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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매주 시체를 보러 간다 : 서울대학교 최고의 ‘죽음’ 강의 - 서가명강 시리즈 1
유성호 저
죽음의 에티켓
롤란트 슐츠/노선정
스노우폭스북스/2019.10.3
sanbaram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그 죽음이 나에게 오지 않는 것처럼 생각하며 살아간다. 나이가 들고 주변의 친구나 지인들이 하나둘 죽어갈 때가 되어서야 죽음을 실감하지만 모두가 아는 것처럼 죽음은 나이에 상관없이 어느 날 갑자기 우리에게 올 수 있다. <죽음의 에티켓>에서는 죽음을 어떻게 맞이해야 하고 어떻게 진행되어 가는지에 대해 설명한다. 저자는 저널리스트로 활동 중이다. 독일 뮌헨의 저널리즘 스쿨을 수료한 뒤 Geo와 Die Zeit에서 일했으며, 독일 기자 상, 헨젤 미스 상, 테오도르 울프 상과 같은 수많은 상을 받았다.
<죽음의 에티켓>에서 저자는 아버지가 되면서 생명 탄생의 경이로움을 느끼고, 저널리스트로서 죽음에 대해 의문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찾은 책으로 가득한 도서관 2층 건물 전체에서 단 9페이지의 죽음에 대한 기술을 읽게 되었다. 바로 그 순간이 이 책의 출발점이었다고 한다. “인간이 죽으면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죽음은 언제 시작되는가? 죽음의 길은 어떤 경과로 진행되는가?”의 의문을 풀기 위해 죽음과 죽음 이후에 관한 질문을 던지며, 죽음에 대해 잘 알고 있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찾아 나섰다. 대체의학 의사들을 시작으로 의사뿐만 아니라 간호사들, 호스피스 도우미들, 법의학 의사들, 완화 의학과 교수 등 많은 사람을 만나며 취재했지만, 죽음에 관한 지식은 마치 모자이크 같이 한 조각 한 조각밖에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학술논문들과 죽어가는 사람이 자신의 상황에 대해서 말하며 집필한 개인적인 책들을 읽었다. 뿐만 아니라 죽음을 담으려고 노력한 통계 결과, 도표, 영화들을 보았으며, 사제들과 유족들, 죽을병에 걸렸던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눈 다음에 죽음에 대해 4부 23개 주제로 나누어 설명하는 글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현대에 와서 사람들은 죽음을 마치 미지의 우주처럼 대합니다. 죽음은 의심할 나위 없지만 내가 겪을 일은 절대 없다고 확신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당신이 곧 죽을 거라는 사실에 그토록 부적절하게 행동하는 것입니다.(p.28)” 그러나 지구에서는 1분마다 100여명이 죽으며, 하루에 15만 명이 죽는다. 이렇게 죽어가는 각자는 저마다의 이야기가 있지만 그저 사망자들이다. 누구나 홀로 죽는다는 것, 그의 죽음은 유일무이한 사건이라는 것! 이것이 바로 죽음의 역설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러면서 모든 사람들이 겪게 될 생의 마지막 여행에 대해 묘사한다. 죽음의 과정부터 죽음 직후의 검시, 장례식과 애도, 그 이후의 삶으로 이어지는 육체의 여행을 추적하고 연구함과 동시에 이 생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죽음의 의미를 묻는다.
“법은 한 사람의 출생증명서를 110년 동안 관공서에 보관합니다. 한 번 출생했던 사람이 죽고 사라지고 망각되는 기간이라고 봅니다. 혼인 증명서는 80년 동안 보관됩니다. 사망증명서는 30년입니다. 그리고 당신의 역사는 남아 있는 사람들이 아닌 관공서가 담당하는 역사가 됩니다.(p.236)” 우리의 법은 어떻게 되어 있는지 모르지만 대동소이한 내용으로 되어 있으리라 생각된다. ‘죽음’ 이것은 오직 당신의 죽음이다. 당신이 탄생한 그 순간부터 반드시 있게 될 확실한 종결. 그러나 “우리 모두에게 일어날 일이며, 우리는, 당신은, 나는 준비해야 합니다. 내 삶이 오직 나 자신의 방식이었던 것처럼 죽음 또한 온전히 내 방식대로 이뤄져야 합니다. (p.255)”고 저자는 말한다. ‘우리가 죽음을 어떻게 애도하며,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해 이 책에서는 진지하게 생각하며, 그 절차를 비교적 소상히 밝히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며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또는 죽음 자체에 대해 의문을 갖는 사람에게 여러 가지 도움을 줄 수 있는 책이라 생각되었다.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죽음의 에티켓
롤란트 슐츠/노선정
스노우폭스북스/2019.10.3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그 죽음이 나에게 오지 않는 것처럼 생각하며 살아간다. 나이가 들고 주변의 친구나 지인들이 하나둘 죽어갈 때가 되어서야 죽음을 실감하지만 모두가 아는 것처럼 죽음은 나이에 상관없이 어느 날 갑자기 우리에게 올 수 있다. <죽음의 에티켓>에서는 죽음을 어떻게 맞이해야 하고 어떻게 진행되어 가는지에 대해 설명한다. 저자는 저널리스트로 활동 중이다. 독일 뮌헨의 저널리즘 스쿨을 수료한 뒤 Geo와 Die Zeit에서 일했으며, 독일 기자 상, 헨젤 미스 상, 테오도르 울프 상과 같은 수많은 상을 받았다.
<죽음의 에티켓>에서 저자는 아버지가 되면서 생명 탄생의 경이로움을 느끼고, 저널리스트로서 죽음에 대해 의문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찾은 책으로 가득한 도서관 2층 건물 전체에서 단 9페이지의 죽음에 대한 기술을 읽게 되었다. 바로 그 순간이 이 책의 출발점이었다고 한다. “인간이 죽으면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죽음은 언제 시작되는가? 죽음의 길은 어떤 경과로 진행되는가?”의 의문을 풀기 위해 죽음과 죽음 이후에 관한 질문을 던지며, 죽음에 대해 잘 알고 있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찾아 나섰다. 대체의학 의사들을 시작으로 의사뿐만 아니라 간호사들, 호스피스 도우미들, 법의학 의사들, 완화 의학과 교수 등 많은 사람을 만나며 취재했지만, 죽음에 관한 지식은 마치 모자이크 같이 한 조각 한 조각밖에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학술논문들과 죽어가는 사람이 자신의 상황에 대해서 말하며 집필한 개인적인 책들을 읽었다. 뿐만 아니라 죽음을 담으려고 노력한 통계 결과, 도표, 영화들을 보았으며, 사제들과 유족들, 죽을병에 걸렸던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눈 다음에 죽음에 대해 4부 23개 주제로 나누어 설명하는 글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현대에 와서 사람들은 죽음을 마치 미지의 우주처럼 대합니다. 죽음은 의심할 나위 없지만 내가 겪을 일은 절대 없다고 확신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당신이 곧 죽을 거라는 사실에 그토록 부적절하게 행동하는 것입니다.(p.28)” 그러나 지구에서는 1분마다 100여명이 죽으며, 하루에 15만 명이 죽는다. 이렇게 죽어가는 각자는 저마다의 이야기가 있지만 그저 사망자들이다. 누구나 홀로 죽는다는 것, 그의 죽음은 유일무이한 사건이라는 것! 이것이 바로 죽음의 역설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러면서 모든 사람들이 겪게 될 생의 마지막 여행에 대해 묘사한다. 죽음의 과정부터 죽음 직후의 검시, 장례식과 애도, 그 이후의 삶으로 이어지는 육체의 여행을 추적하고 연구함과 동시에 이 생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죽음의 의미를 묻는다.
“법은 한 사람의 출생증명서를 110년 동안 관공서에 보관합니다. 한 번 출생했던 사람이 죽고 사라지고 망각되는 기간이라고 봅니다. 혼인 증명서는 80년 동안 보관됩니다. 사망증명서는 30년입니다. 그리고 당신의 역사는 남아 있는 사람들이 아닌 관공서가 담당하는 역사가 됩니다.(p.236)” 우리의 법은 어떻게 되어 있는지 모르지만 대동소이한 내용으로 되어 있으리라 생각된다. ‘죽음’ 이것은 오직 당신의 죽음이다. 당신이 탄생한 그 순간부터 반드시 있게 될 확실한 종결. 그러나 “우리 모두에게 일어날 일이며, 우리는, 당신은, 나는 준비해야 합니다. 내 삶이 오직 나 자신의 방식이었던 것처럼 죽음 또한 온전히 내 방식대로 이뤄져야 합니다. (p.255)”고 저자는 말한다. ‘우리가 죽음을 어떻게 애도하며,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해 이 책에서는 진지하게 생각하며, 그 절차를 비교적 소상히 밝히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며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또는 죽음 자체에 대해 의문을 갖는 사람에게 여러 가지 도움을 줄 수 있는 책이라 생각되었다.
그림은 점점 선명한 색을 잃는다. 마치 우리의 삶처럼.
목차만 봐도 죽음으로 향하는 것을 알 수 있다.
PART 1 어쩔 수 없이 우리 모두 죽어가고 있습니다
PART 2 마침내 죽음이 왔습니다
PART 3 살아남은 사람은 뭘 어떻게 해야 할까요?
PART 4 모두를 위한 뒷이야기가 있습니다
저널리스트로 활동 중인 롤란트 슐츠는 2014년 독일 의회에서 벌어졌던 안락사 토론에 크게 매료되었다고 한다. 죽음에 대해 알고자 관련 책들을 찾았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전 알고 싶었습니다.
인간이 죽으면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죽음은 언제 시작되는가?
죽음의 길은 어떤 경과로 진행되는가?
그리고 그 다음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p. 245)
『내 머릿속 원숭이 죽이기』의 대니 그레고리처럼 스스로 구한다.『죽음의 에티켓』에는 그 과정이 담겨 있다.
사망과의 민원 개방 시간이 끝날 때마다 호적부 공무원 O는 컴퓨터 앞에 앉아 작업을 시작합니다. 한 해의 모든 생년월일, 결혼, 사망 건들이 순차적으로 기입되고 번호대로 분류되고 있습니다.
O는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는 어떤 조치를 취해 놓았을까요? 그녀는 웃음을 터트립니다. 그러고는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안 죽어요.” (p. 177)
공무원 O 역시 자신이 ‘언젠가’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날은 오늘이나 내일이 될 수도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음을 멀게 생각한다. 두려움 때문이다.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건 지극히 자연스런 현상입니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인간은 평생 자신이 반드시 죽는다는 걸 부인하기 위해 노력하기 때문에 바로 그 이유로 생각하는 존재가 되었다”고 말이죠.
사실 죽음은 너무 멀리 있었습니다.
그건 언제나 다른 사람의 죽음일 뿐, 단 한 번도 당신의 죽음이었던 적은 없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당신은 다른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
너무나도 확실한 죽음을 보지 않고 회피해 왔습니다.
우리 모두가 죽어간다는 사실 말입니다. (p. 12)
『죽음의 에티켓』은 멀리 있는 죽음을 가까이에 자리하게 만든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이제 당신의 죽음에 대해서 생각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너무 서두르지는 마세요.
그냥 생각해 보세요.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건 뭔가요?
나와 다른 이들에게 어떤 소원이 이뤄져야 할까요?
어떤 준비를 해야 하죠?
그래요.
하지만 이것만은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죽음 이전의 시간과 죽음 뒤의 시간을 준비해야 한다는 것을요. (p. 37)
현재의 죽음은 비상시에는 인권도 포기합니다. 하지만 죽음은 오래된 것입니다. 애초부터 죽음은 모든 생명체에게 닥치는 운명입니다. 죽음을 미리 준비하고 신뢰하는 것은 죽음이 인간에게 불가피한 운명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어느 편이든 상관없습니다. 중요한 건 당신이 죽음을 한 번 깊이 생각해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선행 조치를 취하느냐는 자유입니다. 이건 당시느이 죽음이니까요.
그러나 당신 자신에게만 속한 죽음은 아닙니다. 나중에 장례업체 사람들이 당신 시신을 모시러 오면, 그들은 세 가지를 알고자 할 것입니다.
화장을 하나? 아니면 매장을 할 건가?
당신의 재나 시신을 어디에 묻을 것인가?
당신에게 특별한 소원이 있는가? (p. 40)
이에 대한 답변을 생각하다 보면 죽음이 목전에 있는 것 같다. 피할 수 있다면 피하고 싶다. 하지만 누구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불현듯 법의학자 유성호의『나는 매주 시체를 보러 간다』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죽음과 친숙한 삶이야말로 더욱 빛나고 아름다운 삶으로 새로워질 수 있다는 것을 꼭 잊지 않았으면 한다. 그것이 죽음으로 삶을 묻는 이유다. (p. 246 『나는 매주 시체를 보러 간다』)
『죽음의 에티켓』은 살아남은 사람의 입장에서도 죽음을 조명해 더욱 친숙하게 한다. ‘환자처분서’ 같은 직역에 간혹 괴리감을 느끼게 하는 점은 아쉽다. 뇌가 무게로 치면 3만 파운드로 나오는 등 오타도 많다. 그러나 죽음을 준비해야 한다는 롤란트 슐츠의 메시지는 오롯이 전하고 있는 듯하다. 웰빙에 이어 웰다잉이 새로운 화두로 떠오른지 오래다. 이를 위해 자신은 어떤 준비를 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는 건 어떨까.
내가 모르는 것에 대한 의문!
내가 알고 싶은 것에 대한 호기심!
그 사이에서의 나의 내적 갈등!
그 모든 것들이 죽음이라는 한 단어 앞에서 파생되는 사람의 상상력과 두려움으로 이루어져 있는 듯하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모르니까...알지 못해서... 사람이란 미지의 그 무엇에 대한 알고자하는 갈망이 강한 동물이다 보니....죽음에 대한 것도 그래서 더욱 관심을 받고 알고 싶어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장 우리모두 죽는 다는 사실을 피해 왔습니다”
죽음은 어떠한 법칙도 없이 모든 종류의 자유를 곧 빼앗고야 맙니다! 당신은 침묵하게 됩니다. 더 이상 아무말도 할 수 없죠. 과학자들은 이걸 ‘생존적 타격’ 이라 부릅니다
죽음에 대한 일반적인 표현과 받아들임에 대한 현상을 현실적으로 잘 묘사해서인지 몰입이 잘 되었습니다...죽음이란 예측할 수 없기에 더 쇼크로 다가오는 것일런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도서의 처음 시작은 잔잔하게 조금씩 서서히 제 곁에서 죽음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는 것으로 서두를 시작하였습니다. 아름답고 즐겁고 행복한 단어가 아니기에 더 외면하고 싶었을런지도 모르겠습니다.
죽음은 인간을 발가벗깁니다.
내가 누구인지 다 드러낼때까지 말입니다.
어떤 이들은 큰 충격을 받습니다.
마음껏 속마음을 말할수 있는 기회...아름답고도 슬픈 순간입니다.
p63 ~p64
죽음이 임박하면 여러 원천에서 고통이 생겨납니다.
의사들은 이 고통을 네가지로 구분합니다.
육체적, 사회적 , 영적, 심리적 고통으로 말입니다.
육체적 고통이란? 말 그대로 육체적 고통입니다
사회적 고통이란? 마음으로 스며 드는 절망, 어디에서 죽을지,
남은 일들은 어떻게 되는지, 그런것들에 대한 고통입니다
영적 고통이란 ? 의미에 관한 질문들, 죽음이란게 왜 있는 건지, 왜 하필 나인지...
사후 라는게 정말 있기는 한건지에 대한 의문의 고통입니다.
심리적 고통이란? 두려움입니다. 혼자인것에 대한,
외로움앞에 대한, 불확실성 앞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p75
수술실의 수건이 초록색인 이유는,
그 위에 묻은 피가 끔찍한 빨간색이 아닌 어두운 색의 얼룩으로만 보이는 효과가 있기 때문입니다.
읽어 내려 갈 수록 죽음이 오는 과정을 너무나 정밀하고 세심하게 묘사를 하였기에 내가 지금 죽어가는 현상을 느끼고 있다는 느낌까지 받는 것 같은 몰입이 생기곤 합니다. 간접적인 경험을 하면서 나의 죽음에 대한 생각과 상상을 통해서 간간히 던져주는 지은이의 질문에 나는 대답하려 더 깊은 곳까지 생각을 이끌어 가보는 경험을 하고 있는 것 같음을 느낍니다.... 단순하게만 생각했던...막연하게 생각했던 죽음에 대한 나의 생각들이 표현 하기 힘든 묘한 감정의 느낌을 받게 하는 것 같은 끌림에 이끌려 갑니다.
p97~p98
당신의 몸을 빠져나간 생명은 도대체 어디로 가 버린 걸까요?
당신에게서 빠져나온 에너지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요?
당신의 호흡에서 느껴지던 힘은?
죽음은 명확한 파악이 불가능한 영역에 속합니다.
p110 ~p111
이때 알아 두면 좋을 사항이 있습니다. 누군가 시신의 옷을 갈아입히려고 한다면 지금은 아닙니다. 시신을 검안하는 의사가 아직 다녀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시신을 검안하는 의사가 불편을 겪지 않거든요. 또 창문을 여는 것이 좋습니다.가능하다면 몇가지 서류들을 모읍니다.
시신의 손은 깎지를 끼게 하면 안됩니다.
그래요. 당신은 죽었습니다.
이제 당신은 죽고 없습니다.
p117
"여러분, 죽음이라는 진단은 경솔하게 내려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의사가 내릴 수 있는 진단 중에서도 가장 중요하고
엄청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 판단이기 때문입니다."
7장~9장까지 죽음을 맞이하는 과정과 죽음을 맞이 했을때 그 죽음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해야 할 것과 주의해야 할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었습니다. 그 속에 나는 죽어가고 있고, 죽어있는 채, 영혼이 멀리서 나의 죽음을 대하는 사람들에 대해 바라보고 있는 듯한 표현처럼 느껴지기도 하였습니다.
p97- p98에서의 질문이 내가 항상 궁금해 했던 내용이었는데..결론은 죽음이란 명확한 파악이 불가능한 영역....즉 알 수 없는 영역임을 이야기하였기에 그저 우리는 추측을 할 뿐인 것을 강조하는 것 같았습니다...
시반이라는 단어는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어떤 형태로 나타나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었던 부분이었습니다.
붉은 반점-> 색이 짙어짐 -> 반점의 크기가 커짐 -> 푸르스름한 보라색 반점이
나타난다고 하니... 사람의 신체란 참 신비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몸에서 반응하는 죽음의 현상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영혼의 어느 한 곳에서 내 죽음을 바라보고 있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지은이의 상황설명과 죽음에 처한 장면들을 생생하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죽음을 맞이하는 인물은 총 독자를 제외하고
3명의 인물이 나옵니다.
요양병원에 계시는 할머니, 어린이병동에서 오랜 기간 치료를 받고 있는 5세
남짓의 아이 그리고 공사장에서 예기치 못한 사고로 갑작스럽게 죽은 청년
그리고 지금 글을 읽고 있는 독자는, 가정에서 가족들 앞에서
서서히 죽음을 맞이하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모두 다른 곳에서 다른 죽음을 맞이면서,
어디서 죽음을 맞이하는지가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
이 4명의 다른 죽음을 빗대어 저자는 친절히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P180
당신의 졸업들 중 가장 슬픈 졸업, 마지막 성적표입니다.
바로 사망증명서, 인간의 모든 문서들 가운데에서 이 얇은 문서가
가장 큰 권력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이 한 장의 종이가 삶을 지웁니다.
P185
죽음 가운데 망자의 삶을 기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누군가와 무엇을 이해 또는 어떤 목적을 위해 한 방향으로 곧장
나아가기만 했던 인생의 길.
서로의 존재를 당연하게 여겼던 사랑하는 이들,
크고 작은 행운들, 그의 삶들.
어떨 때는 문장 하나로 족합니다.
어떨 떄는 복잡하게 얽힌 추억 하나로도 부족합니다.
그러고 나면 환하고 명료하게 당신이 어떤 인간이었는지가 밝혀집니다.
당신이 얼마나, 왜 중요한 존재였는지가 드러납니다.
이 대목에서 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나의 죽음 가운데 나의 삶은 어떤 형태로 기억될까?
사랑하는 이들, 경험을 통해 쌓아두었던 나의 지나왔던 길들...
과연 문장하나로 부족한 삶일까....
아니면 그 누구도 가늠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한 삶이였을까?
어떻게 보면, 죽은 뒤에야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는지
밝혀질 수는 있지만, 가장 들고 싶어하는 본인은 이 세상에 없다는 것이....
어떤 방향으로 생각하는지에 따라, 의미 해석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마지막 장에서 저자는 말합니다.
독자의 죽어감과 죽음을 직접 이야기해 보는 저자의 접근 방식이
두 가지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하나는, 독자 개인의 죽음으로 끌고 가는 이 방식이 결국 독자로 하여금 죽음에 대해서 잘 알게 도었다거나 죽음을 제어(컨트롤) 할 수 있다고 느끼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 책에서는 이런 경향이 더욱더 강하게 나타나기 쉽습니다.
==> 제가 줄곧 느낀점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입니다.
또 하나는, 저자가 글을 스는 동안에 발견한 우려점이기도 한데, 이야기를 직접 거는 형식을 죽음과 추모를 다루는 경우에는 실제 현실적 상황이 불명확하게 전달된다는 것입니다.
(중략)
이게 사실은 죽어감과 죽음에 대한 글임에도 죽음을 너무 따뜻하고 친절하게만 그려서 어떤 사람들이 죽거나 매장될 떄의 상황을 너무 아름답게만 묘사한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 것이 저자책의 중대한 단점이 아니길 바란다고 쓰여져 있습니다.
죽음을 받아들임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많아지면서,
장례에 대한 것을 미리 경험해 보는 체험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간혹 미디어에서 보여지는 살아있을 때 해보는 장례 체험에 대해 보았을 때
느꼈던 감정보다는 조금 더 직접적인 느낌과 경험적인 느낌이 강한 것 같았습니다.
아마도 저자의 독자를 개인의 죽음으로 명칭해서 함께 책속에
스며들게 했던 영향력이 크게 작용하지 않았나 생각해 보게 됩니다.
저는 책을 읽으면서 새로운 생각과 조금은 진중하게 죽음에 대해
내 삶을 전반적으로 다시 되뇌여보는 시간을 가지면서,
막연한 공포감과 두려움만이 아닌 조금은 다른 시각으로
어쩌면 조금은 알 것 같다는 느낌 때문인지도 모를 감정의 묘한 경험을
해 본것 같았습니다. 그만큼 이 도서에서 몰입시켜주는 포인트는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만큼 매력적인 도서였습니다.
삶에 대한 아름답고 긍정적인 면을 바라보는 것도 좋지만,
어쩌면 어두울 수도 있지만, 당당하게 바라보고, 바라봐 주는 면도
있다면 두려움이 차분함으로 혼란스러움이 조금은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도서였습니다.
당신은 어떤 죽음을 맞이하고 싶습니까?
리뷰어클럽 선정단 자격으로 작성된 리뷰입니다.
상상도 못한 혹독한 이별이었다. 죽음으로 친구를 잃는 일은 처음이었다. 올해 초 벗의 죽음을 충격적으로 접하고 내가 가장 관심을 가진 주제는 '죽음'이었다. 죽음을 받아들이는 5단계(부정-분노-협상-우울-수용)처럼 내 독서 과정도 매우 혼란스러웠다. 그즈음 죽음에 대해 읽은 첫 책은 롤랑 바르트가 어머니 사망으로 쓴 『애도 일기』였다. 롤랑 바르트의 아주 개인적 애도였으므로 당시 내 감정에 크게 와닿지 않아 아쉬움이 많았다. 6월~7월 두 번 읽었던 베르나르 베르베르 『죽음』도 재밌는 소설일 뿐이었다. 김진영 저자가 암 투병으로 쓴 『아침의 피아노』, 죽음으로 가는 마무리가 환상적으로 펼쳐지던 욘 포세 『아침 그리고 저녁』, 가족의 죽음을 다룬 줄리언 반스 『웃으면서 죽음을 이야기하는 방법』, 페터 한트케 『소망 없는 불행』 등을 차례로 읽어왔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가 엇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제각기 다르다" (톨스토이 『안나 카레니나』 )라는 표현처럼 모든 죽음은 저마다 달랐다. 죽음에 초점을 맞추자 사망 사고가 다뤄지는 책과 드라마, 초자연적 소재의 영화도 정말 많이 보았다. 독서광이었던 죽은 벗이 당시 처했을 상황이나 감정이 어떠했을까 추측하며 관련한 책도 틈틈이 찾아 읽었다. 죽은 벗이 당시 처했을 상황이나 감정이 어떠했을까 추측하며 독서광이었던 죽은 벗이 읽었던 책, 읽고 싶어 했던 책, 읽고 싶어 했을 책도 틈틈이 찾아 읽었다. 반대 상황이었다면 아마 벗도 그랬을 것이다. 어쩌면 더. 벗의 빈자리는 결코 다른 것으로는 채워지지 않았다.
두 달 뒤면 이제 1년이 되어간다. 불쑥불쑥 솟는 슬픔은 아직도 여전하지만 이제는 그렇게 격렬하지 않은 것에 안도하면서도 씁쓸해한다. 앞으로 맞이할 또 다른 타인의 죽음과 나의 죽음에 대해 나는 여전히 속수무책이다.
『죽음의 에티켓』을 읽은 일은 그간 내가 우회적으로 읽었던 죽음에 좀 더 직접적으로 접근하고자 한 경험이다. 벗의 죽음에 대한 내 슬픔은 투사된 자기 연민에 휩싸여 있다는 걸 모르지 않았다. 이 책은 내 죽음이 어떠해야 할지 더욱 준비시킨다.
*
누군가는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인간은 평생 자신이 반드시 죽는다는 걸 부인하기 위해 노력하기 때문에 바로 그 이유로 생각하는 존재가 되었다"라고 말이죠.
**
케이크와 꽃, 진심이 담긴 편지. 그들은 마치 자기 자신인 양 당신을 살뜰하게 보살핍니다. 그러나 아무리 선의에서 그러는 거라 해도 고집스럽게 그들과 거리를 두는 게 좋습니다. 여기 이 문제가 오로지 너만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착각을 하고 있는 겁니다. 이 문제, 죽음은 오로지 나 그리고 당신의 문제라는 사실을요.
***
죽음에 임박한 사람들이 듣는 말 중 대부분은 세 가지 패턴 중 하나입니다.
첫째, 과소평가하기입니다. 그 지혜들 속에는 단 하나의 교훈이 들어 있습니다.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기’입니다.
두 번째는 스승 스타일로 교훈 주기입니다. 이들은 당신의 병을 귀중한 경험으로, 일종의 생존 훈련으로, 육체 외의 정신과 영혼을 위한 훈육으로 보는 겁니다. 모든 것에는 깊은 뜻이 있나니, 이제 좀 그것을 깨달으라는 식이죠.
세 번째는 해법 제시입니다.
당신을 구할 수 있는 길을 예견하고, 당신의 병을 고칠 요법을 안다고 주장합니다. 마인드컨트롤이나 기도문 같은 게 당신을 낫게 해 줄 거라면서 만약 그걸 시도하지 않으면 애석한 일이 될 테고 치유는 오직 당신 손에 달렸다며 모든 것은 마음가짐에 달려 있으니 결코 굴복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죽음이 임박한 환자들 중에는 이런 순간에 건강한 사람들이 자신 위에 올라앉아 재판을 하는 것처럼 느껴진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사실은 그것만으로도 대화의 방향이 죽음과 얼마나 관련이 없는 곳까지 와 버렸는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역설적인 현상이 아닌가요? 죽음은 도처에 있잖아요. 매일 아침 신문에, 매일 저녁 TV 뉴스에, 하루 종일 인터넷에 있는데도 일상에서는 죽음을 거의 볼 수 없으니 말입니다.
사실 현대 문화는 명명백백한 죽음을 의식으로부터 밀어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나이가 오십 혹은 육십이 되어서 그들의 부모가 죽을 때에야 난생처음 시신을 보기도 하니까요.
역사의 관점에서 보면 그건 변칙적인 현상입니다. 죽어가는 것과 죽음은 수천 년 넘게 감지 가능한 삶의 한 부분이었고 그것도 모든 연령대에서 일어나 왔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이제 죽음은 무엇인가 추상적인 것이 돼 버렸습니다. 현대에 들어와서 사람들은 죽음을 마치 미지의 우주처럼 대합니다. 죽음은 의심할 나위 없지만 내가 걸을 일은 절대 없다고 확신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당신이 곧 죽을 거라는 사실에 그토록 부적절하게 행동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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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첫 증상이 나타난 사람들은 이 쇠락을 이렇게 말합니다. ‘어느 날 아침 거울을 보면 도무지 내가 알지 못하는 낯선 이가 보인다고. 몸이 변화하고, 그 안에 살던 인간도 몸과 함께 변한다’고요.
슬픔이 생활에 침투합니다.
당신은 마지막으로 바다에 갔던 겁니다.
마지막으로 산에 갔던 거예요.
일터에서 차를 운전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잔 것도 마지막이었습니다.
마지막 눈.
식당에서 받은 마지막 영수증.
당신 머리 위로 뜬 마지막 달.
당신의 재능을 마지막으로 발휘한 것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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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 가장 뚜렷하게 그려진 곳은 얼굴입니다. 얼굴은 그 사람이 살아 있을 때 지녔던 모습과의 유사성을 잃어버렸습니다. 일생에서 한 번도 시신을 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도 금방 알아챌 것입니다.
당신은 죽었습니다. 하지만 혼자가 아닙니다. 같은 날 같은 시에 죽은 당신의 ‘죽음 쌍둥이들’이 세상 어딘가에서 함께 죽어갔습니다.
통계가 말해 주죠, 지구상에서 매초마다 두 명의 인간이 죽는다고 말입니다.
똑. 당신과 당신의 죽음쌍둥이.
딱. 예멘의 어느 갓난아기. 캐나다의 할아버지.
똑. 해변의 여자. 도시의 반대편에 사는 남자.
딱. 외로운 남자, 호주에 사는 아이의 엄마.
똑. 수도사와 여배우.
딱. 99세 고령할머니와 단 하루도 살지 못한 갓난아기.
똑. 갠지스 강가 농부의 아내와 안데스 산맥의 열쇠공.
딱. 여성 음악가와 지중해 어느 이름 없는 난민.
똑. 고속도로를 빠져나오려던 두 사람.
딱. 시리아에서 두 명의 병사가 죽고,
똑. 사망 번호 21, 사망 번호 22,
딱. 사망 번호 23, 사망 번호 24,
벌써 이 사망자들의 목록을 읽는 시간 동안 삼사십 명이 더 죽었습니다. 1분마다 100여 명이 죽습니다. 시간당 거의 6,500명이 죽습니다. 하루에 15만 명이 죽습니다.
(중략)
죽음이란 건 완전히 일상적인 과정이고, 그래서 세상에 그보다 더 보편적인 현상도 없습니다. 탄생처럼 죽음의 순간에도 우연히 선택된 사람들과 함께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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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슬림들은 죽은 자들의 귀에 종교 고백을 낭송해 주며, 영혼이 이 낭송한 것의 의미대로 육체를 벗어날 수 있도록 배려합니다. 불교 신자들은 영혼이 얼마간 계속해서 자신들을 싸고 있던 껍데기에 머문다고 생각해서 어느 시간만큼은 시신을 건드리지 않고 가만히 둡니다. 신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이해하기 어려운 무엇인가를 감지합니다. 어쩌면 그 모든 건 사람들의 상상이라고 과학자들은 말합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양측이 공통적으로 주장하는 게 있습니다.
누구든, 한 사람의 죽음 옆에 있는 혜택의 누릴 수 있다면
온 마음을 다해서 그 신비함을 맛 보라는 것입니다.
죽음은 명확한 파악이 불가능한 영역에 속합니다.
그 점에서는 물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드디어 잡았다고 생각하는 순간에 손가락 사이로 모두 빠져나가고 마니까요.
인간 역사가 시작된 순간부터 쭉 그래 왔습니다. 그들은 죽음 그 자체를 물리적인 현상으로 파악하지 못했으니까요.
죽음이란 무엇일까? 삶의 종결. 이 정의로는 뭔가 부족합니다.
삶은 무엇인가? 생명체를 생명체로 만드는 결정적인 요인이 무엇일까?
그리고 언제 그런 생명의 특징들이 종결되는 것인가?
사람들은 그것에 의지해서 죽음에 대한 깨달음을 얻습니다. 살아 있는 이들이 이 질문을 세대를 거치며 계속 생각해 왔기에 부족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몇 가지 대답들이 있기는 합니다. 죽어가는 과정처럼 죽고 난 다음의 상태 역시 하나의 과정입니다. 종교와 국가, 법이 이 과정을 다르게 할 뿐입니다. 각 분야마다 죽음의 과정을 다르게 해석합니다. 죽은 이를 두고 작업하는 의사들, 즉 법의학 의사들은 이 과정을 다음과 같이 구분했습니다. 곡선이 삶으로부터 아래로 우아하게 내려오다가 중간에서 뒤집히듯 방향을 바꾸어, 죽음으로 향하는 곡선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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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사랑하는 사람 한 명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자식을 잃었고,
아내를 잃었고,
남편을 잃었고,
아버지나 어머니, 가장 친한 친구, 어쩌면 식당의 요리사를,
가족의 기둥을, 유일한 경제적 주체를 사람을 잃었습니다.
또한 호칭을 잃었습니다. 자식이 없어진 부모가 여전히 부모인가요? 아내 없는 남편이 계속 남편으로 불릴 수 있나요?
아니면 그는 이제부터 즉시 자신을 홀아비로 이해해야 하나요?
그들은 당신이 일터에서 받던 임금을 받지 못하게 되고, 당신의 연금의 혜택, 어쩌면 아파트나 집, 친척들과의 연락, 당신의 사회적 네트워크, 당신의 인간관계와 당신의 지식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이렇게 가려진 상실들을 동반 손실이라고 부릅니다. 그들은 당신을 단지 현재에서 잃을 뿐만 아니라 당신과의 미래를 함께 잃습니다. 학자들은 이 상실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인생의 역사가 책 한 권이라면 어느 한 페이지에서, 갑자기 어느 한 줄에서 모든 미래를 위한 장들은 찢겨 나가 중단되는 것’이라고요.
당신이 언젠가 갖게 되었을지 모르는 자식들, 어느 날 당신이 그들에게 선사해 주었을지도 모르는 손자들, 꿈, 여행, 곧 이뤄졌을지도 모르는 소망, 모든 것이 파괴됐습니다.
모든 게 사라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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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신 앞에 있다는 건 견디기 힘든 일입니다. 자연스런 일이죠. 죽음을 TV에서만 봤지, 실제 주검을 보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니까요.
사랑하는 애인, 사랑하는 부모와 형제, 사랑하는 자식, 오랜 친구, 그들의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선명하게 들리는 것 같고, 그 제스처와 시선과 향기가 기억에 아직 남아 있는데 참 기가 막히는 노릇입니다. 당황스럽고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적어도 즉시, 빨리는 아닙니다.
이럴 때 도움되는 게 하나 있습니다. 가까운 사람이 죽었을 때는 사체를 정말로 직접 만져 보는 것으로써 죽음을 인지할 수 있다고 합니다. 보고 만지고 느끼는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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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든 그들을 도와주려거든 물어보기 전에 씻지도, 버리지도, 정리하지도 말라고요.
이 빈 와인 병, 이건 그가 생전에 마지막으로 마셨던 그 와인이었습니다.
정리되지 않은 구겨진 이부자리, 거기에는 그의 몸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지저분한 빨랫감, 거기에서 당신의 냄새가 나죠.
슬픔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남겨진 이들을 외롭게 만듭니다. 어쩌면 그들은 모든 이와 연락을 끊고 지낼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계속 당신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자신을 고립시킬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침묵만 하는 것이 고립시킬지도 모르고. 그것을 참아 낼 수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일상의 사람들, 수천 가지의 의미 없는 사소한 일들을, 세상을 텅 빈 눈으로 바라봅니다. 고통스러운 깨달음 속에서 죽음과 상실이 인생에 속하는 것임을 깨닫습니다. 무엇이 정말로 중요한 것이냐는 의미의 질문에 그들은 명확한 대답을 배웠죠.
이 명료한 깨달음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행동들이 의미 없이 느껴지게 됩니다.
모든 게 중요할 것 없어 보이니까요. 모든 게 하찮아 보입니다. 그들은 정말로 중요한 것과 나머지를 극단적으로 구분합니다. 이런 타협 없는 태도가 다른 사람들에게는 충격을 주죠. 그러고 나면 스스로를 고립시킵니다. 그래서 위로하던 사람들은 그들에게 접근할 수 없다고 느낍니다. 그들은 완전히 자기 자신 안으로 숨어 들어갑니다.
그렇게 시간이 조금 흐르면 그들은 당신에게 뿐 아니라 다른 모든 이에게서 버림받았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이렇게 그들은 이중적으로 버림받았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것은 지독한 외로움입니다.
이 책을 읽으며 내가 왜 이렇게 벗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지 하나의 이유를 발견했다. 내가 그녀를 직접 보고 실감하지 못했다는 것. 묘지로 달려가 그녀의 무덤을 보고도 당최 이해되지 않았다. 이별을 차근히 받아들일 과정이 전혀 없었으므로 그 문제에서 내 이성과 감정은 계속 혼란 속이었다. 고인의 주검을 직접 접하고 마음 정리하는 과정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장례를 빨리 해치우는 일은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그리 좋지 못하다. 더욱이 살해된 가족의 시신을 찾지 못한 유가족이나 세월호 유가족들은 더 아픔을 극복하지 못하고...
누구나 다 죽는 것이라고 죽음을 일반화로 재단할수록 슬픔의 암흑은 더욱 커진다. 섣부른 위로는 상대를 더욱 힘들게 할 뿐. 죽음은 지극히 개인적인 슬픔이다. 스스로 극복할 시간이 필요하다.
인간의 역사는 8,000세대 정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지금까지 지구상에서 죽어간 인간들의 수는 2천억 명 정도로 추산한다. 인간의 기대 수명은 점점 늘어났고, 2020년이면 인류 역사상 최초로 5세 미만 어린이보다 65세 초과 연령대의 인구 수가 많아진다. 곰페르츠theodor Gomperz의 죽음의 법칙에 기반한 통계학에 따르면, 서른 살이 되면서부터 인간은 8년에 한 번씩 바로 그다음 연도에 죽을 확률이 두 배로 높아진다. 40세에 죽는 것은 불행이고, 60세에 죽는 것은 운명이며, 70세를 넘기면 불평할 게 없다. 하지만 죽음이라는 사건은 우리를 단번에 비탄에 빠뜨린다.
죽음에 이르는 과정과 장례 절차에 따라 이야기가 순차적으로 진행되는데 독일 문화권 얘기라 한국에도 이런 과정을 구체적으로 담은 책이 있어야 하지 않나 싶었다. 이를테면 독일은 관공서에서 출생증명서를 110년, 혼인 증명서는 80년, 사망 증명서는 30년 동안 보관하는데 한국은?
탄생과 죽음이 일상적인 과정이자 우연의 결과라는 걸 우리는 모르는 척할 수 없이 알고 있다. 내게 바람이 있다면 반드시 이뤄야 할 꿈보다 어제보다 더 성숙하게 죽음을 맞을 수 있었으면 하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