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양우랑 이야기를 해보니까 좀 사연이 있는 것 같아. 친구가 죽었다고 했었잖아. 그 친구가 양우한테 좀 유일했던 것 같은 느낌이 들더라고. 내 착각일 수도 있는데, 그냥 양우 보면 좀 옛날 나 보는 것 같아. 어딘가 허전하고 텅 빈 느낌이 있어.
--- p.71
하나도 안 궁금하다고 했지만 실은 양우가 무척 궁금했다. 왜 항상 혼자 다니는지, 어디를 그렇게 다니는지, 왜 자꾸 이런 우연으로 제 눈앞에 나타나는지, 손에 든 그것들은 다 뭐고, 귀의 문신은 무엇인지. 어디에 사는지. 어떤 사람인지. 의심과 관심의 경계가 모호했다.
--- p.79
양우는 늘 단정한 머리에 맑고 산뜻한 느낌이 드는 착장을 하고 있었다. 반바지가 유독 짧은 게 이해가 가지는 않았지만, 나중에 가서는 그 길이가 양우에게 퍽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머리만 보아도 그랬다. 대부분 왁스를 덕지덕지 바르거나, 그렇지 않으면 앞머리를 길게 길어 정갈하게 커튼을 걷어내듯 반으로 가르고는 하는데, 양우는 눈썹을 살짝 가리는 앞머리에 길지 않은 구레나룻, 귀에서부터 목까지 깔끔하게 이발이 되어 둥그스름한 머리를 하고 있었다.
--- pp.81-82
말동무를 해준다던 바다는 기괴한 소리를 내며 어떤 동물의 소리인지 맞혀보라고 했다. 하나도 모르겠다, 하고 대답하며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제가 흉내낸 동물의 이름과 생김새를 알려주었다. 그런 것들은 바다만 아는 것이 아니었고 검색하면 다 나오는 것이었는데, 바다가 들려주면 새로운 사실처럼 흥미롭고 재미있었다. 그런 순간이 모여 바다는 양우에게 알고 싶은 세계가 됐다.
--- p.118
찰싹, 찰싹. 바다의 파도는 이런 소리를 내. 솨아아, 하고 밀려와서 하얗게 부서져 포말을 만들지. 그렇게 사라진 파도는 흘러서 다시 파도가 되어 밀려와, 바다가 있는 한 사라지지 않지. 해안에 가보는 게 버킷리스트라며. 물비늘이 이는 바다를 네가 꼭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 pp.122-123
짙은 초록색으로 점철된 나뭇잎이 무성하게 흔들리는 모습이. 그 너머로 보랏빛이 되어가는 하늘이, 그리고 그 아래에서 저를 지켜보는 명원이 눈에 담겼다. 낯설면서도 익숙한 것 같은 노래가 가랑비처럼 양우를 적셨다. 먹먹하던 귀를 뚫고 흘러드는 노래 때문인지, 이 세상에서 혼자만 듣고 있는 소리 때문인지 묘하게 이 순간 속의 자신이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그런 느낌 속에서 눈을 마주하는 명원을 보고 있자니 모든 순간을 함께하던 바다가 떠올랐다.
--- p.147
“이렇게 하면 사, 랑, 해, 이렇게 되는 거지.”
고개를 갸웃한 양우가 노트를 가져와 들여다봤다. 실선이 그어져 ‘11’이 ‘사’로 ‘26’이 ‘랑’으로 ‘611’이 ‘해’로 보인다는 주장이었으나, 아무리 봐도 억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 pp.187-188
기명원의 뮤직 박스, 케이스를 열어 부클릿을 펼쳤다. 굳은 수정액 위에 적은 ‘사랑’이라는 글자가 유독 눈에 띄었다. 좋아하는 친구가 사탕 목걸이를 걸어주지 않아서 눈물을 보였던 어린 명원을 생각하자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났다. 사랑 노래를 즐겨 듣고 부르는 명원, ‘사랑’이라는 글자를 잘못 써서가 아니라 더 잘 쓰고 싶어서 수정액을 사용했을 것 같은 명원, 사랑으로 시작해 사랑으로 끝날 것 같은 명원의 세계. 명원은 이 세계에 남아 더 큰 사랑을 품겠지.
--- p.227
작별할 땐 대부분 그간 상대에게 느꼈던 감정을 고백해. 이건 인사가 아니야. 고백이지 그러니까 마지막 고백을 해 양우야.
--- p.244
너한테 정이 많이 들었나봐. 정든 세계와 작별하는 일은 너무 아쉬워. 이 세계는 곧 너고, 나는 너를 만나러 온 것 같아. 영원하다는 말은 너무 거창하지만, 네가 준 시간을 잊지 않을게 영원히.
--- p.244
친구사이, 빨리빨리, 사랑해, 양우, 사랑 노래를 그렇게 부르면서도 사랑한다고 고백해본 적이 없었다. 사랑이란 감정은 거창하고 꼭 그게 불멸할 것 같아서 머나먼 미래의 일인 줄만 알았는데, 암호로 가득한 종이를 보니 이 순간이 사랑이었음을 알게 됐다. 지난 계절을, 양우가 있던 모든 순간이 전부 사랑으로 변해 있었다. 도둑맞은 제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던 양우를 발견했던 그 밤까지.
--- p.2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