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도 그 곡은 철수가 연습한 레슨 곡 중 하나였다. 철수는 가슴이 설레기 시작했다. 그러나 노래가 시작되고 얼마가 지나지 않아 그는 무언가에 머리를 맞은 것 같은 충격에 휩싸였다. 레슨을 받는 동안 원곡과는 다른 자신만의 스타일로 완성했다 믿었던 그 곡은, 듣다 보니 바로 유학파 선생의 스타일이었던 것이다. 그간 철수는 그녀의 스타일을 카피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30대 중반의 여성 보컬을…….
레슨 중엔 부분적으로만 듣고 따라 했었기 때문에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하지만 무대에 선 유학파 선생의 공연을 보며 철수는 자신이 연습했던 호흡, 바이브레이션, 발성, 심지어 표정까지도 그녀와 매우 닮아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 pp.28-29
‘노래하는 것이 정말로 제일 재미있는가?’
‘노래하는 것이 정말로 제일 잘하는 일인가?’
현 상황에서 철수가 제일 잘할 수 있는 것이 노래뿐인 건 사실이었다. 노래를 뛰어나게 잘 불러서라기보다는, 할 줄 아는 게 노래 말고는 별로 없는 쪽이 가깝긴 했지만 말이다.
정작 문제는 철수 스스로가 노래하는 것을 더 이상 재미있어 하지 않는다는 것인데 그나마 다행인 건 노래가 아니라 노래를 하면서 맺는 사람들과의 관계와 일에 대한 염증이라는 점이었다. 그는 여전히 혼자 기타를 치며 노래 부르는 걸 제일 즐거워했다.
철수는 장고에 장고를 거듭했다.
‘노래를 지금보다 더 잘하고 싶다.’
‘그러려면 난 아직도 누군가가 필요한데…….’
‘노래하는 걸 포기할 순 없어!’ --- p.57
“허, 참……. 이눔아, 노래란 게 그렇게 배워서 되는 거면 왜 노래 못하는 가수가 있겄냐! 밥 든든히 먹었으면 찬찬히 소화시키고 돌아가!”
“선생님…….”
간절한 눈빛의 철수를 노인은 애써 외면했다.
“니가 그동안 노래를 배웠는데도 잘 못 부른다는 거 보면, 너한텐 재능이 없는 겨! 그리고 배우기만 한다고 다 되는 것도 아니니까 돌아가!”
철수는 바닥에 넙죽 엎드렸다. 그리고 간절함과 진실함으로 다시 노인에게 호소했다.
“선생님, 저 갈 곳도 없고 오라는 곳도 없습니다. 그나마 노래 말고는 할 줄 아는 것도 없는데 이대로 내려가서 그 노래마저 못 하게 되면…….”
철수는 아랫입술을 물어가며 울부짖듯 자신의 절박함을 토로했다.
“재능이 없어서 노래가 늘지 않아도, 올바르게 배워서 해볼 수 있는 게 있다면 후회 없이 연습하고 노력해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도 잘 안 됐을 때, 제 재능이 없다는 걸 인정하든 탓하든 하고 싶습니다, 선생님…….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봐야, 나중에 노래를 못 하고 살게 되더라도 지금 같은 마음속 응어리는 없지 않겠습니까?” --- p.78
“네, 선생님. 그럼 미국 흑인들 음악이 대부분의 대중음악 장르의 뿌리고, 또 그 뿌리가 발전하기 시작한 초기 형태의 음악이 블루스, 재즈라고 우선 생각하면 되겠네요.”
“그리여, 맞았어! 그려서 그 블루스, 재즈에서 시작된 미국 흑인들 음악을 ‘아프로-아메리칸Afro-American 음악’이다, 이렇게 말한다.”
“아……, 아프로-아메리칸 음악.”
“그런데 말이지, 이 아프로-아메리칸의 음악은 100년 넘는 시간 동안 다양한 형태의 장르로 진화를 해 왔는데, 한 가지 변하지 않고 오히려 더 강력해진 것이 있다. 그게 바로 그네들이 원래부터 몸속에 가지고 있던 음악적 언어여. 그루브!”
“아……. 그러고 보니까 전 사실 그 그루브라는 말뜻도 제대로 모르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선생님. 그럼 아프로-아메리칸 음악의 그루브를 제 몸으로 익혀야 제대로 된 대중음악을 할 수 있단 말씀이시네요. 전에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던 대중음악의 표준적인 억양…….”
“맞았어!” --- pp.102-103
“그려, 그럼 메트로놈 2Two, 4Four에만 울리게 맞춰놓고, 나랑 듀엣으로 해보자. 서른 두 마디 곡이니까 여덟 마디씩 주고받는 거여.”
“알겠습니다, 선생님.”
철수가 메트로놈을 50(실제 BPM은 100)으로 맞추고 여덟 마디를 먼저 시작했다. 그리고 이어진 노인의 노래, 노인의 짧은 여덟 마디 노래를 들으며 갑자기 철수는 무언가 설명하기 어려운 복잡한 생각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날이 설 대로 선 그의 귀에 분명히 들리는 노인의 기술적인 빈틈에도 불구하고, 그의 감정의 깊이는 너무도 선명해서, 한겨울임에도 푸른 초원 위로 펼쳐진 따뜻한 봄꽃의 향연이 느껴지는 듯했다.
노래가 끝났고 철수는 무슨 말을 먼저 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선생님 어떻게…….”
“느끼기는 느낀 거여?”
“네, 선생님. 분명 슬프고 차가운 내용의 곡이었는데…….”
“물론 앙상블을 위해서는 너한테 내가 맞춰 불렀어야 되는 게 맞겄지만, 훈련이니까 니가 한번 느껴보라고 일부러 그렇게 한 것이니까 이해혀라, 잉?”
“선생님 전 어차피 이것저것 신경 쓰느라 아무 표현도 못 했습니다. 근데 어떻게 그렇게 하신 겁니까?”
“내가 그냥 그렇게 표현하고 싶었던 거여. 그리고 이것이 이제부터 니가 연습해야 될 것이기도 하고 말이지. 또 한편으론 이 훈련이 어쩌면 노래라는 본질의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잉?”
--- pp.272-2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