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는 우리에게 어떤 종류의 보상을 해줄까? 아마도 가장 분명한 건, 제멋대로인 어린 시절에서 정숙하고 평범한 성인으로 이끈다는 목표 아래 행동을 규율하고 인간의 발달을 관리하는 처벌 규범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준다는 것일 테다. 실패는 경이로운 무정부 상태를 일정 부분 보존하고, 성인과 아동, 승자와 패자 사이의 뚜렷하다고 여겨지는 경계를 흐린다.
--- p.18~19
페미니즘의 측면에서 보면 실패는 종종 성공보다 더 나은 선택이었다. 여성의 성공이 항상 남성적 기준으로 재단되고 젠더적 실패가 종종 가부장적 이상에 부합해야 한다는 압박으로부터 해방됨을 뜻할 때, 여성 되기에 성공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예상치 못한 즐거움을 안겨줄 수 있다. 그동안 수많은 페미니스트가 바로 이 메시지를 다양한 방식으로 전해왔다.
--- p.21
진지하게 여겨지고자 하는 욕망이야말로 이미 증명된 지식 생산의 길을 답습하도록 강요하는 힘이다. 나는 그런 지식 생산의 길 주변에 몇 가지 우회로를 그려보려 한다. 진지함이나 엄밀함 같은 용어는 학계에서든 다른 상황에서든 학문적 올바름을 뜻하는 암어로 사용되는 경향이 있다. 그런 용어들은 지식에 관한 승인된 방법론에 따라 이미 알려진 것을 공식화하는 훈련 및 학습의 한 형태를 나타내지만, 시각적 통찰이나 분방한 상상력은 감안하지 않는다. 어떤 종류든 간에 훈련은 벤야민식의 지식 접근법, 즉 지도에 표시되지 않은 길을 따라 “틀린” 방향으로 걸어가기를 거부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그것은 명확히 밝혀진 영역에 머물러 있겠다는 뜻이며, 출발하기도 전에 가야 할 방향을 정확히 알고 있다는 뜻이다.
--- p.25
프레드 모튼과 스테파노 하니는 (…) 「대학과 지하공동체: 일곱 가지 테제」에서 (…) 비판적 지식인, 학자, 그리고 ‘비판적 학계 전문가들’을 혹독하게 비판한다. 모튼과 하니에게 비판적 학계는 침략적인 전문화에 대한 해답이 아니라, 동일한 도구와 적법화 전략을 사용해 그것을 연장시켜 ‘전문 교육의 동맹’이 되고자 하는 것일 뿐이다. (…) 그러면 대학의 지하공동체는 무엇이 되고자 하는가? 시험 성적과 평가 시스템에 얽매이지 않는 일련의 지적 실천을 통해 탈주하는 지식인들로 구성된 비전문가 집단을 구성하고자 한다. 이 비전문가화의 목표는 폐기하는 것이 아니다. 모튼과 하니는 탈주하는 지식인을 이것의 제거와 폐기, 저것의 건립과 재건립에 반대하는 존재로 설정한다. 그것은 “교도소의 폐기보다는 교도소나 노예제, 임금제를 가질 수 있는 사회의 폐기, 그러므로 뭔가를 제거하기 위한 폐기가 아닌, 새로운 사회를 건립하기 위한 폐기다.”
--- p.29~30
저급 이론이란 무엇이며, 그것은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는가? 왜 그것을 고급 이론의 타자로 위치시키는 이분법을 뒤엎는 대신 승인하는 듯 보이는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가? 저급 이론은, 이론이란 그 자체로 완결된 것이 아니라 “다른 무언가를 향하는 우회로”라는 스튜어트 홀의 유명한 개념에서 내가 추출해낸 사고 모형이다. 다시금 우리는 길 찾기보다 길 잃기의 유용성을 생각해볼 수 있으며, 그럼으로써 벤야민식 산책 혹은 상황주의자들의 표류derive처럼 계획되지 않고 기대되지 않은, 즉흥적인 도보 여행을 고안해내야 한다.
--- p.44
실패가 떠올리게 하는 부정성의 어두운 심연을 다루는 것으로 시작해, 애니메이션에서 탐구되는 행복하고 생산적인 실패로, 그다음에 무용함, 불모성, 공허함, 상실, 일반적인 부정적 정동, 자발적 퇴행의 양태 등과 연관되는 실패의 더 어두운 영역으로 논의를 이어갈 것이다. 따라서 책의 전반부는 실패의 의미를 이 세계에서의 한 가지 존재 방식으로 제시하며, 후반부는 실패가 비존재이기도 하다는 사실, 그리고 이러한 비존재와 자발적 퇴행의 양태가 지식과 관계를 달리 맺을 가능성을 제안한다는 사실에 대해 논한다.
--- p.59
관객이 많이 드는 성인 대상의 주류 영화들 중에는 혁명적 활동이라는 위험한 영역을 건드릴 배짱이나 대담성을 지닌 경우가 거의 없다. (…) 숨어 있는 대안을 실제로 발견할 수 있는 영역은 애니메이션뿐이라고 한다면 너무 대담한 주장일까? (…) 새로운 형태의 애니메이션과 오늘날 대안적 정치학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 벤야민이 애도했듯 과거에는 그럴 수 없었지만, 이제는 애니메이션이 유토피아 기획을 지탱해낼 수 있을까?
--- p.68
내가 여기서 다루는 새로운 형식의 애니메이션 등은 모두 인간과 동물, 기계, 삶과 죽음, 생동과 소생, 생활, 진화, 되기와 변형되기를 가르는 인위적 범주의 의미와 용어, 위치를 질문하고 또 바꿔놓는다. 또 그것들은 인간 예외주의를 거부하고, 인간을 다중적 존재 양태의 세계에 단단히 붙들어 맨다.
--- p.75
대안적 존재 방식에 관한 꿈은 종종 유토피아적 사고와 혼동된 다음, 근대 권력의 속성을 나이브하거나 단순하게 혹은 뻔하게 오해한 것으로 치부되곤 한다. 하지만 다른 존재 방식, 다른 인식 양태, 정의와 불의가 다르게 배치되는 세계, 돈과 노동, 경쟁 대신 협력과 교역, 공유를 더 중시하는 존재 양태가 가능하리라는 믿음은 모든 종류의 지식 프로젝트를 활성화하며, 이는 불필요하거나 나이브한 것으로 치부되어서는 안 된다.
--- p.112
멍청함은 일반적인 지식 형성만큼이나 깊이 젠더화되어 있다. 그래서 남성의 무지가 때로 남성적 매력의 일부로 여겨지는 반면 여성의 무지는 결핍을 나타내고, 그에 따라 어쨌거나 남성에게 특권을 부여하는 사회질서가 정당화된다. 사회는 여성의 멍청함을 처벌하는 한편으로 그것을 자연화하지만, 백인 남성의 멍청함은 용서할 뿐 아니라 잘 알아차리지도 못하게 한다. 백인 남성성은 지배, 지혜, 거대서사와 가장 자주 연관되는 정체성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영화나 소설에서 백인 남성 인물이 어리석거나 무지하게 그려지더라도 이내 그것은 취약함이라는 유리한 형태로 바뀌어 전반적으로는 그가 매력을 가진 것으로 반전된다.
--- p.117~118
기억과 망각에 관해 다르게 생각해보고 싶다는 말은 사실상 우리가 진보와 성과를 표시하는 데 사용하곤 하는 불가피하고 유기체적인 듯 보이는 모델에 대한 대안을 찾아야 한다는 뜻이며, 변화가 어떻게 일어나는지, 일어난 적은 있는지 주의 깊게 봐야 한다는 뜻이다. 우리는 어떻게 변화를 확인하고 알아차리는가? 변화가 모든 것을 끝장냈다거나(죽음) 변화가 아무 의미 없는 것이었다고(근본적으로 바뀌지 않음) 말하지 않고서 그것을 알아차리는 게 가능할까? 옛것을 버리지 않고서 새것을 알아차릴 수 있을까? 시간과 변혁의 여러 구조를 동시에 고수할 수 있을까?
--- p.148~149
데리다는 「아카이브 열병」이라는 글에서 죽음충동을 망각과 연결하며 죽음충동이 “침묵 속에서 작동하고, 결코 그 아카이브를 남기지 않는다”고 말한다. 망각이라는 무정부주의적 공간 혹은 죽음이라는 반(反)아카이브는 아카이브 열병을 추동하는데, 데리다에 따르면 이는 (말 그대로) 보수적 잠재력과 혁명적 잠재력을 모두 가진 기억에의 의지다. 아카이브 열병은 가장 전통적인 형태일 때 “근본악”에 가깝다.
--- p.1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