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하지 않게 자신이 떠나갈 때를 알게 된 사람들과 여전히 떠날 때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생각할 때 나는 그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 싶었다. 그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의 무게를 다시 생각하게 하기 때문이고, 언젠가는 찾아올 '나의 죽음'을 마주하게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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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은 피해 갈 수 없다. 사람들은 그 사실을 알지만 애써 외면한다. 일상생활 속에서 자신은 죽음과 거리가 먼 것처럼 생활하는 사람들.
나 또한 예외는 아니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장례식장에 여러 차례 가보았으나 나와 죽음은 연관 지어 생각하지 않는다. 아직 젊고, 술과 담배를 하지 않으며, 아픈 곳 없이 건강하기에 별로 걱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 또한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할 것이며 그날은 하루하루 다가오고 있음이 자명하다. 그렇기에 이 책이 나에게 더 크게 와닿았다. 죽음이 나와 무관한 것이 아님을 다시 한번 깨닫고, 스스로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기에.
종양의 크기는 계속 커졌고 항암치료는 더 이상 효과가 없었다. 이제 쓸 수 있는 약이 없었다. 인생이 더는 자신의 통제하에 흘러가지 않고 모든 것이 암에 의해 좌지우지되기 시작했다. 생에 처음 찾아온 '끌려가는 순간.' 그는 아마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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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무엇을 위하여 그렇게 열심히 살았습니까?"
-'너무 열심히 산 자의 분노' 중에서
주위를 보면 앞만 보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정작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과정 없이 주어진 일에만 몰두하며 잘 살고 있다 착각하는 사람들. 하지만 가끔은 멈춰서 고민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내가 무엇을 위해 열심히 살고 있는지, 그것을 지금 달성하는 것은 불가능한지를.
가끔 상담을 하다 보면 돈을 벌기 위해 아이와 함께 하는 시간이 거의 없어서 관계가 틀어진 경우를 보게 된다. 그럴 경우 돈을 버는 이유에 대해 물어보면 대부분 아이를 위해서라고 답변한다. 뭔가 이상하다. 아이와 함께 행복하기 위해 아이와 함께 할 시간을 내지 못할 정도로 열심히 일하는 데 관계는 점점 멀어지다니? 무엇이 정말 중요한지 한 번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선생님, 이제 엄마와의 작별의 시간이 다가오나 봅니다. 이제는 제가 엄마를 놓아드려야 하는 때가 온 것 아닌가 해요. 아버지와 저희 가족을 아프시기 전처럼 똑같이 챙기시던 대단한 엄마가 자꾸 약해져 갑니다. 공기 좋은 곳으로 이사 갈까요, 하고 선생님께 물었을 때 선생님이 엄마에게 딸 옆에 꼭 붙어살라고 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엄마가 같은 아파트 단지로 이사 오셔서 저랑 함께 아이들 등원시키고 사우나도 가고 산에도 가고 했던 1년이 너무 행복했습니다. 이 행복이 이대로 끝나버리는 건가 봐요. 제가 해드릴 수 있는 게 너무 없네요. 불과 20일 전이 다시 돌아가고 싶은 시간이 될 줄은 몰랐습니다.
-'특별하고 위대한 마지막' 중에서
삶의 마지막이 눈앞에 놓인 상황에서 일상의 소중함은 몸소 느껴질 것 같다. 1년도 아닌 그저 20일 전 엄마와의 평범한 일상을 꿈꾸게 되다니. 이런 글을 보면서 지금 이 순간 소중한 이들에게 더 잘해줘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나는 울음을 멈추지 못하는 큰딸을 앞에 두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딸이라는 이유로 그런 아버지의 마지막까지 감당해야 하는 것이 참담했다. 어쨌든 환자가 죽음으로써 이 '부녀'라는 관계의 굴레가 드디어 종결된다는 것이 그녀에게 유일한 희망으로 보였다. 부친의 죽음이 그녀의 삶에 찾아오는 첫 번째 행운 같았다.
-'혈연이라는 굴레' 중에서
나는 특별히 유명해지거나 훌륭하다고 찬사 받는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다. 적어도 주위 사람들이 나로 인해 불행하다는 이야기만 듣지 않으려 노력한다. 이 부분을 읽으며 '나는 아이들에게 어떤 아빠일까?'를 고민했다. 아무래도 아내와 아이들을 낳기 전 훈육은 내가 담당하기로 했기에 그저 무서운 아빠일 수도 있다. 그래도 아이들과 최대한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려 노력하며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편이다. '이런 나의 노력을 언젠가는 아이들이 알아주지 않을까?'라는 생각과 함께...
일흔 살의 노인 암 환자가 있었다. 그는 내게 얼마나 더 살 수 있는지 물었다. 의사로서 볼 때 6개월 이상 장기 생존은 어려워 보였다. 에둘러 말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으므로 나는 솔직하게 대답해 주었다. 그때 그 환자는 담담히 내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그다음 외래에 와서 말하기를, 이렇게 허무하게 죽을 수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얼마나 가능할지 모르지만 남은 시간 동안 자신이 정말 하고 싶은 일을 다 해보고 떠나야겠다며 자신의 결심을 말했다.
그 후로 그는 정말 매주 하나씩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해보기 시작했다. 들어보면 거창한 일들은 아니었다. 아내와 바닷가로 여행 가서 해산물 요리 먹기, 종일 바다 보기, 좋아하는 노래를 모아 자식들에게 선물하기, 손주들에게 편지 쓰기, 고향 친구들에게 밥 사 주기, 예전에 싸웠던 친구에게 연락하기 같은 일상적이면서도 소소한 일들이었다. 그는 매주 병원에 올 때마다 지난주에 자신이 했던 일을 소상히 늘어놓으며 즐거워했다. 진작에 이렇게 살았어야 했다는 말도 덧붙였다. 갑자기 할 일이 많아졌고, 사는 게 즐거워졌는데 얼마 남지 않아서 몹시 아쉽다는 이야기도 했다. 나는 그가 들려주는 별것 아니지만 특별한 이야기를 듣는 것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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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당신의 남은 날은 00입니다. 이 시간을 무엇으로 채우시겠습니까?"
물론 이 문제를 다 풀지 않는다고 뭐라고 하는 사람은 없지만 빈칸으로 남겨두기에는 아쉬운 일이다.
-'10년은 더 살아야 해요' 중에서
건강을 해치고 나서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하지 못한 것들에 대해 후회해 봤자 소용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결심했다. 아이가 어려서 나와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많은 지금 다양한 경험을 하자고.
그 결심을 하고 나서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다. 내가 개인적으로 핸드폰에 아이와 함께 가보고 싶었던 곳들을 저장해 둔 것이 있는 데 그걸 모두 인쇄했다. 그리고 아이와 함께 '여행하고 싶은 곳'이라는 포트폴리오를 만들어 지역별로 나누고 키워드를 정리했다. 다녀오고 나서 아이와 함께 감상평&사진을 올리는 것이 목적. 하나씩 실행으로 옮기고 있다.
나는 간혹 환자 곁에 있는 보호자에게 이런 질문을 하곤 한다.
"어머니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가 무슨 노래인가요?"
"아버지라면 이런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하실까요?"
이런 질문에 제대로 답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 그럴 때면 가족이어서 서로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가족만큼 서로 모르는 존재도 없지 싶다. 타인은 모르는 대상이기에 예의를 갖추고 서로 알기 위해 대화하지만 가족은 날 때부터 가족이었으므로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라고 착각한다. 무슨 문제가 생기든 결국에는 괜찮아질 거라고 안일하게 생각하고 상처 주기 십상이다. 언제나 '가족이니까'와 '가족인데 뭐 어때' 그 언저리에서 누구보다 가장 모르는 존재가 되기 쉬운 것이 가족인 것만 같다.
말하지 않으면 모른다. 그 환자도 자기 몸 상태에 대해 가족에게 솔직하게 말했어야 했다. 그렇지 않은 이유가 두려워서였던 가족을 위한 배려였든 결과적으로는 상처가 됐을 뿐이다. 늘 '죽음'으로 오는 관계의 끝을 지켜보는 의사로서 그것이 떠나는 사람에게나 남는 사람에게나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대화가 필요해' 중에서
사실 나도 모른다. 우리 엄마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아빠는 무엇을 하면서 생활하는지. 자주 연락은 드리지만 세세한 것은 모른다. 충청도 특유의 답답함? 나도 그렇지만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직접적으로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래서 걱정이다. 나중에 나는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지...
아이들을 보자 나는 그가 버티던 이유를 단박에 알았다.
아이들이 문가에서 주춤거렸다. 병실은 아이들에게 낯설고 두려울 것이다. 한참 동안 무거운 병실 공기를 탐색하던 아이들이 아빠 옆으로 다가왔다. 둘 중 큰 아이가 환자를 가만히 보다가 제 엄마를 돌아보고 물었다.
"아빠 머리에 혹 나서 아픈 거야?"
환자 머리에는 밤톨만 한 덩어리가 있었다. 혹이 아니라 암이 피부에 전이해서 뭉친 것이었는데 입원하면서 덩어리가 커져 밤톨만 해졌다. 아버지와의 영원한 이별을 일곱 살 난 아이에게 어떻게 이야기해 줘야 하는지 나조차도 난감했다.
"엄마, 아빠 이제 죽는 거야?"
아빠 없는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여섯 살, 여덟 살 아이들에게 어른들은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병실에는 침묵이 가득했고 환자의 부인과 아버지는 말없이 울기만 했다. 흐느낌은 깊어졌다.
아이들의 눈에 비친 아빠의 모습은 이상했을 것이다. '아야 아야'해서 병원에 갔다는 아빠는 자기들이 왔는데도 아는 척도 하지 않고 잠만 자고 있고, 놀아달라고 아빠한테 안기고 싶은데 아빠 몸에 이상하게 생긴 줄이 주렁주렁 달려 있어서 안기지도 못하겠다. 불러봐도 대답이 없고, 눈도 뜨지 않는다. 숨 쉴 때마다 그르렁거리며 꺽꺽 소리만 낸다. 엄마는 아빠 손을 붙잡고 주저앉아 엉엉 울고 할아버지는 벽을 붙잡고 흐느끼고 있다.
환자의 부인이 환자를 흔들면서 소리쳤다. 여보, 눈 좀 떠 봐. 눈 좀 떠 보라고. 애들 왔잖아. 얼굴 한 번 봐야지. 부인은 점점 더 세게 환자를 흔들었다. 그의 부친도 아들을 흔들었다. 내가 먼저 가야지, 네가 어떻게 저 어린 것들을 두고 먼저 가니, 이놈아. 이 매정한 놈아. 아이들의 눈에는 엄마와 할아버지의 울부짖음을 들은 척도 하지 않은 채 미동 없이 누운 아빠가 더 이상하지 않았을까. 환자의 숨소리는 점점 더 거칠어졌다.
아이들이 다녀가고 한 시간쯤 뒤에 환자는 숨을 거뒀다. 그제야 나는 이 환자의 늦어지던 임종이 이해가 되었다. 마지막으로 아이들이 무척 보고 싶었던 것 같았다. 그래서 그렇게 아이들이 올 때까지 버텼던 모양이었다.
-'임종의 지연' 중에서
아이들을 키우고 있어서일까? 이 부분을 읽으며 눈물을 흘렸다. 내가 만약 지금 이 상황에서 죽게 된다면? 상상하기도 싫다. 아내한테도 늘 말하지만 지금 죽게 된다면 난 눈을 감지 못할 것 같다. 적어도 아이들이 20대는 되어야 죽을 수 있을 것 같다. 살면서 아이들로부터 상처도 좀 받고 해야 아이들을 덜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은 요즘. 너무나도 사랑스러운 자식들이 있기에 난 더 건강하게 살고자 노력한다.
소아과 의사로부터 백혈병을 앓던 한 소아 환자와 보호자인 그 엄마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모든 치료가 실패했고, 의료진도 더는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아이는 임종만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어느 날 아침, 간호사가 아이의 혈압을 재러 병실에 들어섰을 때 보호자인 엄마는 아이를 품에 안고 있었다. 그러나 간호사는 보자마자 아이가 이미 호흡을 멎은 것을 알았다. 아이의 얼굴이 이미 푸른빛을 띠고 있었던 것이다. 아이의 사망 사실을 알리면 의료진이 아이의 시신을 데려갈까 봐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아이를 꼭 끌어안은 채로 밤을 새운 모양이었다. 간호사가 나중에 말하길, 마지막 온기를 나누고 있는 그 모습이 흡사 성모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끌어안고 있는 모습 같았다고 했다. 지난밤 아이는 열이 펄펄 끓고 호흡이 점차 거칠어졌고 마지막으로 "엄마..."라는 한마디를 내뱉고는 몇 시간 뒤 서서히 숨이 멎었다고, 아이 엄마는 나중에야 털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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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때 알았다. 죽은 아이의 신을 버리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 사기도 한다는 것을. 그들은 그렇게 가슴에 아이를 묻었을 것이다. 어쩌면 그 환자의 어머니도, 학생의 어머니도 매년 추운 겨울이 되면 따뜻한 겨울 점퍼를 새로 사서 태우지 않을까? 더운 여름이 되면 아이가 입을 시원한 여름 옷을 사서 태우지 않을까? 아니, 그들뿐만이 아닐 것이다. 어리고 젊은 자식을 잃은 부모는 대개가 그러하지 않을까.
-'아이의 신발' 중에서
어린 자식을 먼저 보낸 부모의 슬픔을 감히 이해할 수 있을까? 자식이 죽는다는 것만 상상해도 이렇게 눈물이 나는 데, 실제라면 어떨까? 그렇기에 아이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지금 이 순간이 더 행복하게 느껴진다.
오래 살고 싶은 것은 인간의 본능이고 생명은 고귀한 것이라고,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행복하다고 이야기하기는 쉽다. 입으로 도덕을 외치고 윤리를 말하는 일도 참 쉽다. 똥 치우며 병수발하고 비용 부담하긴 어려워도 말하기는 쉽다. 하지만 당신이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 살아만 있을 뿐 인간다움을 완전히 잃는다면 그때에도 그렇게 쉽게 말할 수 있을까? 혹 당신이 그런 상황이 된다면, 혹은 인지 기능 없이 단순히 숨만 쉬는 상태가 된다면 그런 상태로 몇 년 더 사는 것을 간절히 원하게 될까?
-'죽음을 기다리는 시간' 중에서
이 책의 마지막 부분은 생사의 갈림길, 인간의 마지막 모습을 담고 있다. 나는 지금껏 살아오면서 가까운 이의 죽음을 몇 번 접했다. 특히 할머니의 죽음이 기억에 남는다. 90살이 넘으실 때까지 할아버지와 함께 손수 밥도 지어먹으시고, 물레로 실도 짜시면서 활발하게 활동하셨던 할머니가 할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무너지는 걸 봤다. 충격으로 치매에 걸리셨고, 오랜 기간 투병하실 때 자식들이 힘들어하는 것을 봤다.
사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자식이라면 아픈 부모를 간병하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현실은 어려웠다. 투병 기간이 길어지면서 자식들이 돌아가며 모시기 어려워했고 결국 다툼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가끔 정신이 바로 돌아오실 때면 할머니 스스로도 힘들어하셨다. 과연 이게 올바른 걸까? 인간의 존엄이 무너질 만큼 무너진 상황에서 삶을 유지하는 게 옳은 일일까?
난 개인적으로 내가 그런 상황이라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할 권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가까이서 본 죽음은 너무나 참혹했기에. 나로 인해 내가 사랑한 사람들이 힘들어지고, 나아질 방법이 없어 더 나빠지기만 하는 상황 속에서 나에게 선택할 권리가 주어진다면 좋겠다.
책을 읽으며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다. 내가 피하고 싶다고 해서 피할 수 없다는 걸 잘 알기에 이를 슬기롭게 받아들일 필요가 있는 것 같다. 지금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이 읽어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