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서 왔니, 왜 왔니, 무슨 일을 하니? 이곳에 온 이래로 내게 돌아오는 질문은 늘 비슷한 것들뿐이었다. 어쩌면 그것은 내가 이국의 언어로 할 수 있는 말이 적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표현되지 않는 수많은 이야기의 부스러기들이 언제나 내 안을 둥둥, 떠다녔다. 그것을 눈치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는 지칠 때까지 걷다가 멈춘 채 카페나 레스토랑 안에서 웃으며 이야기하는 한 무리의 사람들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 p.23 「거짓말 연습」중에서
나는 말을 마쳤다. 오랜만에 내 가슴에서 빠져나간 말들이 공중으로 흩어지는 모습을 나는 천천히 관찰했다. 내 말이 가닿았는지 부인은 다 알아들었다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녀가 알아들었을 리가 결코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아니, 알았기 때문에 마음이 놓였다. 거울을 보지 않더라도 나는 내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케이크는 달고, 부드러웠다.
--- p.26 「거짓말 연습」중에서
성당은 촛불이 일렁이며 만들어내는 빛의 그림자와 스테인드글라스를 통과한 형형한 빛의 조각들이 그려놓은 무늬들로 아름다울 뿐이었다. 그 순간, 갑자기 어디선가 오르간 소리가 들려오더니 사람들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목소리가 빚어내는 울림이 높은 대리석 천장을 공명시켰다. 전혀 들어본 적 없는 그 곡조는 사람과 사람 사이를 천천히 가로지르며 흘러갔다. 물줄기처럼 유유히 흘러가는 화음. 그 장엄하고 우아한 화음을 듣다보니 이 도시에 온 이후 처음으로, 르블랑 부인을 찾아가고 싶은 욕망이 일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말하고 싶었다. 푸르비에르는 참 아름답군요.
--- p.29 「거짓말 연습」중에서
나는 사춘기를 지나는 동안 종종 이국의 뜨거운 햇볕에 그을린 젊고 탄탄한 사내의 팔뚝이 하얗고 가는 엄마의 허리를 끌어안는 상상을 했다. 네 아버지가 그날 밤 내게 그 먼 곳에서는 모래바람이 분다고 했단다. 그 바람의 이름은 할라스라더구나. 얼마나 아름다운 이름이니. 할라스. 나는 그날 밤, 아버지 옷 어딘가에, 혹은 머리카락 사이에 섞여온 이국의 모래알로 만들어진 아이였던 게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자 왠지 기분이 좋아졌다. 그것은 분명 내 존재를 설명하는 가장 그럴듯한 핑계였다.
엄마는 이 세계가 그럴듯한 거짓말들에 의해서 견고히 다져질 수 있다는 것을 나에게 알려주려 했던 것이었는지도 몰랐다. 처음으로 엄마를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어쩌면 거짓말이야말로 엄마가 나에게 가르쳐주려 했던 가장 건전한 소통 방식이었는지도.
--- pp.31-32 「거짓말 연습」중에서
이것은 폴에 관한 이야기다. 더도 덜도 말고 딱, 내가 아는 만큼의 폴에 관한 이야기. 이것이 폴이라는 한 인간의 실체인가 하면 그럴 리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때때로 우리는 타인과 조우하고, 그 사람을 다 안다고 착각하며, 그 착각이 주는 달콤함과 씁쓸함 사이를 길 잃은 사람처럼 헤매면서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아니던가. 나는 그것을 폴에게서 배웠다. 폴 자신은 내게 그런 것을 가르쳐준 일 없노라고 고개를 저을지도 모르지만. 그러므로 나는 폴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 저멀리 바다 건너, 나는 한 번도 밟아보지 못한 대륙의 한복판에서 한 여자의 남편이 되겠다고 서약하고 있을 폴.
나는 도대체 어쩌다가 폴에게 빠져버린 것일까.
--- pp.37-38 「폴링 인 폴」중에서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었다. 수많은 취객들 사이에 마주앉아, 폴이 들려준 이야기를 다 듣고 난 지금, 삶이란 신파와 진부, 통속과 전형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말해질 수밖에 없는 것들에 의해 지속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으니 말이다. 그러자 내게 실연을 안겨준 그가 더이상 원망스럽지만은 않았다. 실연당한 여자의 자기 위안에 불과할지도 모르지만, 어쩐지 그가 해준 이야기가 내 초라한 사랑에 대한 그만의 응답처럼 느껴졌기 때문에.
--- p.64 「폴링 인 폴」중에서
일상을 지켜내야만 했으므로 나는 남들이 하는 이야기를 주의깊게 듣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이 사용하는 단어의 의미가 내가 아는 것과 일치한다는 확신이 생길 때에만 비로소 그 단어를 넣어 문장을 만들었다. --- p.…) 허구의 인물처럼 나는 주어진 문장들 속에 내 진심을 숨겼다. 그렇게 말들을 고르고 고르면서 나는 타인의 말을 빌릴 때에만 내가 안전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
--- p.116 「감자의 실종」중에서
어둠 속으로 빛이 들어오려는 찰나, 갑자기 물결의 흐름이 바뀐다. 세기가 바뀐다. 물은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점점 더 빨리 움직인다. 차갑고, 날카롭고, 고통스러운 움직임 속에서, 나는 내 가슴을, 허벅지를, 복부를 할퀴고 지나가는 이것이 물이 아니라 말이라는 것을 불현듯 깨닫는다.
--- p.236 「꽃 피는 밤이 오면」중에서
당신의 말들을 받아 적으며 나는 당신의 말이 외국어로 된 노래와 닮은 것도 같다는 생각을 했다. 아니면 오래전 학교에서 배운 이국의 전위 시 같기도. 빗소리인지 파도 소리인지 모를 물소리가 가까운 듯 멀리서 리드미컬하게 들려왔다. 말끝이 부서져내리는 당신의 목소리와 그보다 한 소절씩 늦는 자판 두드리는 소리는 마치 돌림노래처럼 들렸다. 우리가 부르는 노래가 캄캄한 고래 뱃속을 가득 채웠다. 이 노래가 누군가에게 가닿을까.
--- p.263 「꽃 피는 밤이 오면」중에서
나는 오래전의 당신이 그리했을 것처럼 물살을 헤치고 앞으로 나아갔다. 겨우 발끝만이 바닥에 닿을 뿐이었지만. 저멀리에서 찬란한 빛이 쏟아지고 있으므로. 그것이 어디로 인도할지는 모르지만, 빛인 까닭에. (.…) 아, 저 노래를 내가 받아 적어야 하는데. 나는 물속으로 떨어지며 그렇게 생각했다. 어둠 속. 차갑다. 그러나 나는 수영을 익혀두었다. 물살을 헤치기 위해 두 팔에 힘을 주었다. 우리는, 괜찮을 것이다.
--- p.265 「꽃 피는 밤이 오면」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