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토니나는 종종 이렇게 재미 삼아 자기를 비우고 동물의 감각에 자신의 감각을 일치시키면서, 애정 어린 호기심으로 동물들을 대하고 돌보았다. 주파수를 맞춰주는 이런 태도에는 동물들을 편안하게 해주는 무언가가 있었다. 날뛰는 동물들을 달래고 진정시키는 안토니나의 신기한 능력은 동물원 사육사들은 물론 그녀의 남편까지도 감탄할 정도였다. 얀은 엄밀히 말하자면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면서도 그녀의 능력이 이상야릇하고 신비하다고 인정했다. 얀은 열렬한 과학 신봉자였지만 동물을 다루는 문제에서는 안토니나에게 거의 주술적인 공감 능력이라 할 만한 “형이상학적인 파동”이 있다고 믿었다. --- p.26
폴란드의 수도가 불타는 와중에도, 일부 동물들은 기적적으로 살아남았고 이중 다수가 동물원을 탈출해 다리 건너 구시가지로 들어갔다. 동물원이 텅 비고 동물들이 바르샤바 거리를 활보하는 동안, 창가에 서서 밖을 내다볼 만큼 용기 있는 자, 혹은 집을 잃고 밖을 떠돌 만큼 불운한 자는 성서에나 나올 법한 기이한 광경이 눈앞에 펼쳐지는 것을 보았다. 바다표범이 비스와 강둑을 따라 어기적어기적 걷는가 하면, 뒷골목을 배회하는 낙타와 라마는 포석 때문에 자꾸 발굽이 미끄러져 애를 먹었다. 타조와 영양이 포식자인 여우·늑대와 나란히 종종걸음을 치고, 개미핥기는 벽돌 위를 황급히 달리면서 ‘해치, 해치’ 소리를 질렀다. 털이나 가죽만 얼핏 보이는 물체들이 공장과 주택을 지나 재빨리 달아나고, 귀리· 메밀· 아마를 키우는 외딴 경작지를 향해 질주하고, 개천으로 황급히 뛰어들고, 계단통이나 창고에 숨는 모습도 여기저기서 목격되었다. 진흙탕에 빠진 채로 하마·수달·비버가 살아남았다. 곰·유럽들소·프셰발스키말·낙타·얼룩말·스라소니·공작을 비롯한 여러 조류·원숭이·파충류도 용케 살아남았다. --- p.73
국내군은 런던에 본부를 둔 폴란드 망명정부가 통솔하는 폴란드군의 국내 비밀 부대로 세포조직, 무기저장고, 수류탄 제조공장, 학교, 안전가옥, 연락책, 무기·폭약·무선수신기를 만들 실험실까지 갖춘 강력한 조직이었다. 국내군 소위였던 얀은 동물원을 제3제국이 손대지 않고 그대로 두고 싶어할 무엇으로 위장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 독일에는 먹여야 할 군대가 있었고 독일군은 돼지고기라면 사족을 못 썼으므로, 얀은 루츠 헤크에게 쓰러져가는 동물원 건물들을 활용해 대형 돼지농장을 해보면 어떻겠냐는 이야기를 꺼냈다. 폴란드같이 황량한 기후에서 돼지를 기르려면 제대로 된 건물과 부지가 있어야 할 테고, 예전 동물원 직원들에게 다소의 수입도 안겨줄 터였다. 바르샤바 유대역사연구소에서 얀이 증언한 바에 따르면, 돼지에게 먹일 음식물 찌꺼기 수거를 빙자하여 게토의 “친구들에게 돈·베이컨·버터를 가져다주고, 이런저런 메시지도 전해줄” 요량이었다. --- p.114~115
1940년 여름. 지하운동조직에서 보내는 ‘손님들’을 기다리는 자빈스키 부부는 전화나 편지는 물론 작은 속삭임에도 바짝 긴장하곤 했다. 잠시 몸을 숨겼다가 이동하는 유대인은 유목민이지 빌라의 정착민은 아니었다. 그들은 잠시 휴식을 취하며 재충전한 다음, 최종 목적지인 어딘가로 떠났다. 외모가 아리아인처럼 보이고 독일어를 구사하는 유대인은 위조신분증을 받아 순조롭게 이동했다. 이동이 원활치 않은 사람들은 동물원 우리와 빌라에서 몇 년을 보내기도 했다. 빈 동물 우리에서 동시에 최대 50명 정도 지낸 적도 있었다. 반다 엥글레르트를 비롯한 여러 ‘손님’이 부부의 오랜 지인이자 친구였고, 안토니나는 이들을 ‘준가족’으로 여겼다. 이들을 감춰주는 것이 위험한 일임에는 분명했다. 하지만 생명체를 감추는 적절한 위장전술을 고안해내는 데 동물원 사육사보다 능한 자가 있겠는가? --- p.142
고통을 초월하여 온전한 정신을 유지하는 방편으로 랍비 샤피라가 아름다움·신성함·자연에 대한 명상을 권했다면, 안토니나는 빌라를 사향쥐·수탉·산토끼·개·독수리·햄스터·고양이·새끼여우 같은 천진난만한 생명들로 채웠다. 이들이 빌라 사람들을 평범하면서도 진기한 변함없는 자연의 세계로 데려다주었다. 서로 다른 종들의 요구와 리듬이 어울린 빌라의 독특한 생태계와 일상에 집중하다 보면 마음의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동물원 주변에는 여전히 나무와 새와 정원이 있었고, 향긋한 린넨 꽃들이 향낭처럼 주렁주렁 달린 고운 풍경이 펼쳐졌다. 날이 저물면 아름다운 피아노 선율이 하루의 대미를 장식했다.
이러한 감각의 어우러짐은 나치의 소름끼치는 만행을 경험한뒤 몸과 마음이 피폐해진 손님들에게 더욱 절실한 것이 되었다. --- p.208~209
은밀함, 신의 섭리, 그리고 무엇보다 밤이면 누워서 잠에 곯아떨어져도 좋다는 믿음처럼. 잠재의식 속에서 사람을 안심시키는 것들. 게토는 실로 많은 사람들에게서 그 미묘한 일상의 신비주의 의식들을 빼앗아버렸다. 마우리치는 자신의 책과 자신을 실재하는 사람으로 만들어준 증명서들 가까이에서 잠들었다. 천진난만한 햄스터와 함께. 무엇보다 사랑하는 막달레나와 같은 지붕 아래서. 사랑하는 사람이 죽지 않았으며, 편안히 머물 공간이 있고, 자신의 심장이 아직 따뜻하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비로소 희망을 느꼈을 것이라고 안토니나는 생각했다. 어쩌면 “게토에 살면서 잃어버린 기쁨과 환희의 순간, 감정”까지 되살아났으리라고. --- p.262
히틀러는 봉기 소식을 듣고 히믈러에게 가장 무자비한 군대를 보내 모든 폴란드인을 죽이고, 도시를 구역별로 산산이 부순 다음 폭파하고 불을 지르고, 복구가 불가능하게 불도저로 밀어버리라고 지시했다. 유럽의 다른 점령지에 대한 경고로 본때를 보여주라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하인리히 히믈러는 범죄자·경찰·전쟁포로로 구성된 친위대에서 가장 잔인한 부대들을 선별했다. 봉기 5일째 되는 날, 나중에 ‘검은 토요일’이라고 부르게 되는 이날, 전투로 단련된 비정한 친위대와 독일 군인들이 폭풍우처럼 들이닥쳐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3천 명을 학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