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러웠다. 인터뷰나 강연 때마다 “쓰레기 중 제일 더러운 쓰레기가 바로 인간쓰레기입니다”라고 떠벌이고 다녔는데, 정작 그게 나 자신을 향한 소리인 줄을 몰랐던 것이다.
운동도 역사도 성숙해져야 할 의무가 있다. 생태적인 인간이 생태적인 메시지를 전하고, 삶이 운동이 되고, 투쟁이 사랑으로 이어져야만 한다. 그러지 못하고 어느 한 곳에 머문다면 그것은 똑같은 죽음이요 썩음이요 쓰레기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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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과 좀 지내보니 장난이 아니다. 늘 전쟁이다. 도저히 ‘싱글벙글’ 할 수 없는 상황이 생긴다. 점차 화도 내고 잔소리를 해대니까, 요놈들이 “선생이 어찌 맨날 투덜거리요?” 해서 ‘투덜쌤’이 되었고, 더 심하게 잔소리를 하니까 아예 ‘쌤’자도 빼먹고는 ‘투덜이’, ‘삐돌이’ 한다.
하나원을 퇴소한 아이들과 만나다보면 어떤 놈은 무슨 선생이 애들 담배나 사주고 같이 PC방이나 간다고 나 같은 건 선생 아니란다. 그러니 ‘마형’ 하잔다. 그래라 싶어 놔뒀는데, 이제는 아예 노골적으로 이름만 부른다. 「스타크래프트」를 하는데도 저희들끼리 편을 짜고는 “마서쿠이도 어디 낑가줘라. 컴퓨터랑 붙여주면 되지”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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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 학교 시험을 경험해 보는 것이 필요할 것 같아 고입 검정고시 문제로 시험을 쳤다. 그런데 십 분이 지나도록 아무도 시험 문제에 손도 못 대고 쩔쩔매고 있는 것이다. 해서 개별적으로 지도하려고 “시험 문제에 궁금한 점이 있으면 조용히 손만 들고 있으면, 쌤이 가서 도와주께” 했더니, 모든 아이들이 일제히 손을 드는 것이다. 아예 하나도 모르겠단다.
뭘 모르냐고 물어보니, 진짜 아이들 말처럼 ‘하나도’ 모르는 것이다.
우선 사지선다에 대한 개념부터 없다. 북조선 시험은 전부 주관식이라는 것이다. ‘넷 중에 제일 맞는 답을 하나 골라 쓴다’라는 남한 기준에서 지극히 상식적인 사실 하나 설명하는 데만 삽십 분이 걸리니 볼짱 다 본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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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일이가 하고 싶은 말은 결국, ‘내가 잘못했다는 건 아는데, 너도 잘못한 게 있으니 너무 까탈스럽게 그러지 말라’는 것이다. 북조선이 상대적으로 열등한 국력에도 불구하고 미국 등 전 세계 열강들을 상대로 벼랑 끝 외교 전술을 펴고 있는 바탕에는 이러한 민족적 기질이 있다. 같은 상황에서 남한의 학생들은 당면한 현실을 모면하려고 사과만 하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북조선 청소년들은 사과는 하더라도 상대방의 시시비비를 반드시 그리고 철저히 따지는 성향이 있다. 변증법에서 정반합正反合의 논리처럼, 기본적으로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잘못은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이 깔려있는 것이다.
--- p.51
수업 중 성혁이가 갑자기 수업을 듣지 않겠단다. 듣기 싫다는 것이다. 내가 간디학교에서 조금 배워서 그 정도는 감당이 된다. 미안하다고 했다. 내가 못 가르쳐서 네가 그런거니까 괜찮다고, 교실 옆 음악실에서 혼자 놀라고 했다.
통 큰 인격을 보였다고 뿌듯해 하며 쉬는 시간에 음악실에 가 보았는데, 놈이 없다. 한참을 찾아보니 생활관 제 방에서 퍼질러 자고 있었다. 교육 중 생활관 출입 금지라는 하나원장 특명을 간단히 깨버린 것이었다. 아직 수업이 많이 남아 음악실에서 자라고 타일렀는데, 자기는 죽어도 제 방에서 자야 한다는 것이다. 그럼 차라리 청소년반 말고 성인반으로 가라고 했더니, 자기는 청소년인데 왜 성인반을 가냐고 따지는 것이다. 하도 황당하고 기가 막혀 “너 나하고 원수졌냐?”고 했다.
“내가 왜 쌤이랑 원숩니까? 사람 어째 보오. 머저리요? 원수도 정이 있어야 원수요. 알지도 못하는 게.”
--- pp.69-70
스물네 살 은숙이는 기독교인이 아니다. 그런데도 아주 잘 나가는 부흥회 전문 강사다. 천안에서 직장을 다니는데, 교회 부흥회는 물론 각종 통일·반공 강연을 통해 월급보다 더 많은 부수입을 올린다고 자랑한다. 은숙이뿐만 아니라 탈북청소년 다수가 교회에서 이와 비슷한 일을 하고 있다.
예수님이 어떤 분 같냐고 물어보니, 교회 잘 나가면 먹고 살게 해주고 천국 가게 해주는 분이라 한다. 나 보고도 예수 믿어야 돈도 벌고 장가도 갈 수 있다며 자기가 잘 아는 교회에 같이 다니자고 한다. 손 붙잡고 기도하잔다. 할 말이 없어진다.
--- p.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