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어디까지 진실할 수 있을까. 나의 삶은 스스로에게 얼마나 솔직하고 떳떳할까. 각박한 현대 사회, 너도 나도 속이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시대에서 이런 물음은 어찌 보면 고리타분하고 현실감각이 없는 생각으로 치부될지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머릿속 한구석에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었다. 초중고 학창 시절에 우리는 학교 교육을 통해 바르게 살아가는 방법과 사회생활의 규율을 교육받지만, 머리가 커가면 커갈수록 그런 원칙적인 방법보다는 변칙에 능숙하고, 목적을 위해서라면 타인을 서슴없이 기만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경험으로 체득한다. 그런 변칙과 기만을 자행하면서 우리는 '원래 삶이란 그런 것'이라며 자조하고 합리화를 하지만, 이런 과정에서 정상적인 심성을 지닌 사람들이라면 내적인 갈등과 스트레스가 있기 마련이다.
그렇게 몇 번 사회물을 먹다가 보면, 마음속에서 울부짖던 양심도 무뎌지기 시작하고, 그렇게 우리는 세월이 흐름과 동시에 풍파에 젖은 스스로의 모습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겉으로 볼 때에는 바르게 자라고, 좋은 이미지를 가졌다고 호평하는 분들이 나름 있었지만, 그거야 피상적인 겉모습일 뿐이고, 나 자신이 나를 스스로 들여다봤을 때 나 역시 탐욕과 위선, 그리고 공명심과 허세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이런 표리부동한 자신 때문에, 10대와 20대 시절에는 방황을 했다. 마음 수양을 그렇게 하려고 노력하고, 세월의 풍파에 젖지 않으려고 그토록 노력했건만, 종국에 가서는 그런 노력을 스스로 배신하는 모습 앞에, 나는 내적으로 스스로를 자학으로 몰아붙였다. 실망, 원망, 비난, 그리고 좌절로 이어지는 내적인 갈등의 연속, 길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 터널을 계속해서 맴도는 느낌이었다.
인간이란 얼마나 숭고한 존재인가. 역사서에 기록된 영웅들의 일대기와 선인들의 삶을 접하면, 같은 인간이지만 위업을 이루기 위해 스스로를 수양하며 달궈낸 그들의 강인한 멘탈 앞에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한편으로 인간이란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가. 나를 포함한 수많은 사람들은 세속적인 가치에 휘둘려 오늘도 우리의 욕망을 스스로 자제하지 못해 아등바등 살아가고 있으니. 나는 왜 역사 속에 위업을 남긴 인물들과 같이 될 수 없는 것일까. 그들의 멘탈은 태생적으로 강한 것인가? 그들과 나는 아예 다른 인간이란 말인가? 그들은 삶의 풍파 속에서 과연 흔들린 적이 없었을까. 매번 마음 수양에서 패배한 나로서는 위인들과 선현들의 진솔한 고백이, 가식 없는 생생한 고백이 너무나도 듣고 싶었다.
그때 《고백록》을 만났다. 어느 날 기독교를 믿는 친구에게 '종교가 과연 인간의 내적인 고민으로부터 구원을 내려줄 수 있느냐?'라고 물었더니, 그는 말없이 《고백록》 책을 주면서 한 번 읽어보라고 하더라. 종교가 없는 내 입장에서는 종교적 색채가 물씬 느껴나는 이 고전을 읽기가 망설여졌지만, 그거야 읽고 나서 판단하면 될 문제고, 일단은 읽어보자고 생각하고 읽었다. 책을 읽으면서, 마치 초절정으로 더운 날씨에 시원한 이온음료를 삼키는 쾌감을 느꼈다. 그 정도로 이 책은 방황하던 내게 시원함과 통쾌함을 선사했으며, 책을 접한 이후 마음이 흔들릴 때 남몰래 읽던 고전이었다.
기독교의 성자로 추앙받는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의 인생 전반을 《고백록》에 녹아냈다. 성자였던 그가 방황하고, 무절제하고 이단을 배우며, 색욕에 탐하던 어린 시절. 그런 타락의 시절을 진솔하고 호소력 있게 고백하며, 스스로를 통렬하게 반성한다. 그가 자행했던 타락의 기록들을 읽으며, 나는 일말의 안도감을 느꼈다. '마음을 다잡는 것에 있어 나만 힘든 게 아니었구나. 성자나 위인들 역시 나와 똑같은 인간들이구나.' 라고. 아우구스티누스가 반성하던 덕목들 위선, 자만, 오만, 정욕, 욕심, 탐욕... 이런 세속적인 덕목들은 나를 포함한 일반인들뿐만이 아니라, 성자라고 불리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삶에도 찾아볼 수 있다. 하긴 비슷한 예로 불교의 창시자인 석가모니도 수행을 하면서 색욕과 탐욕을 시험당했다고 한다. 나뿐만 아니라 그들 역시 나와 비슷한 고민을 가진 인간이었다.
《고백록》의 후반부는 그런 타락스러운 덕목들로 가득 찬 자신을 회개하고 주님의 은혜를 통해 극복하며 마음의 평화를 얻는 과정으로 구성됐다. 사람마다 고민을 해결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지만, 아우구스티누스는 주님의 은총에 기대어 열렬한 신앙 활동을 통하여 스스로의 마음을 정화했다. 특정 종교를 믿는 입장은 아니라 아우구스티누스의 방법이 최선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는 해답을 찾아 마음의 평안을 찾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데 성공한다. 신자가 아닌 일반인의 입장에서 이 책을 읽으면서 느낀 점은, 이토록 자신의 내면을 디테일하고 진솔하게 고백할 수 있었다는 점이 너무나도 인상적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결점은 가리고, 자신의 장점을 부각하려고 노력하는 동물이다. 그런데 아우구스티누스는 대중 출판을 목적으로 한 저서에서 스스로의 결점을 디테일하게 발가벗기듯 고백하고 있으니 이토록 용기 있고 진솔한 저서가 세상에 얼마나 있을까 싶다.
서두에서 말했듯 요즘 세상은 타인을 넘어 나 자신을 기만하는 시대다. 스스로의 마음을 기만하는 것이 보편화된 시대에서, 이런 내면의 진솔한 고백은 깊은 울림을 주기에 충분했다. 최근 나는 불교와 그리스도교와 관련된 고전들을 접하고 있는데, 그런 일환에서 라틴어를 바탕으로 한 새로운 번역본 《고백록》을 다시 읽었다. 20대의 정신적인 방황 앞에서 한 줄기 구원의 빛을 내려주던 《고백록》을 이렇게 다시 읽으니, 그때 전율했던 감정이 생생히 떠올랐다. 세월이 지나도 인간의 진솔한 마음은 가장 강력한 무기라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고백록》은 특정 종교적인 교리를 담은 책이 아닌 보편적 고전의 반열에 올려야 하지 않을까. 그러므로 내적 갈등을 경험하거나 정신적인 방황을 앓고 있는 지성들에게 이 책을 적극적으로 추천하고 싶다.
1600년 넘게 사랑받아온 역사상 최고의 자서전(책 표지)
“고백록”을 읽고 난 직후의 느낌을 말한다면 :
코로나19로 인해서 참여하지 못했던 예배랑,
부족했던 기도를 한꺼번에 한 것 같음.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쓴 전도서라고 해도 될 것 같다.
1부터 9권까지는 과거의 죄를 고백하고 있지만,
10권은 뇌과학, 신경과학 이론에 가까운 내용을
11∼13권은 창조의 말씀, 시간의 철학, 창세기의 풀이를 통해 하나님의 위대함을 찬양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아우구스티누스의 수사학 능력이 돋보이는 기록물이다.
특히, 11∼13권에서는 지난번에 읽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을 읽는 것 같이
논리와 구성이 대단한 것 같다. (이해하기 쉽지 않았다는 다른 표현)
아마도 신학대학에서나 수도원에서는 이 책이 필독서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물론 나 같은 아웃사이더 크리스천에게도 매우 도움을 주는 메시지다. 하지만 성경책을 읽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읽기에는 어려운 부분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저는 2010년 이후 성경책을 17번째 완독 중)
이 책은 나중에 반드시 다시 읽어야겠다. 최소한 2번 더! (최대?)
(1독: 2023.1.23.∼1.30)
49쪽 언어를 배움에 있어서는 공포감을 조성해서 강제로 주입시키는 것보다는, 자유롭게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이 더 큰 효과가 있다는 것입니다.
63쪽 나의 목적은 나와 이 글을 읽는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우리에게는 “깊은 곳”이 있고, 우리는 그 “깊은 곳에서” 주님께 부르짖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마음의 “깊은 곳에서” 고백하는 것과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보다 더 하나님께 기쁘게 받아들여지는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69쪽 사람들이 왜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냐고 누가 그 이유를 묻는다면, 우리가 앞에서 “저급한” 수준의 좋을 것들이라고 불렀던 그런 것들을 얻고자 하는 “욕망” 또는 그런 것들을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하는 “두려움”이 그 이유라고 설명하는 것 외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어 보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것들은 천상의 지극히 고귀하고 아름다운 것들에 비하면 비천하고 저급할지라도, 어쨌든 아름답고 매력적이기 때문입니다.
93쪽 “의”가 하나가 아니고 여럿인 것처럼 보이고, 시대와 지역에 따라 변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의”가 적용되는 각각의 시대들이 늘 똑같은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하여서 서로 다른 시대들이 되기 때문입니다.
223쪽 나는 죄악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하여 애써 왔는데, 죄악은 실체가 아니라, 사람의 “의지”가 최고의 실체이신 하나님을 떠나서 자신의 내면의 가장 깊은 곳을 버리고, 지극히 비천한 것들을 향하여 굽어져서 밖으로 부풀어 오른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228쪽 믿음이 약한 사람들에게 참된 가르침을 분명하게 보여주기 위해서는 이단들도 있어야 합니다.
281∼282쪽 동방교회의 본을 따라서, 사람들이 슬픔으로 인하여 기진맥진하게 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찬송들과 시편들을 다 함께 부르는 관습이 시작되었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이 관습은 전 세계의 거의 모든 회중 가운데서 정착되어서, 많은 사람들이 따라 하게 되었습니다.
394쪽 과거의 일들의 현재는 “기억”이고, 현재의 일들의 현재는 “직관”이며, 미래의 일들의 현재는 “기대”입니다.
465쪽 나는 존재하고 알고 원합니다. 나는 알고 원하는 가운데“존재하고”, 내가 존재한다는 것과 원한다는 것을 “알며”, 내가 존재하는 것과 아는 것을 “원합니다.”
오래전 <어거스틴의 참회록>을 읽어보았다. 번역도 매끄럽지 않고, 가독성도 떨어져 어거스틴의 삶과 그의 고백을 따라가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이번에 크리스천다이제스트에서 출판한 <고백록>은 라틴어 직역 완역판이라고 해서 기대가 컸다. 먼저 버논 버르크의 ‘고백록 해제’를 꼼꼼히 읽어보았다. 버르크는 <고백록>이 아우구스티누스의 단순한 회고록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와 은총에 대한 ‘찬양’이며 ‘신앙고백’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그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생애를 간략히 소개하며 400년에 <고백록>을 기록하였다고 했다. 이 글 바로 뒤에 있는 '아우구스티누스 생애와 작품 연보‘를 보니, 아우구스티누스가 히포(Hippo)의 주교가 되고 8년 뒤 397년 <고백록>집필을 시작했고, 3년 뒤 그의 나이 46세에 완성하였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이성을 추구하는 믿음”은 기독교 지성주의의 표어가 되었으며 아우구스티누스는 진정한 그리스도교 해석자로 인정받게 되었단다(p. 18). <고백록>이 아우구스티누스의 삶의 어느 시기에 위치해있는지 알게 되자 훨씬 친밀하게 다가왔다. 이번에는 <고백록>에 푹 빠져들 수 있을 것 같다.
회심의 과정을 묘사한 ‘제8권 무화과나무 아래에서의 회심’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영적 스승 심플리키아누스를 통해 빅토리아누스의 회심에 대해 듣는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빅토리아누스를 본받고 싶지만 지금까지 지속되었던 정욕의 습성에서 헤어 나올 수가 없었다. 그는 자신의 상태를 진단하며, ‘뒤틀린 의지’에서 ‘정욕’이 생겨났고, 계속해서 정욕을 좇다보니 ‘습성’이 만들어졌고, 습성을 대적하지 않았더니 ‘필연’이 만들어졌다고 고백했다(p. 243). 하지만 이제 진리를 알게 되었으니 변명할 수도 없게 되었는데도 ‘잠깐만’ ‘조금만 더’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그는 “‘잠깐만’은 결코 ‘잠깐’이 아니었고, ‘조금만 더'는 조금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길게 이어졌습니다.”(p. 245)라고 탄식한다. 그는 괴로웠고 마음으로 주님께 부르짖었다. 그 때 “집어 들고서 읽어라(tolle lege)”는 뚜렷한 음성을 듣고 성경을 펼쳤는데, 로마서13:13~14의 말씀을 읽게 되었다. 그리고 ’확신의 빛‘이 마음에 부어져 의심의 어둠이 사라졌다.
구원받은 이후 자신의 영적 상태를 묘사한 ‘제10권 기억과 욕망’에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영적 갈등이 생생하게 담겨있다. 그는 의사이신 주님 앞에서 자신의 비참한 영적 상태를 숨기지 않았다. 그는 오직 하나님의 자비하심만이 자신의 희망임을 고백한다. 주님은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요일2:16)을 절제할 것을 명하셨다. 그것은 음란, 탐식과 향기의 유혹, 귀와 눈으로 말미암는 쾌락, 호기심과 교만, 칭찬과 헛된 자랑, 자기만족과 같은 것들이다. 그는 구원받았지만, 여전히 내적 갈등을 겪으며 주님의 은혜를 구하는 자였다.
11~13권의 내용은 시간론과 창세기 1장을 해석한 것이다. 결코 쉽지 않은 내용이지만 아우구스티누스의 깊은 사상을 접할 수 있다. 부록으로 기록되어 있는 이석우 교수의 ‘감상문’과 김명혁 교수의 ‘해설’도 <고백록>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크리스천다이제스트에서 나온 <고백록> 덕분에 성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구교와 신교가 함께 존숭(尊崇)하는, 기독교 공통의 교부(敎父) 중 한 분입니다. 하지만 그가 남긴 많은 저작은, 유려한 문장과 깊은 성찰, 진솔한 고백을 담고 있어, 비단 해당 종교를 믿는 이들뿐 아니라, 신실한 태도로 일상을 살고 직분을 수행하려는 많은 독자들에게 깊은 가르침을 주어 왔습니다. 교인에게는 신앙에 대해 새로운 눈을 깨워 주고, 방종하고 타락한 삶을 사는 숱한 속인들에게는 한정된 인생이 결코 망상이나 부질없는 육욕으로 채워져서는 안 된다는 따끔한 일침을 던져 주기에 족한, 경건하고 유익한 고전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우리 일반 독자들이 잘 알듯, 젊어서 방종한 생활에 빠졌던 탕자에 가까운 사람이었습니다. 이는 육적(肉的)인 면에서도 그러하며, 어려서부터 최상의 교육을 받았던(생각 깊었던 그 부모와 풍족한 환경의 영향이 컸죠) 처지를 감안하면 정신적 지향의 면에서도 큰 방황을 거친 인생이었습니다(단, 이는 정통 기독교 신앙의 관점에서입니다). 얼마든지 세속이 제공할 쾌락과 방만함에 빠져 원 없이 욕구를 풀 수 있는 생을 지속할 수 있었지요. 이랬던 그가, 느닷 순수 정통 기독교의 가르침을 전면 수용하고, 그 신앙에서 요구하는 대단히 청순한(온갖 금지사항과 절제의 주문으로 가득한) 생을 내내 유지한 것, 주교로서 모두의 모범이 될 만한 삶을 실제로 살아낸 것, 그리고 이처럼 빛나는 윤리철학을 담은 저작을 여럿 남긴 것 모두가 당대인, 그리고 후세의 연구자들에게 경이의 눈으로 비춰졌습니다.
당시 강조하지만, 아우구스티누스의 삶은 "그저 공자님 말씀 같은, 듣고 읽기에야 백번 타당한 공허한 설교"로 유명한 게 아닙니다. 우리 한국인들만 해도, 그저 안락하고 결핍된 바 없고 욕망이 있으면 그때그때 충족하고 사는 그런 인생을 최고로 여깁니다. 연암 박지원의 짧은 글에도, "짧지만 당대를 호령하다 요절한 젊은 효웅(용모와 집안 배경, 출중한 무용 등 모든 걸 갖춤)의 삶(특정해서는 손책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아무 잘난 바 없지만 딱히 배곯고 풍찬노숙하는 시절 없이, 제 천수를 다 누리고 가는 삶 중 무엇을 과연 택하겠는가"가 논제로 등장한 적 있습니다. 이게 선택지 간 밸런스가 맞춰진, 제법 세간에 논쟁이 될 만한 질문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아우구스티누스의 생은, 저 두 가지 선택지가 하나로 합쳐진, 즉 생의 초기 조건 모든 청춘의 복락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동시에 수명을 복 받은 그대로 유지할 옵션까지 주어진 인생이었다는 점이 중요하죠. 나면서부터 받은 개인적 자질이라는 축복은 자신이 자의로 포기할 수 없지만, 여생 동안 누릴 수 있었던 물질적 환락은 그가 자발적인 각성에 의해 깨끗이 놓아 버리고 절제와 불편의 세계로 들어섰다는 데에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두꺼운 책에는, 어떻게 해서 그런 회심과 결단을 내릴 수 있었는지, 그 빼어난 두뇌로 살핀 기억에 따라, 또 (나중에는 도덕적으로 완전무결해지기까지 한)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양심에 기반하여, 상세하고 진솔하며 독자에게 교화적으로 유익한 이 "고백록"까지 저술한 것입니다.
방탕한 젊은이였던 그는 셀 수 없이 많은 여성을 섭렵했으며, 그 중에는 제법 긴 시간 동안 사실혼 관계에 접어들었던 여인들도 있었지요. 책의 역주에도 나오지만 심지어 초기 기독교에서 정통성 있는 교리 확정을 위해 소집된 기관이었던 공의회, 그 중에서도 톨레도 공의회에서는 이러한 사실혼을 오히려 권장하기까지 하는 등, 오늘날의 엄격한 각 교파의 가르침과는 꽤나 거리 있는 태도였습니다. 교회마저 이런 태도였던 데다, 사회적 평판과 부귀를 고루 갖춘 집안의 자제였던 그를 두고, 어느 누가 비난과 고발의 눈길을 주기란 거의 상상하기 힘든 분위기였지만, 그는 스스로 이 시간에 대해 비통한 참회의 기억을 갖고, 소상한 문장으로 이 책 속에 기록합니다.
"한 여인을 쫓아내고, 다시 다른 여인을 들여 스스로를 정욕의 노예로 삼았는데,... 나는 이런 여인들만도 못한 비천한 마음의 소유자였다..." 재미있는 대목(?)이라면, 역시 종교개혁 이후 여러 연구자, 주석자들이, 이런 진솔한 고백을 읽으면서 대단히 당혹스러워했다는 겁니다. "어찌 이런 청춘기를 보낸 이를, 성인이라며 공경하고 신앙의 모범으로 삼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예컨대 남의 여인을 탐내 아끼던 명장의 죽음을 사주하고, 마침내 그 여인에게 죄의 씨앗을 심기까지 한 다윗 왕의 죄과는 어떻게 되는 거겠습니까? 기독교 신자라면 이런 극단적인 죄악의 사례도, "과오는 인간의 몫이로되, 그 용서는 신의 몫이다."라는 원칙에 의해, 통회자의 진정한 눈물을 전제로 다 포용해야 마땅하죠.
역시 최상급의 교육을 받고, 명철한 두뇌를 타고난 인물답게, 그는 자신의 "기억"이 어떤 과정으로 형성되고, 이 "기억"이 궁극적으로 유발하는 참회라는 정신작용에 대해서도 치밀하고 섬세한 문장으로 묘사합니다. "인간의 오감이 두뇌에 정보를 전달하고...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은밀한 구역들이 기억 곳곳에 형성되어.. 사물들 자체보다는 그 심상만이 기억의 영역에 남아, 우리가 불러내면 거기 결부된 가치 판단과 함께 떠오르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교양 있고 감성 풍부한 수필가의 문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살뜰한 기술이며, 자연과학적 지식(그 당시 수준에서) 못지 않게 자신을 이토록 격동시키고 때로는 미칠 듯한 죄책감, 때로는 존재를 초월할 듯한 환희(이는 육욕의 쾌감과는 다르며, 이를 준별하는 건 그가 세속의 환락이란 환락은 다 맛을 본, 극히 드문 케이스이기에 가능하겠습니다)으로 가득차게 된 그 정신의 체험에 한껏 고양되었기에 이런 문장이 가능할 수 있었겠습니다.
과거와 미래와는 달리, 현재라는 시간은 그저 찰나처럼 지나가버리는 모습으로만 존재한다고 그는 말합니다. 이는 동양적 사고와는 차이가 큰 이해인데, 예컨대 우리 동양인들은 자시, 축시 등을 설정할 때도 시간의 한 지점이 아닌, 대략 두 시간 정도의 넉넉한 구간으로 파악합니다(예: 子時라 하면 밤 11시~1시 사이). 하지만 (오늘날 인류가 보편적으로 수용하는) 서양 철학(나아가 자연과학)의 관점에선 그저 1분 1초, 혹은 헤아릴 수 없는 작은 단위의 한 점이며, 여기에서 유명한 제논의 역설도 도출된 것입니다. 대체 포착할 수조차 없는 짧은 순간으로 흘러가버리는 이 "현재"에 갇힐 수밖에 없는 인간, 이 필멸의 삶이란 대체 어디에서 안식과 정당성을 구하겠습니까? 여기에서 그는 모든 환락과 욕구 충족, 사출과 배설의 쾌감 따위가 모두 부질없음을 깨닫고, 영원 불멸의 존재인 신에의 귀의만이 유일한 선택일 수 있음을 잔잔히 표백합니다. 그의 신앙 고백은 이처럼, 겪을 수 있는 모든 진세(塵世)의 체험을 다 치른 후에 도달한, "놀아 본 형"의 믿을 수 있는 가이드입니다.
"폰티키아누스가 들려준 두 사람의 회심 이야기"는 다분히 동양적 처세의 미덕, 혹은 도교적(당시라면 아직 도교가 채 교단으로 성립하기 시작할 무렵이었겠습니다만) 각성의 어느 경지를 떠올리게 합니다. "이 모든 지식을 체득하고, 무리 앞에서 성취를 뽐내고, 많은 재산을 모으고, 정적들을 지혜로 물리친 후, 우리에게 남는 것이란 과연 뭘까? 기껏해야 관료들의 우두머리가 되어, 황제의 첫째 가는 벗으로 남음이 고작이 아닌가?" 청담 사상을 입에 올리던 위진남북조기의 귀족 자제들과 하는 말에 별 차이가 없죠. 아마도 여러 경로로, 아우구스티누스 자신이 불교 등 여러 동양 사상을 접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가 "결정적 회심" 전까지만 해도 마니교(기독교와 불교의 콜라보)에 심취했었던 사실 역시 이를 방증합니다.
하지만 그는 과감히, 일신교의 절대적 표준과 영원성이 주는 신앙의 세계로 오롯이 자신을 던졌고, 이후 다시는 다른 종류의 회심을 겪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 책 곳곳에서 모세의 기술(주로 구약의 모세 5경 지칭)을 인용하는데, 믿음이 미숙하고 영적인 토대가 약할수록 "위에는 물리적 의미의 하늘, 밑에는 역시 창조된 땅" 하는 식으로, 성경의 말씀을 자신이 지각하는 물질 세계에 한정, 혹은 유추하여 믿기 십상이라고 합니다. 이런 믿음은 인식과 신앙을 물질계에 한정해 버리는 오류에 빠지기 쉬우며, 그는 이런 이들을 가리켜 "믿음의 날개가 약해 마치 어린 병아리처럼 채 날지도 못하고 바로 마음이 꺾여 버릴 수 있는 이들"이라며 측은해합니다. 무엇이 그리스도의 가르침인 줄 모르고, 그저 현재의 자신이 편안해할 수 있는 가장 빈약한 뜻으로 새기면서, 자칭 독실한 신자임을 내세우는 이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 책은 그런 이들에게, 근원의 안식을 얻기 위해 어떤 미망에서 벗어나야 하는지 통렬히 깨우치고 있습니다.
인간과 종교 중 무엇이 먼저인지 알 수 없지만 종교는 인류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치면서 상호 발전해 왔습니다. 다신교였던 로마제국은 유일신을 믿는 기독교를 국교로 정한 이후 사회 속에 정착되면서 유럽과 미국은 현재도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를 믿고 있습니다. 중동에서 시작된 이슬람교는 중동 뿐만 아니라 북아프리카, 중앙아시아, 동남아시아에 이르기까지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러는 동안 각각의 사회가 확장되면서 공존 보다는 충돌이 더 많았고, 이러한 충돌의 배경에는 서로 상이한 종교도 원인 중 하나로 작용하였습니다. 종교가 사고에 미치는 영향이 크기 때문인지 자신과 다른 종교에는 배타적인 성향이 있는데 그래서 종교 자체와 종교 문학에 대해서도 관심이 덜한것 같아요. 하지만 종교를 떠나 접근한다면 볼 수 있는 작품들의 훨씬 늘어나네요.
유럽 역사에서는 기독교를 빼놓고 이야기 할 수 없는데 그 과정에서 수많은 뛰어난 미술, 음악, 문학 작품들이 탄생하였습니다. 문학에서는 천로역정, 신곡과 함께 기독교인이 되기까지 한 개인의 삶과 이에 대한 고백을 담은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로 빼놓을 수 없네요. 처음에 기독교가 아니었던 사람이 기독교로 귀의하면서 인생 전반에 대한 회개와 뒤늦게 기독교인이 된 것에 대한 후회를 담고 있기 때문에 기독교에서는 종교를 알리는데 좋은 작품이 된 것 같네요.
처음에는 기독교인이 아니었던 어린 시절의 이야기부터 담담하게 풀어가고 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사춘기에는 기성 세대에 반항하는 것이 멋있어 보이고, 또 이유없이 반항을 하고 싶어하나봐요. 존경받는 철학자인 아우구스티누스도 그랬다는 것이 놀랍네요. 다른 사람의 배나무에서 배를 훔치는 것은 범죄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주변 친구들과 어울리려면 나쁘다는 것을 알지만 그쯤은 해야하고, 훔친 배도 거의 먹지 않고 돼지에게 던져주는 등 재미를 위해 했습니다.
또 당시에 결혼도 하지 않고 육신의 욕정에 이끌려 여자와 동거를 하고 아이까지 낳습니다. 기독교 관점에서는 납득하기 어려운데 기독교인이 아니었던 사람들에게는 큰 문제는 아니었나 봐요. 아우구스티누스도 마찬가지고 두 명의 여자와 결혼없이 동거를 하며 욕망을 채웠습니다. 존경받는 위치에 있었던 사람이 이러한 것들을 고백해서 책으로까지 남기기가 쉽지 않았을것 같은데, 그만큼 기독교인이 된 이후에 이전의 삶을 얼마나 후회하는지 다른 사람들에게도 본보기로 알려주는 것 같아요.
마니교를 믿으면서 현란한 수사법에 이끌렸지만 마침내 마니교를 떠나 기독교인이 됩니다. 이후에는 사람들이 궁금해 할만한 것들에 대한 내용들을 설명하고 있네요. 세계는 어떻게 창조되었는지, 무엇으로 창조되었는지, 언제 창조되었는지 등 기독교가 아닌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질문들에 대한 답변을 쓰고 있습니다. 평소에 궁금하게 생각했던 것들인데 말씀으로 창조되었다고 하지만 과학적으로 설명하기는 어렵기 때문에 책을 읽으면서도 어려워서인지 잘 이해가 되지는 않네요.
이 책을 통해 기독교를 믿지 않던 사람이 어떻게 기독교인이 되었고, 기독교는 무엇인지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으로 알 수 있었습니다. 천년이 훨씬 넘은 시기이지만 자료가 잘 남아 있었기에 이렇게 책으로 볼 수 있어서 당시의 아우구스티누스와 교감하는 기분이 드네요. 특히 영어 등 다른 외국어로 번역한 것을 다시 번역한게 아니라 라틴어 원전을 직접 번역한 것을 읽을 수 있어서 좋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