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 위기를 발생시킨 책임은 ‘식인 자본주의’ 시스템에 있다. 현재의 위기는 다양한 폭식증의 발작이 한데 모인 예외적 유형의 위기다. 수십 년에 걸친 금융화로 인해 지금 우리가 직면한 위기는, ‘단지’ 극단적인 불평등이나 저임금 불안정 노동의 위기만이 아니다. ‘단지’ 돌봄이나 사회적 재생산의 위기만도 아니고, 이민과 인종화된 폭력의 위기만도 아니다. 또한 뜨거워진 지구가 치명적 전염병을 토해내는 ‘단순한’ 생태적 위기만도 아니고, 무너져가는 인프라와 군사주의 증대, 독재자의 만연을 특징으로 하는 ‘오로지’ 정치적인 위기만도 아니다. 아니, 이 위기는 ‘더 나쁜 무엇’이다. 이 모든 재난이 한데 모여 서로를 악화시키며 우리를 집어삼키겠다고 위협하는, 사회 질서 전체의 전반적 위기다. 이 책은 이렇게 거대하게 서로 얽혀 있는 기능 장애와 지배의 지도를 그린다.
--- p.20
그리하여 현 체제에서 우리는 착취와 수탈의 새로운 얽힘, 그리고 정치적 주체화의 새로운 논리와 만난다. 종속적 피수탈 예속민과 자유로운 피착취 노동자를 확연히 가르던 과거의 분할 대신에 연속체가 등장한다. 한쪽 끝에서는 무방비 상태의 피수탈 주체의 무리가 증가하는 반면에, 다른 쪽 끝에서는 착취‘만’ 당하는 주체인 보호받는 시민-노동자 계층이 감소한다. 그리고 그 중간에는 새로운 등장인물, 즉 수탈과 착취를 동시에 당하는 시민-노동자가 자리한다. 형식적으로는 자유롭지만 너무도 취약한 상태인 이 새 등장인물은 더 이상 주변부 주민이나 인종적 소수집단에 한정되지 않는 표준적 존재가 된다.
--- p.104
이 두 투쟁 쌍의 충돌에서 충격적인 결과가 나타났다. ‘다양성’, 능력주의, ‘해방’을 칭송하면서 동시에 사회보호를 해체하고 사회적 재생산을 다시 외부화하는 진보적 신자유주의가 그것이었다. (…) 이 과정에 해방운동들이 동참했다. 반인종주의, 다문화주의, LGBTQ 해방, 환경주의를 비롯한 모든 운동이 친시장적인 신자유주의 조류들을 세상에 낳아 퍼뜨렸다. 그러나 자본주의에서 오랫동안 지속된 젠더와 사회적 재생산의 얽힘을 감안하면, 가장 치명적인 것은 페미니즘의 궤적이었다. (…) 여성은 모든 영역에서 남성과 평등하며, 재능을 실현할 기회를 균등하게 보장받아야 하고, 그런 영역 중에는 생산 영역도, 아니 생산 영역이야말로 포함되어야 한다고 전제된다. 반면에 재생산은 후진적인 잔여 영역이자, 해방으로 나아가는 길에서 어떻게든 치워야 할 진보의 장애물로 나타난다.
--- pp.141~142
금융화된 자본주의는 공적 지원을 축소하고 여성을 유급 일자리로 충원할 뿐만 아니라 실질임금을 낮췄고, 이로써 가족을 지탱하려면 각 가정마다 유급 노동에 보내는 시간을 늘리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이는 돌봄 활동을 타인에게 맡기려는 필사적인 쟁탈전을 부채질했다. 이 돌봄 간극을 해소하기 위해 현 체제는 가난한 나라에서 부유한 나라로 이주 노동자를 수입했다. (…)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이주민이 자신의 가족?공동체 책무를 다른 이에게, 더 가난한 돌봄 제공자에게 떠넘겨야 하며, 그러면 이 돌봄 제공자 역시 같은 선택을 해야 하고, 이는 꼬리에 꼬리를 물어 결국 유례없는 전 지구적 ‘돌봄 사슬’이 등장하게 된다.
--- p.142
미국에서 최근 전개된 두 양상이 상황의 심각성을 잘 보여준다. 첫째는 난자 동결의 인기가 급증하는 현상이다. 난자 동결은 보통 1만 달러가 소요되는 값비싼 시술이지만, 이제는 고학력?고임금 여성 피고용자의 부가급여로서 IT 기업들에 의해 무료로 제공된다. 이 노동자들을 유치해 계속 고용하고 싶어 하는 애플, 페이스북 같은 회사들은 실제로 다음과 같이 말하며 출산을 연기할 강력한 유인책을 제공한다. “기다렸다가 40대, 50대, 아니 60대에 아이를 가지세요. 여러분의 강력한 에너지, 생산적 시기를 회사에 바치세요.” 두 번째 현상 역시 이와 마찬가지로 생산과 재생산 간 모순의 징후를 드러낸다. 모유를 짜내는 값비싼 첨단 유축기의 확산이 그것이다. (…) ‘모유 수유’는 더 이상 아이에게 젖을 물리는 일이 아니라, 기계를 사용해 모유를 짜서 보관해놓았다가 나중에 육아도우미를 시켜 젖병으로 먹이는 일이 되었다. 심각한 시간 빈곤 상황에서 더블컵에 완전 자동인 유축기는 가장 바람직한 해법으로 여겨지는데, 예를 들면 이 기구 덕분에 고속도로에서 차를 운전하면서도 양쪽 가슴에서 모유를 짤 수 있다.
--- pp.143~144
한마디로, 도처에 생태정치가 등장했다. 기후변화는 더 이상 환경운동만의 고립된 배타적 소유물이 아니며, 이제는 모든 정치적 주체가 입장을 표명해야 하는 긴급한 사안인 것만 같다. 경쟁하는 숱한 의제들에 포함된 이 주제는 이와 한 쌍을 이루는 대의가 무엇인지에 따라 다양하게 굴절된다. 그 결과는 표면적인 합의 이면의 떠들썩한 의견 불일치다. 한편에서는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지구 온난화를 지구 위 뭇 생명에 대한 위협으로 바라본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들은 이러한 각성 과정을 추동하는 사회 세력들의 공통 시각을 공유하지는 않으며, 지구 온난화를 중단시키기 위해 필요한 사회 변화에도 동의하지 않는다. 과학의 측면에서는 (어느 정도) 의견이 같지만, 정치의 측면에서는 (상당한 정도로) 다른 것이다.
--- p.154
자본주의 사회는 생산을 조직하는 임무를 ‘자본’에, 아니 더 정확히 말해 자본 축적에 헌신하는 이들에게 맡긴다. 원자재를 추출하고, 에너지를 발생시키며, 토지 사용을 결정하고, 식량 시스템을 운영하며, 자연에서 신약 후보 물질을 찾아내고, 폐기물을 처리하는 등의 독점적 권한이 자본주의 시스템에 의해 자본가 계급에게 부여된다. 사실상 공기, 물, 흙, 광물, 식물군과 동물군, 숲, 대양, 대기, 기후 등 지구 위 뭇 생명의 기본 조건 일체를 마음대로 통제할 권한이 양도되는 것이다. (…) 물론 정부가 사후에 피해를 줄이기 위해 개입할 때도 있지만, 항상 뒤늦게 만회하는 식으로 소유주의 특권을 침해하지 않으며 대응한다. 정부는 늘 온실가스 배출자보다 한 발자국 뒤에 있기 때문에 환경 규제는 대기업의 회피 수단에 의해 쉽게 무력화된다. (…) 이렇듯 지구 온난화를 야기한 것은 인류 전체가 아니라 바로 이들 자본가들이며, 이는 우연이나 단순한 탐욕의 결과가 아니다.
--- pp.166~167
금융화된 자본주의는 전반적으로 ‘정부 없는 거버넌스’의 시대, 달리 말해 ‘동의’라는 체면치레조차 내팽개친 지배의 시대다. 이 체제에서는 전 세계에 걸쳐 사회적 상호작용의 막대한 부분을 다스리는 강압적 규칙의 알짜를 만드는 것이 국가가 아니다. 대신 유럽연합, 세계무역기구, NAFTA, TRIPS 같은 초국적 거버넌스 구조가 이를 대체한다. 누구에게도 책임지지 않으며, 압도적으로 자본의 이익을 위해 활동하는 이 기구들은 ‘자유무역’과 ‘지적재산권’ 같은 신자유주의적 관념들을 ‘헌법으로 제정’하고, 이를 글로벌 체제로 고정시킨다. 이로써 장래에 있을지 모르는 민주적 노동?환경 입법을 미연에 방지하고 있다. 결국 이 체제는 다양한 수단을 통해 사적 (대기업) 권력이 공적 권력을 포로로 만들도록 도우며, 또한 국내에서 공적 권력을 식민화하고 사기업의 작동 방식을 본떠 공적 권력의 작동 방식을 짠다.
--- pp.242~243
그리고 이것이 바로 주류 진보 저항 세력이 실패한 대목이다. ‘저항 세력’의 지배적 흐름은 장막 뒤 권력의 가면을 벗기기는커녕 오랫동안 이 권력과 얽혀 있었다. 페미니즘, 반인종주의, LGBTQ+ 권리 운동, 환경주의 같은 대중적 사회운동의 ‘자유주의-능력주의’적 흐름이 그 사례였다. 이들은 자유주의의 헤게모니 아래에서 활동하며 오랫동안 진보적-신자유주의적 블록의 하위 파트너 노릇을 했는데, 이 블록에는 글로벌 자본의 ‘미래지향적’ 부문(IT, 금융, 미디어, 연예)도 가담하고 있었다. 결국 진보파 역시, (비록 방식은 달랐지만) 간판스타 구실을 했다. 신자유주의의 약탈적 정치경제를 해방의 매혹적 분위기로 화장해주면서 말이다.
--- pp.252~253
더 나아가 페미니즘이나 반인종주의 등을 신자유주의와 결부시킴으로써, 마침내 댐이 무너졌을 때 인민대중이 신자유주의뿐만 아니라 페미니즘이나 반인종주의 등까지 거부하도록 만들었다.그리고 이것이 (적어도 지금까지는) 반동적 우익 포퓰리즘이 이 상황의 주된 수혜자가 된 이유다. 또한 이것이 현재 우리가 정치적 교착 상태에 빠진 이유이기도 하다. 권력은 떼돈을 벌어들여 장막 뒤에서 웃음을 그치지 않는데도, 우리는 반동파와 진보파가 각기 양쪽에서 간판스타 노릇을 하며 경쟁하는 싸움에, 사람들의 주의를 딴 데로 돌리기 위해 짜고 치는 그 싸움에만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 p.2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