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를 지었다는 의식, 그로 인해 자신을 책망하는 감정, 이런 것들이 발생한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다. 그중 과도한 죄의식, 또는 죄책감을 갖는 이유는 무엇보다 과도한 책임감 때문이다. 우리 유년의 시절로 돌아가 찾아보면 자신이 지지 않아도 될 과도한 책임감을 지기로 한 기억들을 대부분 하나씩은 가지고 있다.
나는 이미 일곱 살이나 열 살 때 엄마를 책임지거나 보호하거나 가족을 감당하거나, 심지어 집안을 일으키겠다는 결심을 했다는 내담자들이나 주변의 지인들을 수도 없이 만났다. 그 후로 항상 그들은 자신의 결심을 제대로 수행하고 있는지 끝없이 검열하고 나태한 자신, 부족한 능력을 자책했다고 한다. 자신으로 인해 겪는 모나 부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더 빨리 경감시켜 주고자 끝없이 자신을 재촉하며 살았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까닭 모를 분노와 무기력, 의심과 허망함이 차오르고 그것을 감당할 수 없을 지경이 되면 그제야 분석가를 찾는다. 지하 씨도 그랬다.
지하 씨의 죄책감의 근원이 되는 ‘엄마를 구원하겠다.’는 그 사명감은 본질적으로 아이에게 지워져서는 안 될 것이었다.
--- p.43-44, 「첫 번째 이야기_자식이란 무엇인가」 중에서
그녀는 자신의 삶을 구원해 줄 누군가가 필요했다. 어려서 부모님이 싸울 때, 사실은 일방적으로 아버지가 엄마를 때리는 것이었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부부싸움이라고 불렀고, 그럴 때 그 싸움을 멈춰 줄 누군가가 와 주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 공포로부터 구원해 줄 누군가가 나타나길 바란 것처럼 이 지긋지긋한 밥벌이로부터 자신을 빼내 줄 누군가를 간절히 원했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히 밥벌이로부터의 구원일 뿐만 아니라, 가족으로부터의 완벽하고도 합법적인 해방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결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중략)… 그러나 안타깝게도 결혼은 어떤 경우에도 구원이 아니다. 한 사람은 구원받고 상대방은 그저 구원자의 역할만 한다면 그것은 어느 쪽을 위해서도 진정한 구원이 될 수 없다. 결혼은 존엄한 두 인간이 사랑과 존중으로 같이 성장해 나가기로 약속하고 실천해 나가는 노력의 과정이다. 자기 삶을 더 기름지게 만들기 위해 고
통으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결혼을 택하고 그에 걸맞은 대상을 물색해 같이 살게 된다면, 언젠가는 그 구원이 지옥이라는 엄정한 사실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 p.90-91, 「두 번째 이야기_구원받기를 원하는 여자」 중에서
제니스가 100퍼센트를 주는 대가로 상대방에게 무엇을 요구할지는 별로 궁금하지 않았다. 분명 그로부터 100퍼센트 다 받기를 원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나는 그녀에게 물어보았다.
“100퍼센트를 다 주면 상대로부터는 무엇을 바라나요?”
그녀의 대답은 놀라웠다.
“저도 제가 바라는 것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상대방도 제게 100퍼센트 주기를 기대하고 있다고. 하지만 최근 로나와의 일을 겪고 나서 어젯밤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내가 완전히 받아들여져 본 적이 있던가, 누군가 내게 100퍼센트를 주는 경험은 고사하고 아무런 사심 없이, 편견 없이, 의도 없이 온전하게 나를 받아들여 준 사람이 있던가, 결국 나는 누군가의 목적에 의해서만 받아들여졌구나, 하는 생각이요. 그러니 제겐 100퍼센트를 줄 기회도 없었던 거예요. 어려서부터 저는 항상 그냥 보여지는 대상이기만 했던 것 같아요.”
--- p.151, 「세 번째 이야기_레슬러의 사랑」 중에서
‘외로움으로 인한 상처는 말 걸 사람이 없어서가 아니라 내가 누구로부터도 말 걸어지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 때문에 발생한다.’
그녀의 경험세계 속으로 나를 밀어 넣으려 할 때 느꼈던 나의 두려움이 무엇인지도 이해가 되었다. 그 버려짐의 기억, 방치된 아이의 막막함, 아무에게도 인지되지 않은 비존재감의 영토, 그 속에 머물러야 하는 두려움이 나를 막아섰던 것이다.
나는 이제야 그녀의 분노가 제대로 이해되었다. 두려움은 분노를 불러일으킨다. 두려움만큼 분노의 직접적인 원인은 없다. 미영 씨의 ‘누락됨’의 경험은 어떻게 분노라는 감정을 생성해 냈을까. 그것이 자신을 향한 분노로 돌아온 것은 아닐까? 부모와 가족들 사이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느낄 수 없을 때, 보통 사람들은 어떤 감정을 느낄까. 부모에게조차 존재를 인정받지 못해 자신이 가치 없게 느껴진다면, 그런 못난 자신에 대한 분노와 무기력함이 필연적으로 뒤따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 p.211-212, 「네 번째 이야기_누락된 자의 슬픔」 중에서
애도, 그것은 다시 찾을 수 없는 것과 돌이킬 수 없는 것에 대한 슬픔을 받아들일 때 겪는 고통스러운 통과의례다. 우리가 애도하는 대상은 그만큼의 속도로 잃어버리는 시간 그 자체이기도 하고, 내 존재를 가능하게 한, 그러나 지금은 돌아가신 부모이기도 하고, 추억으로만 돌아와 아련하게 심장을 가라앉히는 옛 연인이기도 하다. 그것들은 이제는 볼 수도 찾을 수도 없는, 이미 실체가 없는 것들이다.
그러나 만약 애도의 대상이 항상 보이지 않는 모습으로 내 몸에 매달려 있다면, 상실의 공간이 항상 내 몸의 일부로 결착되어 있다면, 생각의 지시에 따라 의심의 여지없이 기능하던 몸의 일부가 어느 날부터 비자율의 공동空洞으로 변질된다면, 삶은 그 자체로 애도의 시간이 될 것이다.
--- p.229, 「다섯 번째 이야기_스스로를 없앤 청년」 중에서
그의 꿈에는 어린아이가 자주 나타난다. 꿈에서 자주 나타나는 어떤 상想은 꿈꾼 사람의 정서가 어느 시절에 주로 머물러 있는가를 보여 주는 거울이다. 어린아이, 초등학교 저학년 정도의 아이는 결국 그의 정서 상태를 반영하는 이미지일 것이다. 이 말은 그때 이후로 정서적 성장이 일정 부분 제자리 상태에 머물렀다는 뜻일 수 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어머니로부터 당한 폭력으로 인해 정서의 많은 결들이 성장을 멈춰 버린 것 같았다. 사회적 얼굴인 학적부에 그어진 붉은 줄, 하늘에서 떨어져 내린 붉은 물방울, 그로 인해 붉게 발진이 생긴 얼굴. 도대체 이 짧은 꿈은 어느 만큼의 용량이기에 이다지도 많은 경험을 압축할 수 있단 말인가.
우리는 그의 무의식에서 길고 험한 동굴 하나를 탐사한 것 같았다. 그것은 어처구니없는 폭력적 권위로 인해 상처받고 좌절한 경험이었다. 너무나 평범하고 착한 이웃집 소년 같은 그의 여린 심성은 어른들의 폭압으로 인해 주눅 들고 낙담했다. 억울함이라고 말하기에는 도를 넘어 버린, 대항하기에는 너무나 절대적이고 폭압적인 권위에 대한 무한정의 굴욕감.
고분고분하고 여린 데다 상처받은 사람 같아서 더 친절하고 애틋하게 대하곤 했던 나의 태도가 스스로 납득되었다.
--- p.308, 「여섯 번째 이야기_마음이 가난한 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