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사전』으로 시인의 언어를 담은 산문집을 선보였던 김소연 시인이 지난날에 떠난 여행 이야기를 담은 첫 여행산문집을 출간했다. 시인이 소환해낸 자유롭고 따뜻했던 시간들은 기억 속 행복했던 여행을 떠오르게 한다. 지금 당장 떠나지 못하는 답답한 일상에 더 없이 큰 위안을 주는 책. - 에세이 MD 김태희
시인 정지용은 여행을 ‘이가락離家樂’이라 했다. 집 떠나는 즐거움. 나는 이 말을 좋아한다. 우선 근사한 여행지를 전제하지 않아서 좋다. 그저 집을 떠난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그 뜻이 좋다. 집을 떠나면 우선 나는 달라진다. 낯선 내가 된다. 낯설지만 나를 되찾은 것 같아진다. 내가 달라진다는 게 좋다. 달라질 수 있는 내 모습을 확인하는 일이 무엇보다 좋다. --- p.32, 「낯선 사람이 되는 시간」 중에서
길을 잃었다고 생각하다니, 나는 다시 산책을 시작했다. 그곳 사람들에게서 배운 그들의 인사말을 하면서. --- p.101, 「길을 잃고서 만난 사람」 중에서
아무에게도 알려주지 않겠다고 마음먹은 시골 마을을 발견했다. 강아지를 산책시키는 할아버지와 자그마한 와사비소금 한 병을 소중하게 포장해주는 할머니를 만났다. 그런 할아버지와 친구가 되는 그런 할머니로 늙어가야지 하며 빙그레 웃었다. 집에 돌아와 냉장고 속 어묵을 꺼내고 무 반토막을 꺼내어 멸치 우린 물에 넣었다. 팔팔 끓여 푹 익힌 어묵과 무를 와사비소금에 찍어 먹었다. 그 다음날도 먹었다. --- p.122, 「시골 마을」 중에서
폐허에는 언제나 온전치 못함에서 발생되는 아름다움이 아니라 아름다움의 이면을 간직한 아름다움이 배어 있다. 훼손된 채로 세월 속에 간직되어 있는 그 자체가 주는 아름다움. 비극과 참담과 세월. 이 세 개의 꼭짓점이 먼 곳에서 한데 만나는 소실점 같은. --- p.160, 「이끼 순례」 중에서
결속력 없이도 행할 수 있는 다정한 관계, 목적 없이도 걸음을 옮기는 산책, 무용한 줄 알지만 즐기게 되는 취미생활, 이름도 알지 못하는 미물들에게 잠깐의 시선을 주는 일, 아무 생각도 하지 않은 채로 멍하니 앉아 있는 시간, 싱거운 대화, 미지근한 안부. 식물처럼 햇볕을 쬐고 바람을 쐬는 일. 인연이 희박한 사람, 무관한 사람, 친교에의 암묵적 약속 없는 사람과 나누는 유대감. 이 수수한 마주침을 누리는 시간이 나는 회복이라고 생각한다. 그 시간에 사람은 목소리와 표정과 손길로 실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 p.245, 「수수한 마주침」 중에서
아무것도 아닌 장면을 오래 들여다볼 때가 많다. 하염없이. 생각 없이. 아무것도 아닌 장면인 줄 알지만 그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 도저히 믿기지가 않는 것이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은 내가 아는 말 중에 가장 기만에 가까운 말이 되어간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도무지 아무것도 아닐 수는 없는 것들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는 것이 요즘 나의 주된 업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