,그의 내면 속 열등감과 조심스러움 속에 혼자만의 세계에 갇혀 버리게 된다. 와벽을 추구하였던 그가 보여준 예술에 대한 집착은 자신의 부끄러움을 감축리 위한 사전 작업이다. 교황이 요구하는 것에 타협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목적과 의도에 맞는 예술적 작품을 완성하기에 이르렀다. 여기에서 우리는 한가지 의문점이 들게 된다. 우리는 1563년 성베드로 대성당 현장에 나간 90의 초로의 늙은 예술가는 그 당시 어떠한 마음으로 예술적 가치를 영위하였는지이다. 리오나르도와 미켈란젤로의 예술적 교류, 그 너머에 감춰진 그들은 40년에 걸친 대역사 율리우스 2세의 영묘의 모세상은 , 미케란젤로의 모세화였다. <인생은 짧고,예술은 영원하다>의 대명제는 미켈란젤로의 90년 인생에 있었다.그가 보여준 얘술적 가치와 혼, 40년 동안 오로지 하나의 조각을 완성하게 위해 그가 보여준 위대한 역사적인 업적은 그 누구도 따라할 수 없는 그가 가진 독창성에 있었다. 일흔 한살, 죽음을 기다리며 , 퇴역을 앞둘 나이에 ,그의 생의 마지막 17년동안 보여준 성베드로 대성당 건축의 혼신은 우연의 사건이 아닌 역사적인 근본이었으며, 그로 인해 우리는 그가 죽은 사후에 ,500년이 지난 지금 성베드로 대성다을 눈으로 볼 수 있게 된다.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자신만의 독창적인 건축 양식, 저자 윌리엄 E윌리스가 얻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놓치고 있었던 예술적 가치의 영속성이다. 즉 지금 우리의 일회성에 가까운 예술이 과거에 현재했던 예술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 알게 된다면,우리가 상기시켜야 하는 그가 원하는 예술의 근본, 황혼의 마지막 예술적 불꽃을 사르는 그가 보여준 힘은 가벼이 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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