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히 2015년 9월 6일부터 와인을 좋아하게 됐다. 일반적으로 누군가(무언가)를 좋아할 때, ‘나는 몇 월 며칠부터 그 사람(물건)을 좋아할 거야’라고 결심하지는 않는다. 좋아한다는 것은 일종의 돌발 사고다. 열대 섬에 몰려오는 태풍처럼, 그 순간은 예기치 않게 다가온다.
--- p.17, 「좋아한다는 것은 일종의 돌발 사고다」 중에서
“와인 그거 떫고 쓰던데 무슨 맛으로 먹나?” 예전에 딱 내가 하던 말이다. 큰맘 먹고 몇만 원대 와인을 구매해 기대감에 부풀어 개봉한다. 와인 잔이 없어서 종이컵에 부어 소주나 맥주 마시듯 들이켜는데, 이런 젠장! 더럽게 비싼 게 떫고 쓰기만 하다. 뭐하러 이렇게 맛없는 술을 비싼 돈 주고 마실까? 역시 와인 마시는 놈들은 죄다 허세구나! 허탈감에 푸념한다.
--- p.26, 「무슨 맛으로 먹느냐 묻는다면」 중에서
이 세상에는 각양각색의 호구가 있지만 적어도 대한민국에서 특대형 호구는 와인을 정가에 구매하는 사람일 것이다. 오히려 와인을 ‘정가’에 판매하는 곳이 존재하는지 반문하고 싶다. 와인 정가란 놈이 얼마나 터무니없는지는 마트의 와인 할인 장터 때 매장 직원을 통해 받는 할인 리스트로 알 수 있다.
--- p.35, 「와인 정가, 터무니없는 그 이름」 중에서
와인 마시는 행위도 그러하다. 와인, 안주, 사람의 세 요소가 조화를 이뤄야 최상의 시너지가 나온다. 와인 위주로 즐기겠다며 치즈를 손톱만큼 떼어먹으며 마셔대면, 속 버리고 다음 날 머리 아프다. 마트 나무 박스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1만 원대 ‘저렴이’ 와인도 제짝 음식을 만나면 종종 충격적인 시너지를 낸다.
--- p.50, 「와인, 안주, 사람의 삼위일체」 중에서
비닐을 먹고 살지 않는 이상, 우리가 섭취하는 모든 음식은 잘못 보관하거나 오래되면 상하기 마련이다. 와인도 예외가 아니어서 기대감에 부풀어 마셨다가 변질된 맛에 당황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더욱 안타까운 예는, 상태가 안 좋은 와인을 마시고 있음에도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다. 경험이 적으니 와인은 원래 그런가 보다 한다(내가 그랬다). 와인은 오래 묵힐수록 좋은 거 아니냐고 무턱대고 얘기하는 이들이 있다. 마트에서 1만 원대 와인을 구입해서 5년 묵혀 드셔보시라. 오래 묵힐수록 맛있다고 한 사람한테 화가 솟구칠 것이다.
--- p.80, 「오래 묵힐수록 더 맛있을까」 중에서
와인 마실 때 적정온도 유지가 중요하다고 강조하면 술 하나 마시는데 뭐 그리 번거롭냐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하지만 그렇게 얘기하는 이들도 맥주나 사이다는 냉장고에 넣어 시원하게 마시고, 차갑게 식은 소고기미역국은 꼭 데워서 먹는다. 미지근한 맥주, 따뜻한 사이다, 차가운 소고기미역국은 솔직히 별로 아닌가. 와인 역시 적정온도 범위를 벗어나면 풍미가 급격하게 꺾인다. 레드 와인, 화이트 와인, 스파클링 와인에 따라 시음 적정온도가 다른 것도 유념해야 할 사항이다. 대략 레드 와인은 섭씨 15~20도, 화이트 와인은 10~13도, 스파클링 와인은 5~9도 정도다.
--- p.88, 「미지근한 맥주, 차가운 소고기미역국」 중에서
와인 글을 쓰니 내가 와인을 많이 마실 것이라 지레짐작하는 이들이 많다. 일주일에 한 번 집에서 아내와 와인 한 병을 반씩 나눠 마시는 정도다. 간혹 일주일에 두 번 마시기도 하지만 흔하지는 않다. 과도한 음주는 건강에 좋지 않으니 이 정도 수준으로 조절한다. 한번 생각해보시라. 와인을 너무 좋아한 나머지 책까지 쓰는 사람이 고작 일주일에 한 번 마시니, 그 시간이 얼마나 소중하겠나.
--- p.94, 「의외로 인생은 단순하다」 중에서
마르크스주의 책 쓰는 사람이 와인 글도 쓰니 나보고 강남좌파란다. 서울 금천구 독산동 사는 사람 보고 강남좌파라니! 하긴 한강 남쪽 맞구먼. 그런 지리적 의미라면 강남좌파 인정. 근근이 생계를 유지하는 사회과학 작가 주제에 와인과 사랑에 빠지면 안 되는 거였다. 그 탓에 고통스러운 선택이 일상이 되었다. 1년에 몇 번 없는 떼루아 와인 아울렛 와인 장터. 애호가에게는 와인을 합리적인 가격에 구매할 수 있는, 그래서 생일보다 더 기다려지는 그런 날이다. 2,000개가 훨씬 넘는 할인 리스트에서 호주머니 사정을 고려해 총액 20만 원 아래로 선별하는 과정은, 사랑하는 대상에 대해 포기하는 법부터 익혀야 하는 비극의 주인공 같은 정서를 느끼게 만든다.
--- p.121, 「아뿔싸! 와인이 변질되었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