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백년 동안의 고독>은 역사적 의미가 아주 강하게 부각되어 있는 소설이다. 이 작품은 콜롬비아의 과거 역사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콜롬비아의 역사는 곧 식민지 종주국들의 지배와 억압으로 점철된 비극적인 역사나 크게 다름없었다. 라티 아메리카 대부분의 나라들이 그러하였듯이 콜롬비아 또한 오랫동안 스페인의 지배와 통치 아래에서 패배와 좌절을 경험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16세기 중업부터 콜롬비아는 뉴그라나다라는 스페인 식미지 가운데에서도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고, 19세기 초엽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스페인의 억압에서 해방되어 독립 국가로 발돋움하였다.
마콘도를 처음 건설한 호세 아르카디오 부엔디아는 본디 콜롬비아 내륙 지방에서 담배를 경작하던 부지런한 본토인이었다. 그러나 그는 스페인계 상인 가문의 우르슬라 이구아란을 만나 결혼함으로써 처음으로 외지인과 관계를 맺는다.
이 작품에는 우르슬라 말고도 「카탈로니아의 현인」이라고 불리는 스페인 사람이 한 명 등장한다. 내란중 마콘도에 들어온 그는 이 마을이 폐허가 되기 직전까지 서점을 경영하면서 이 마을에서 산다. 책더미 속에 묻혀 세 상자에 달하는 많은 양의 원고를 집필하는 그는 콜롬비아에 대한 스페인의 정신적 지배를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비록 잠시나마 콜롬비아는 스페인 말고도 영국의 지배를 받기도 한다. 영국의 지배는 해적 프랜시스 드레이크경을 통하여 나타난다. 우르슬라 가족이 리로아차로 피신하여 온 것도 바로 드레이크경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서였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더욱이 정치적인 차원에서도 <백년 동안의 고독>은 콜롬비아가 직면하고 있는 구체적인 사회적 현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자본주의가 본질적으로 도입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마콘도 마을은 목가적인 낙원과 같은 평화스러운 마을이었다. 그러나 미국의 자본주의가 들어오면서부터 평화스럽기 그지없던 이 마을은 점차 폭력과 타락에 시달린 채 멸망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이 작품에서 서구 자본주의는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언던 시기에 시작하여 전쟁이 끝날 때까지 콜롬비아에 진출한 미국의 바나나 회사의 형태로 그 모습을 드러낸다. 마콘도에 바나나 농장을 건설한 미국 회사들은 원주민 노동자를 고용하여 막대한 돈을 벌어들였다. 그러나 낮은 임금과 열악한 작업 환경 등으로 착취당하던 노동자들은 마침내 극한적인 파업을 단행하였고, 미국 회사 편을 드는 정부는 파업에 맞서 노동자들을 대량으로 학살하기에 이르렀다.
적어도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이 소설은 서구 제국주의의 식민지 수탈 행위를 폭로하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입각한 고발 소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엄밀히 따지고 보면 부엔디아 가문의 몰락과 쇠퇴는 단순히 외부의 힘 탓만으로 돌릴 수 없다. 왜냐하면 부엔디아 가문의 내부안에 이미 몰락과 쇠퇴의 씨앗이 뿌려져 있기 때문이다.
마콘도 마을에서 '가장 뛰어난 두뇌의 소유자'로 존경을 받으며 근면하게 일하던 호세 아르카디아는, 집시가 전하여 준 문명의 도구에 크게 고무된 나머지 거의 미치광이에 가까운 사람이 된다. 그는 족장으로서의 모든 일상적 의무와 책임을 포기한 채 오직 무익한 연구에만 몰두한다. 심지어 그는 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하여 과학적 실험을 하기도 한다.
한편 서른두 차례나 반정부 봉기에 참여하여 그때마다 패배하는 그의 아들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영웅적 혁명가라기보다는 오히려 '어릿광대'나 '단순한 모험가'와 크게 다르지 않다.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은 추상적 이념을 위하여 많은 생명을 희생시키기를 주저하지 않는 그야말로 비인간적인 인물이다. 이 점과 관련하여 이 소설의 저자는 「그는 손으로 만져 볼 수도 없는 이념들을 가지고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에 도달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은 젊은이들에게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폭력뿐」이라고 가르치면서 자유파의 승리를 위하여 정부군과 싸울 것을 독려한다. 20년에 걸치 내란이 끝난 다음 그는 사회와의 모든 교통을 차단한 채 골방에 들어앉아 황금 붕어 장식을 만들며 이른바 '삶 속의 죽음'을 영위한다. 이러한 현상은 비록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의 형인 호세 아르카디오 부엔디아를 비롯하여 부엔디아 가문의 다른 후손들에게서도 마찬가지로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본다면, '좋은 나날' 또는 '좋은 시대'라는 뜻을 지니는 '부엔디아'라는 스페인 이름은 이 작품에서 반어적으로 사용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근친 상간으로 상징되는 도덕적 타락은 부엔디아 가문의 몰락을 재촉하는 견인차 구실을 한다. 그들은 근친 상간을 수없이 되풀이 한다. 유전학적 관점에서 볼 때에 동종 교배가 열등한 자손을 낳듯이 부엔디아 가문의 사람들 또한 근친 상간이라는 동종 교배를 통하여 점점 우생학적으로 열등한 자손을 낳는다.이 작품의 마지막 부분에 으르러, 이모와 조카 사이인 아우렐리아노와 아마란타 우르슬라가 관계를 맺어 마침내 돼지 꼬리가 달린 자손을 낳기에 이른다. 이렇게 기형아를 낳음으로써, 5대에 걸친 부엔디아 가문은 선조들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치욕적인 종말을 고하는 것이다.
그들이 자폐적인 순환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은, 호세 아르카디오 부엔디아을 제외한 나머지 부엔디아 가문 사람들이 한결같이 자기에 고유한 이름다운 이름 없이 오직 선조의 이름 가운데에서 오직 일부만을 되풀이하여 물려받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뒷받침된다.
20세기 초엽까지만 하더라도 서양 문학은 서유럽과 미국이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경제적 발전과 정치적 패권에 힘입어 제1세계 국가에 속한 작가들이 세계 문단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은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20세기 중엽에 들어오면서부터 사태는 전혀 달라지게 되었다. 이때부터 서유럽이나 미국 작가들 대신에 라틴 아메리카 작가들이 세계 문단에서 주도권을 행사하였기 때문이다. 그동안 주변부에 머무른 채 기껏해야 '타자(他仔)'의 위치밖에는 차지하지 못하던 라틴 아메리카 작가들이 서서히 세계 문학의 중심부로 이행하였다. 말하자면 세계 문학은 이제 라틴 아메리카에서 문자 그대로 '붐'을 맞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많은 문학사가들은 라틴 아메리카에서 나타난 이러한 문예 부흥 현상을 두고 '붐' 문학 또는 '붐' 소설이라는 용어로 표현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라틴 아메리카에서 주로 활약한 '붐'소설가들로서는 콜롬비아의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파라과이의 아우구스토 로아 바스토스, 페루의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쿠바의 기예르모 카브레라 인판테, 멕시코의 카를로스 후엔테스, 칠레의 호세 도노소 등이 유명하다. 다양한 국적, 다양한 문학관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그들은 한결같이 라틴 아메리카 문학을 세계 문학의 굳건한 반열에 올려놓은 데에 크게 이바지한 작가들이다.
이러한 '붐' 소설가 가운데에서도 가장 주목받아 온 작가가 바로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다. <백년 동안의 고독>(1967)으로 1982년도 노벨문학상을 수상하여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고, 그후 <족장의 가을>(1975)을 발표하여 작가로서의 위치를 확고하게 굳혔다. 그리고 <예견된 죽음의 연대기>(1981)를 발표하여 작가로서 여전히 건재하다는 사실을 과시하고 있다. 이제 마르케스는 현대 라틴 아메리카 문학을 대변하는 가장 대표적인 작가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백년 동안의 고독>을 논의할 때마다 '마술적 리얼리즘'이라는 꼬리표가 마치 그림자처럼 늘 따라다닌다. 좁게는 리얼리즘의 한 유형, 넓게는 세계 인식의 한 방법이라고 할 수 있는 마술적 리얼리즘은 문자 그대로 현실과 환상, 사실과 허구가 초현실주의적 수법으로 교묘하게 결합되어 있는 형태를 말한다.
집시들이 마콘도 마을에 가져온 '끓고 있는 얼음'처럼, 일종의 모순 어법에 해당하는 마술적 리얼리즘은 역사적 · 문학적으로 큰 혼란을 겪어 온 라틴 아메리카 작가들이 창안해 낸 독특한 문학적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이러한 장치나 세계 인식을 통하여 그들 특유의 경험을 예술적으로 형상화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이 작품에서 마술적 리얼리즘은 여러 행태를 통하여 나타난다. 예를 들어 작중 인물들 가운데에는 죽은 사람들이 다시 나타난 마치 살아 있는 사람처럼 활약하는가 하면, 어떤 사내아이는 부모의 말을 듣지 않다가 뱀이 되어 버린다. 부엔디아 집안의 한 선조는 돼지 꼬리를 달고 이 세상에 태어난다. 레베카라는 인물은 흙과 벽에서 긁은 석회를 먹고 산다. 한 작품 인물이 항해 도중 바다에서 바다용을 잡았는데, 그 뱃속에는 십자군 병정의 투구와 허리띠 그리고 무기가 발견되기도 한다. 난로에 얹어 둔 우유가 끓지 않아 주전자 뚜껑을 열어 보았더니 그 안에는 구더기가 득실거린다. 그런가 하면 어떤 작중 인물들은 담요나 양탄자를 타고 하늘 높이 날아가 이 지상에서 영원히 사라져 버린다.
한 비평가는 마르케스 문학의 특성을 '초월적 지방주의'라는 용어로 요약한 바 있다. 마르케스의 작품은 좁게는 콜롬비아, 넓게는 라틴 아메리카라는 특정한 지방에 뿌리를 박고 있으면서도 지방성을 초월하는 보편적인 문학이라는 말이다.
이러한 점에서 마르케스는 그가 지대한 영향을 받은 윌리엄 포크너와 아주 비슷하다. 포크너의 작품 또한 미국 남부 지방이라는 구체적 공간에 뿌리를 두고 있으면서도, 실제로 포크너가 다루는 문제는 좀더 보편 타당성 있는 삶의 문제, 그의 표현을 빌린다면 '서로 갈등하는 인간 마음의 여러 문제'를 설득력 있게 형상화하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소설은 이제 죽음을 맞이하였다는 말이 심심치 않게 들리고 있다. 신의 죽음을 선포한 프리드리히 니체처럼 서유럽과 미국의 몇몇 작가들은 문학의 죽음을 선포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마르케스를 비롯한 라틴 아메리카 작가들은 제1세계의 작가들이 이미 죽었다고 선포한 소설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소설 장르는 죽음을 맞이하기는 커녕 오히려 불사조처럼 잿더미를 헤치고 되살아났다는 사실을 그들은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소설의 죽음과 관련하여 체코슬로바키아의 작가 밀란 쿤데라는 이렇게 말한다. 「소설의 종말에 대하여 말하는 것은 서구 작가들, 특히 프랑스인들의 기우에 지나지 않을 따름이다. 동유럽이나 라틴 아메리카 작가들에게 이러한 말을 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나 다름없다. 책꽂이에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년 동안의 고독>을 꽂아 놓고 어떻게 소설의 죽음을 말할 수 있단 말인가?」그렇다면 마르케스는 바로 그동안 사망 상태에 놓여 있던 소설을 다시 살려낸 언어의 마술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