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는 두려움을 극복시키면서 내 마음 그대로를 전달해 주었다. 단 몇 분의 음악은 9000킬로미터의 거리로 떨어져 있는 언어와 국경을 순식간에 사라지게 했고, 이렇게 음악은 나와 바깥세상을 연결해 주는 가장 멋있는 다리이자 고유한 언어가 되었다. 내 영혼은 피아노를 통해 세상과 대화하게 되었고, 비로소 나는 진정으로 음악을 만났다. 내게 피아니스트는 그저 막연한 꿈이 아닌 뚜렷한 사명으로, 직업이 아닌 존재 이유로 다가왔다. 음악이 ‘유니버설한 언어’라는 표현은 언어의 개념을 뛰어넘어 ‘생존 키트’로 다가왔고, 부당한 인종차별을 직접 당하면서 본질적으로 우리는 모두 동등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피부로 느꼈다. 좁은 우물 안 개구리가 갑자기 끝도 없이 넓은 대서양을 보며 정신이 활짝 열린 것이다. 진짜 여행은 한국과 프랑스를 가로지르는 9000킬로미터가 아니라 머리에서 가슴까지 33센티미터의 여행이었다.
--- pp.28~29
이렇게 내 개인적인 음악 여정을 낱낱이 펼쳐보이는 이유는, 정작 콩쿠르가 장악하고 있는 한국 클래식 음악 세계에서 나는 콩쿠르 없이 전 세계적인 커리어를 갖고 있는 유일한 한국 음악인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진정 가능하다는 것을 전달하고 싶다. 콩쿠르 없이, 경쟁의 밀림 속에서 싸울 필요도 없이 나만의 유일무이한 커리어를 개척할 수 있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고 전달하는 것이다.
--- p.53
‘다른 이와 나누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자신의 예술을 다른 사람과 공유하고 소통해야 한다. 나만 있는 방 안에서 내 귀에만 들리는 음악을 한다거나, 나만 보는 그림을 그리거나, 혼자만 읽을 글을 쓰는 것은 그 작품이 아무리 세기의 걸작이라고 할지언정 ‘자기만족’의 의미밖에 되지 않는다. 물론 그것만으로 스스로 행복감을 느낀다면 충분하겠으나, 사실 음식만 해도 내가 사랑과 공을 들여 만든 요리를 나 혼자 먹는 것보다는 다른 누군가와 함께 즐길 때 시간과 정성이 빛을 보고 더욱 보람 있다. 만약 내 요리로 상대방이 행복하다면 그 요리의 가치와 의미는 숫자로 헤아릴 수 없고 따질 수도 없는 마음의 양식이 될 것이다.
--- p.89
그래서 직접 인터스텔라 오케스트라를 창립했다. 각 단원의 별처럼 찬란한 고유성을 지닌 오케스트라와 언제 어디서든 원하는 음악을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자유롭고 독립적으로 연주하며 관객과 나누기 위해서다. 그리고 더 나아가 지휘자와 감독의 위치에서 오케스트라를 이끌며 젊은 음악인에게 데뷔무대를 만들어 주고 있다.
--- pp.95~96
세상이 원하는 것을 따라가기 전에 내가 진정으로 원하고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그리고 외부 요소나 찬사에 목말라하지 않고 휘둘리지도 않으며 자신의 예술에 믿음을 갖고 집중할 수 있는 정신력을 길러야 한다. 그런 후에 전문성과 대중성이 공존하는 예술을 지향해야 대중이 납득한다.
--- p.99
나의 삶을 돌아보면, 내가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게 내 예술의 양식이 되었다. 아니, 결국 음악을 위해 감탄하고 놀라고 느끼고 경험했다고 해야 할까.
눈에 보이는 풍경, 사람들의 표정과 행동, 고양이의 유연함, 날카로운 손짓발짓조차 나의 피아노 테크닉과 음악적 상상으로 이어지고, 뜨거운 물에 덴 나의 입술, 반사적으로 피하는 모션, 달콤한 아이스크림, 길거리에서 지나친 어린 소녀의 미소, 분함을 표출하는 가게 상인, 사랑의 절대적임, 태연하게 사라지는 노을, 남겨진 아쉬움. 모든 것이 나의 음악 속에 담긴다.
--- p.135
악보에는 작곡가 마음의 5분의 1도 표현되어 있지 않다. 작곡이란 음악 기호들을 사용해서 아이디어나 마음을 적기에 그 음표들은 사실 기호라는 한계에 갇혀 있다. 음표와 음표 사이, 그리고 음표 뒤를 읽어 더 넓은 우주와 작곡가의 마음, 한 인간의 마음을 읽는 것이다. 마음이 곧 우주고 우주가 곧 마음이다.
--- p.136
하얀 도화지에 그림을 그리듯 침묵 속에서 만들어지는 음악은 인종, 국경, 문화, 종교, 전통, 성별, 나이를 초월해 사람을 하나로 모으고, 함께 감동하고, 공감하게 하는 순수 언어다. 그 아름다운 울림 안에서 우리는 수많은 레이어들을 벗어내고 존재의 근본적인 자신을 마주하게 된다. 그때 찰나가 영원이 되면서 우리의 숭고한 본질의 여운이 우주를 감싼다.
--- p.145
큰 행복만 중요한 게 아니다. 행복이 있기 전에 기쁨이 있고, 기쁨이 있기 전에 만족감이 있다. 그저 사소한 것에 감사하고 기쁨을 끌어내는 것. 그것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행복의 비결을 손에 거머쥘 수 있다. 강렬하게 현재를 느끼고 현재로 존재하는 것이다.
--- p.188
소위 사회의 틀 안에서 정해진 기준에 완벽하게 적합한 인간이 존재한다고 한들, 우리에게 결국 가장 아름답고 완벽해 보이는 사람은 자신이 사랑에 빠진 대상이다. 불완전함을 완벽함으로 보이게 하는 것이 바로 사랑의 힘이고, 사랑이야말로 완벽의 원천이다.
--- p.2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