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기억을 머릿속에서 지우고, 다른 이의 기억을 내 머릿속에 넣을 수 있다면? 솔깃한 설정이다. 네이버 공모전 크리에이티브 선정작 <놈의 기억>은 1,2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두 권의 긴 분량이지만, 재미있어서 책을 잡자마자 끝까지 읽게 될만큼 몰입된다. 군더더기가 없는 깔끔한 문장력이 이야기 분위기와 어울려 집중도를 높인다.
<사이언스>지에 논문이 게재된 것을 축하하기로 한 날. 결혼기념일임을 떠올리고 서둘러 반지를 사서 집으로 들어가는 정우. 무언가에 맞고 쓰러진다. 나흘 동안 의식을 잃고 눈을 떠보니 아내는 그날 누군가에 의해 살해 당했고, 딸 수아만이 유일한 목격자가 되어있다. <사이언스>지에 게재된 한정우의 연구는 바로 원하는 기억을 지울 수도 다른 이의 기억을 이식하기도 할 수 있다는 것. 한정우는 엄마의 죽음으로 힘들어 하는 딸의 기억을 수술을 통해 지운다. 그덕에 다시 해맑던 수아로 돌아 오지만, 아내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해 줄 유일한 목격자는 사라진다. 경찰이자 아내와 교회에서 사이 좋게 지낸 동생 인욱. 그는 조폭을 잡다 칼에 찔린 것이 트라우마가 되어 검거 현장에서 자꾸만 몸이 얼어붙는 것 같아 이 기억을 지우고 싶어하고, 이를 지우면서 그 기억을 자신에게 심는다. 그 기억 속에서 살인범을 잡을 단서, 한국에 단 석 점만 들어왔다던 명품귀걸이를 본다.
부족한 글 실력으로 사건의 시작 부분을 정리해 보았는데, 다시 봐도 흥미로운 소재이다. 실제 수사 상황에서도 명확하지 않는 기억들을 되살려 사건을 풀 실마리나 목격자를 찾는 최번법 들을 동원한다고 들었다. 명확한 증거나 범인을 찾을 수 없는 상황. 얼마나 절실하게 찾고 싶은 누군가의 '기억', 반대로 극한 공포나 두려움을 겪었다면 너무나도 지우고 싶을 '기억'
이를 적절하게 잘 표현한 작품이 바로 <놈의 기억>이었다. 마음에 남았던 몇구절을 정리해 본다.
p. 24 그런데 트라우마라는 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니야. 몸이 다시는 그런 위험한 상황 속에 자신을 두지 말라고 보내는 경고 같은 거 거든. 보호하는 거야. 자신을.
p.24 기억을 지우는 것으로 끝나선 안 돼. 그런 위험한 상황에 또 다시 처하지 않도록 노력하든가, 그런 놈들을 제압할 수 있는 실력을 키워야 해.
p.55 바보가 되더라도 일단 사는 게 먼저인 사람도 있어. 기억이라는 게 현재를 잡아먹는 괴물 같은 거야. 끊임없이 그 기억 속으로 소환해서 결국은 현재를 살 수 없게 만들거든. 몸뚱이만 현재에 있지 정신은 늘 고통받던 그 순간에 머물게 해. 떨쳐 내려고 하면 할수록 정신없이 달라붙는 그런 거머리 같은 놈이니까.
p.113 기억을 지워도 사람은 변하지 않으니 같은 일이 반복될 수 밖에 없었다. 과거로부터 배우는 게 없으니 그가 달라질 리도 만무했다.
p.115 그런 기억들은요. 오히려 행복할 때 한 번 씩 저를 비집고 들어와요. '네가 정말 행복해? 이런 일을 겪고도?'라고요.
2권
p.263
정우는 오래도록 망각에 집착했다. 신은 누구에게도 망각을 선물처럼 주지 않기에.. 하지만 이제야 조금 알 것도 같다. 망각은 의지다. 그것은 기억을 잊으려는 노력이 아니라.
'기억'과 '망각'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놈의 기억>이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무료로 제공받아 읽고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누군가의 기억을 삭제하고 이식하는 방법이 생긴다면?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 물론 누군가에게는 지워버리고 싶은 기억이 있기에 이런 방법이 생기길 바라겠지만 그 기억이 다른 사람의 뇌에 이식되어 사용된다면 얼마나 어이가 없을까? 벌거벗은 채 누군가의 앞에 선 듯한 기분이지 않을까?
네이버 공모전 크리에이티브 선정작으로 네이버 추리/미스터리 BEST 5인 <놈의 기억>은 바로 그런 기억 삭제/이식에 관한 이야기를 흥미진진한 사건과 함께 다루고 있다. 아내가 살해당한 정우의 입장에서는 다른 사람의 기억을 온통 헤집어서라도 살인자를 찾고 싶고 그 사람의 속을 들여다보고 싶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아내의 죽음을 목격한 아이의 심리상태를 생각하면 기억 삭제라는 방법은 피할 수 없는 최선의 방법일지도 모른다. 나 역시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기억의 한 부분을 떼어낸다는 건 한 존재의 일부분을 떼어낸다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좋은 기억, 나쁜 기억의 쌓이고 쌓여 한 개인의 완전체를 이루어내기에 기억을 삭제한다는 건 결국 신체의 한 부분을 잃는 것과 같은 의미가 아닐까 싶다. 그렇기에 아프면 아픈 부위를 치료해 낫게 하듯이 아픈 기억도 치료를 통해 낫게 해야 하는 게 아닐까?
소설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 보자. 정욱이 찾는 범인은 의외로 곳곳에 남긴 작가의 힌트로 쉽게 추리해낼 수 있었다. 다만 정욱이 잃어버린 기억은 놀라운 반전으로 다가와 추리 소설을 읽는 재미를 제대로 느끼게 해주었다.
흥미로운 소재에 예상을 뛰어넘는 반전과 반전이 이어지는 재미있는 소설이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다 읽을 때까지 손에서 놓지 못할 정도이다. 아마 조만간 영화로 만들어지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