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뢰는 모든 사회적 삶에 필요하지만 지식의 진보와 지적 분업을 중심으로 조직되는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더더욱 필요하다. 실제로, 지식이 계속 생산됨에 따라 지식이라는 공동 능력 가운데 각 개인이 통제할 것으로 기대받는 부분은 감소한다. 즉 우리가 많이 알게 될수록 그에 비례해서 내가 아는 부분의 비중이 줄어드는 것이다. 몇 세기 전에는 한 개인이 과학적 지식 전체를 통제할 수 있다고 기대하는 게 가능했다. 하지만 오늘날 그런 건 어림도 없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이 말인즉슨, 지식의 진보라는 토양 위에 세워진 사회가 역설적으로 위임에 의한 신념 사회가 되고 이에 따라 신뢰 사회가 된다는 뜻이다.
--- p.20
대체 이런 음모론이란 무엇일까? 바로 ‘모든 것이 연관되어 있다’, ‘우연히 일어나는 일은 없다’, ‘세상일은 보이는 것과는 다르다’ 등의 표현으로 규정될 수 있는 하나의 편집증적 세계다. … 가장 엉뚱한 주제부터 가장 우려스러운 주제까지 망라하는 음모론적 상상계. 우리가 세상을 제대로 보는 것을 방해하는 힘이 존재한다는 주장, 사람들이 우리에게 숨기는 것이 있다는 주장을 그곳에서 볼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음모론적 상상계는 어디에나 침투해 있는 불신이 또 다른 모습으로 표현된 것이라 할 수 있다.
--- p.26
우리는 가설, 신념, 뉴스 등 정보를 제공하는 상품을 바탕으로 세계관을 형성한다. 인지 시장이란 이러한 정보 상품이 확산하는 가상의 공간을 나타내는 이미지다. 이 책에서는 정보 시장보다는 인지 시장이라는 이미지를 주로 사용할 예정이다. 정보라고 하면 레스토랑 주소나 개인의 전화번호도 포함될 수 있지만, 이 책에서 말하는 인지 상품은 정보를 조직해서 진실과 선, 혹은 둘 중 하나에 관한 명시적 또는 묵시적 담화로 만드는 행위를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 p.39
확증 편향은 모든 종류의 신념을 확고하게 만든다. 대단한 신념은 물론이거니와 제아무리 사소한 신념(예를 들면 미신적인 버릇이 그렇다. 우리 마음속에 이런 버릇들이 자리 잡는 이유는 우리가 그런 의식이 가져다줄 행복한 일들만을 간직하려고 노력하기 때문이다)이라 해도 말이다.
--- p.53
인터넷에서는 매우 특이한 방식으로 정보의 상호작용이 일어난다. 특히 공급의 구조화는 주제에 따라서는 수요자보다 공급자의 동기에 훨씬 더 많이 좌우된다. 그중에서도 상반되고 경쟁적인 공급을 조직할 기술적 능력이 있는 공급자들이 특히 그렇다. 분명히 말하건대, 신념을 신봉하는 사람들은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자신의 관점을 옹호하고 거기에 시간을 할애하려는 동기가 대체로 더 강하다.
--- p.95
미디어의 경쟁은 본디 민주적인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런 경쟁이 역효과를 낳지 않는 건 아니다. 미디어 간의 경쟁이 치열해지면 주로 정보의 보급 속도가 추진력을 얻는데, 이것이 반드시 지식의 보급을 가속화하지는 않는다.
--- p.162
셰익스피어의 작품〈오셀로〉의 비극적 결말, 아내를 자기 손으로 목 졸라 죽이는 오셀로의 모습은 누구나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도 처음에는 젊은 아내에게 푹 빠져서 조금도 그녀를 의심하지 않는다. 그런데 배신자 이아고가 오셀로의 머릿속에 의심을, 아내 데스데모나의 불륜에 대한 신념을 주입하려고 든다. 이아고가 그렇게 한 이유에 대해서는 여전히 전문가들의 의견이 분분하지만, 아무튼 이처럼 이아고가 오셀로의 의심 능력을 ‘부추기는’ 것과 비슷한 방식으로, 쉽게 잘 믿는 대중의 마음을 선동하는 자들도 맹목적으로 여론을 향해 작살을 던진다. 그러면 여론은 처음에는 재미있어하면서 이 선동자들의 터무니없는 결론을 대체로 믿지 않는다. 그러나 많은 경우, 전부 다 거짓일 수는 없다고 받아들이게 된다…. 그러면 우리가 익히 알기 시작한 어떤 문이 열리는 것이다.
--- p.230~231
참여민주주의가 유발할 수 있는 역효과가 명백한 걸림돌이 되자, 이에 대처하기 위해 참여민주주의는 대부분 숙의민주주의로 옷을 갈아입었다. 숙의민주주의라는 용어는 미국 의회 의원들의 업무를 규정하기 위해 조지프 베세트 교수가 1980년에 제안한 표현에서 탄생했다. 숙의민주주의 옹호론자들의 기본 사상은, 명확한 입장 표명이 가능하도록 충분한 협의가 이루어지지 않는 한, 결정권을 지닌 모임에서 저절로 지혜가 생겨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반대로 이 모임에서 입장 표명을 목표로 교육과 자유로운 숙의를 보장한다면 이런 지혜를 만날 수 있게 된다. 숙의민주주의 이론에서는 “평등한 시민 사이의 자유로운 공적 숙의 과정이 정치적 정당성의 토대가 된다.
--- p.239~240
인지 시장 혁명을 없었던 일로 백지화하거나 숙의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에 입마개를 씌우고 침묵을 강요하는 것은 불가능한 동시에 우리가 속한 사회의 근간이 되는 가치들을 혼란에 빠뜨리는 일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쉽게 믿는 자들의 민주주의에서 지식의 민주주의로 옮겨가는 방법을 구상하는 것이 쟁점이라 해야겠다. 그런데 이 쉽게 믿는 자들의 민주주의가 도저히 억제할 수 없을 정도로 전면적인 과정을 통해 나타나고 있다면 과연 무엇을 해야 할까?
--- p.318~3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