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혼자서 펑펑 울었다. 그렇게 주저앉아서 울고 있으면 동생이 강아지풀을 꺾어서 왔다. 스스로 마음을 감당하지 못했던 날들. 가장 약한 아이를 미워한 날들. 동생은 강아지풀을 꺾어서 왔다. 그걸로 내 볼을 간지럽혔다. (…) 그 미움과 사랑은 모두 어디로 갔는가. 그 숱한 시기심과 아픈, 기쁜 나날들. 어디로 녹았나. 언제 사랑만 남았나. 정확한 때는 도무지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내게도 한 가지 빛나는 기억이 있다. 이날 이후로 나는 사랑을 믿기로 했고 이날 이후로 동생을 안고 잠이 들었다.
---「고명재 - 한 손엔 네 손을, 다른 손엔 강아지풀을」중에서
음식보다 더 부지런히 나눈 것은 대화였다. 살아오면서 가까이해 온 것을 각자 번갈아 늘어놓았다. 생경한 게 많아 좋았다. 미워하고 싫어하는 대상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는데 꽤나 겹치는 것이 많아서 흥이 났다. 무엇보다 좋았던 것은 숱한 사이를 흐르던 침묵이었다. 이때의 침묵은 막 상대가 맺은 말의 길을 천천히 따라가 보는 일이었고 내가 새로 펼칠 마음 중 지나치게 무성한 것을 먼저 쳐내는 일이 되기도 했으며 또한 그저 침묵으로서의 침묵이기도 했다. 누군가와 함께하는 침묵이 낯설거나 불편하지 않을 때 좋은 관계가 시작될 수 있다고 믿는다. 이 둘은 서로 같은 언어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박준 - 믿음과 침묵」중에서
그렇죠, 이게 맞죠. 적어도 내가 준 만큼은 돌려받아야 돼요. 기왕이면 더 받고 싶은 게 당연하고요. 내가 더 사랑해? 이거 거짓말이에요. 말이야 실컷 할 수 있어요. 그 말이 틀렸다는 증거도 없고 돈도 안 드는데 뭐. 그렇지만 속으로는 항상 상대방이 더 나를 사랑하길 바라요. 왜? 그래야 나를 버리지 않을 테니까. 결국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의 진짜 의미는, 당신한테서 사랑받고 싶다는 말이에요. 다른 랜덤 아무개의 사랑이 아니라 내가 콕 집어 고른 당신,(공연자가 관객 한 명을 손가락질한다. 공격적이고 집요한 몸짓이다.) 당신의 수제 사랑을 받고 싶다. 당신이 나를 사랑해 줘야 한다. 당신이 아니면 안 된다. (관객들 조용하다.) 피곤하죠? (네.) 에너지 조지게 들죠? (네.)
---「박서련 - 왓 엘스, 왓 엘스?」중에서
사랑이 지나간 자리엔 새로운 사랑이 온다고들 말한다. 먼저 웃으면 언젠가 웃을 일이 생기는 것처럼, 먼저 사랑하겠다는 자세를 갖추면 언젠가 새로운 사랑이 찾아올지도 모른다. 지금의 나는 그 사랑의 깊이가 앞선 사랑에 비해 결코 깊진 않으리라고 예언하듯 말하지만 그저 자만일 뿐이라는 걸 안다. 사랑에 빠질 것을 미리 예측할 수 있다면 재앙에 가까운 사랑을 피할 수 있을까. 그때 나는 그것이 재앙에 가까운 사랑이라고 단정 지었지만, 이제 와서 돌아보니 그토록 푸릇한 사랑도 없는 것 같다. 내가 다시 그런 사랑을 할 수 있을까? 신기한 일이다. 그늘이 내 마음속에 그대로 남아 있음에도 어둠 속을 더듬어 가장 반짝이는 빛을 찾아낼 수 있다는 게. 그것이 사랑이 지나갔다는 명백한 증거가 될 수 있을까.
---「이서수 - 어디서도 하지 못한 말」중에서
쓰는 사람이 혼자라는 말은 아마도 이런 뜻에 더 가까울 것이다. ‘글쓰기 이전에 네가 혼자가 아니라고 여겼더라도 글쓰기 이후에 너는 시시각각 혼자라는 걸 실감하게 될 것이다.’ 누구나 글쓰기로 뛰어들면 좀 외로워진다. 외로움의 이유는 모두 같지 않지만, 모두 스스로가 무척 외롭다고 느낀다. 각자의 외로움의 이유를 설명할 수 없어 애먼 것을 주고받는다. 위로하거나 응원하거나 반목하거나 경멸한다. 그리하여 나는 글을 쓰면 외로워진다는, 말로만 듣던 말을 마음에 새기는 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니까 글쓰기는 미처 몰랐지만 내 안에 있기는 있던, 외로움의 부분을 선명하게 보이도록 해 주는 조영제 같다. 물론 그 상태가 항상 싫은 것은 아니다. 처음 혼자 소설을 쓸 때, 나는 마음껏 외로워져서 좋았다. 꽁꽁 뭉쳤던 외로움을 술술 풀어낼 수 있어서.
---「김화진 - 환멸에 지지 않기」중에서
“스펙터클의 사회”란 현실이 모두 이미지가 되어버린 사회를 가리킨다. 사진과 영화를 비롯한 시각 매체들이 현실을 오직 이미지로서만 접하게 하고 현실의 사회적 관계와 사물들을 소외된 시각적 대상으로서 소비하도록 만든 세계가 스펙터클의 사회이다. 그러나 그러한 소외된 세계의 극한은 바로 오늘날의 이미지 세계일 것이다. 제2의 자아란 이름으로 SNS에 자기의 이미지를 진열할 때, 우리는 인격적 실존마저 이미지로 대신한다. 자신이 사진 이미지로 대신될 수 있다면, 그리고 사진을 통해 자신의 삶을 이야기할 수 있다면, 우리는 기꺼이 사진에게 영혼을 팔 수 있게 된다.
---「서동진 - 제인 폰다 그리고 미야자와 리에」중에서
주지하다시피, 공장과 철로는 영화의 기원과 맞닿아 있는 소재다. 뤼미에르 형제가 만든 초기 영화들 가운데 〈공장을 떠나는 노동자들〉(1895)은 대중적으로 상영된 최초의 영화로 알려져 있고 〈열차의 도착〉(1896)은 진정 현대의 신화라고 해도 좋을 위치에 있는 작품이다. 왕빙의 영화 도입부는 톄시구의 공장들 사이로 지나가는 열차의 맨 앞에서 찍은 쇼트들로 이루어져 있다. 뤼미에르의 영화와는 달리, 열차에서 내리는 사람들도, 공장에서 나오는 사람들도 보이지 않는다. 인민의 형상을 대신해 우리 앞에 나타나는 것은 길게 이어진 철로, 그리고 그 양옆에 늘어선 휑한 건물들과 벽들의 거무튀튀한 형상뿐이다. (…) 이처럼 그는 영화의 기원을 불러들이면서 그것을 지우고, 제국주의와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꿈이 어지러이 교착된 중국의 구체적 장소를 관통하면서 인민을 지우고 대지를 지우고 국가를 지운다. 하지만 거기 남는 것은 공백이 아니라 폐허다. 공백과는 달리 폐허에는 여전히 흔적과 잔향이 있다.
---「유운성 - 폐허의 프롤레타리아」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