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가 번역과 같다면, 즉 어떤 것을 읽고 이해한다는 것은 ‘나’라는 콘텍스트 안에서 그것이 다른 것들과 새로운 관계 맺기를 통해서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되는 것에 다름 아니라면, 모든 사유는 근본적으로는 다를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하면, 모든 읽기와 사유는 차이를 만들어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러한 한에서 사유는 곧 ‘다르게 사유하기’를 의미하게 된다. 요컨대, 생각이라는 것의 본성 자체가 ‘다르게 생각하기’일 수밖에 없다.
--- p.36~37
비판적 사고는 그 필연적 계기로서 차이, 사건, 충격, 갈등을 갖는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와 다른 것들과의 대면과 충돌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평화는 편안함을 주지만, 그 안식은 우리를 정체하게 만들기도 한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비판적 사고는 용기를 요청한다. 낯설고 두렵고 불편한 것을 마주하고자 하는 용기 말이다.
--- p.59
우리가 흔히 ‘프랑스 인권 선언’이라고 부르는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은 제목부터 몇 가지 의문을 제기한다. 선언은 왜 권리의 주체를 인간이나 시민 중 하나로 통일하지 않고 양자를 병기했을까? 인간의 범주와 시민의 범주는 같은가, 다른가? 다시 말해, 인간이 아닌 시민은 존재할 수 없지만, 시민이 아닌 인간은 존재할 수 있는가, 없는가? 만약 인간과 시민이 다르다면, 양자를 구분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인간의 권리와 시민의 권리의 목록에는 차이가 있는가? ‘homme’(영어로 번역하면 man)는 ‘femme’(영어로는 woman)의 반대말로서 남성만을 가리키는가, 아니면 여성과 남성을 포함한 모든 인간을 지칭하는가? 시민은 남성형 명사(citoyen)로 표기되었는데, 여성형 명사로서의 시민 또는 여성시민은 성립할 수 있는가?
--- p.65
프랑스혁명의 역사는 근대 민주주의에서 시민의 지위, 시민권市民權, citizenship의 경계가 단지 우연한 누락이 아니라, 적극적 배제를 통해 확립되었음을 보여준다. 당시 시민의 자격은 사회적으로 구성된 남성성 -이성적이고, 독립적이며, 병역을 수행할 수 있는 육체적 힘- 과 등치되었다. 그 결과, 남성과 다른 여성의 속성 -임신, 출산과 같은 생물학적 능력, 그리고 오랫동안 여성과 결부되어온 사회문화적 특징들, 예컨대 감성, 의존성, 양육과 보살핌의 의무- 은 시민의 자격에 미달하거나 그것과 대립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당시 남성 혁명가들은 시민의 지위를 견고하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시민의 자격을 갖추지 못한 이들을 정치의 영역으로부터 추방할 필요가 있다고 믿었다.
--- p.90
우리는 일을 원할 뿐만 아니라 그 일을 통해서 세상과 소통하고 성장하기를 원한다. 그런데 노동은 항상 그것이 실행되는 특정한 체제 하에서 이루어진다. 따라서 노동은 그러한 체제나 문화에 따라 상이한 방식으로 작동되고 규정된다. 이때 인간의 본질적 활동으로서의 노동의 의미는 왜곡되거나 소외될 수 있다. 즉 노동이 세상과 소통하고, 세상과 나를 만들어가는 적극적인 활동이 아니라 욕구 충족을 위해 해야만 하는 힘든 노고로 전락할 수 있다. 실제로 이것은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이 경험하고 느끼는 것이기도 하다. 일을 해야 하지만, 우리는 일하기가 싫다. 우리의 얼굴과 몸에는 매일 기계처럼 해야만 하는 낯선 노동에 따른 피로의 흔적이 새겨져 있다. 우리는 다른 것을 하고 싶지만 그럴 시간이 없다. 영화나 텔레비전을 보고, 친구들을 만나 술과 커피를 마시며 수다를 떨기도 하고, 가끔 여행을 떠나기도 하지만, 그것들은 일에 지친 피로를 풀고 노동의 현장으로 다시 돌아가기 위한 것일 뿐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그것들은 노동의 연장선상에 있다. 그렇다면 나의 자아실현, 세상과의 진정한 교류의 기회는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가? 세상이 어떤지 관찰하고 생각할 수 있는 시간, 다른 사람들의 사정을 살펴볼 수 있는 마음의 여유, 생존에 꼭 필요하지는 않지만 우리가 잘 그리고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생각해보아야 하는 것들, 정의와 아름다움 등등에 대해서 토론하고 이야기할 수 있는 시간은 어떻게 찾아야 하는가?
--- p.131~132
사실 자동화와 로봇화가 산업 생산의 전 과정에서 진행된다면, 이는 생산과 소비의 과정에서 차지하는 임금 노동자의 위치를 급격하게 변화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사회 전체적으로 따져봤을 때, 산업 생산 체제에서 자동화와 로봇화로 인해 노동자들의 일자리가 대체되어서 사라지는 만큼 노동자들의 임금을 대신하거나 보완해주는 조치가 이루어져야 한다. 이러한 이유로 유럽의 국가들에서는 자동화된 공장에 로봇세를 징수하는 문제나 혹은 노동자들인 일반 국민들에게 일정 수준 이상의 소득을 세금을 이용하여 보장하는 ‘기본소득’ 제도에 대한 논의를 진행하고 있다.
--- p.2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