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이 시험에 매이지 않을 때 학교로 찾아오는 첫 번째 손님은 풍족한 시간이다. 고3 아이들은 스스로 정한 기관이나 단체로 1학기 내내 홀로 사회체험학습을 나간다. 여러 교육 현장에서는 이를 두고 ‘인턴십을 통한 학습(LTI: Learning Through Internship)’이라 부른다. 동물권 보호, 여성운동, 지역자치, 청년 공동체 활동, 문화 기획 등 우리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곳이라면 어디든 갈 수 있다. 어렵게 구한 사회체험학습 장소인 만큼 아이들은 출퇴근과 허드렛일에도 열심일 뿐만 아니라 체험 현장에서 자신의 역량을 뽐낼 수 있는 ‘개인 프로젝트’에도 열성적으로 몰입한다. (…) 학교 담장을 넘나든 아이들은 넉 달 만에 속이 한 뼘씩은 깊어져서 돌아온다. 학교를 떠나봐야 비로소 ‘공부’를 완성한다는 역설이 성립하는 순간이다.
--- pp.29~30
찬솔이는 3학년 마칠 때까지 수업을 단 한 과목도 듣지 않았다. 한 학기에 평균 30과목 이상의 선택지가 담긴 교과 차림표를 제공했음에도 아이 입장에서는 매력적인 메뉴가 없었나 보다. (…) 찬솔이는 3학년 말에 반드시 제출해야 하는 ‘논문’과 마주쳤다. 9개월 과정의 긴 프로젝트인데, 아이는 소설 작품을 쓰기로 했고, 막판에 집중력을 발휘했다. 이 과정에서 탄생한 작품이 〈절대 다수〉. A4 용지로 64에 이르는 장편소설이었다. 논문 심사를 해야 했기에 약간의 의무감으로 종이 뭉치를 펼쳐 들었던 나는 어느새 이야기 구조에 빠져들었다. 남자 기숙사, 도난, 집단 심리, 불합리한 회의 구조, 인간 본성, 신뢰, 경솔한 행동 등 여러 요소가 중층으로 엮여 있었는데, 안정된 플롯은 물론 등장인물의 심리나 성격 묘사까지 제법이었다.
--- pp.93~95
많은 대안학교들이 일반 학교에서 보살피기 어려운 학생들을 묵묵히 뒷바라지해왔다. 탈북청소년, 경계선 학습장애인, 우울증이나 자폐증 혹은 틱 장애를 안고 있는 아이들, 학업 중단 위기 청소년들을 보듬어온 것이다. 참 이상하다. 공공 영역에서 더 두텁고 세심하게 돌봄을 받아야 할 아이들을 왜 한 장소에 모아두고 ‘대안’이란 이름을 붙인 사설 교육기관들이 집중 위탁을 떠맡는가? 돌봄과 치유가 더 필요한 학생을 민간 대안교육기관에 떠맡길 때 교육 당국이 지급하는 비용은 한 아이당 하루 평균 8천~9천 원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입시 체제와 ‘정상적’ 학교 운영을 방해받는다는 이유로 언제까지 이렇게 저렴한 비용만 쓰면서 이 아이들을 내버려둘 것인가?
--- pp.108~109
개망초, 쑥, 아카시나무, 칡넝쿨 등으로 뒤범벅된 밭을 앞자락부터 정리해나간다. 초가을 햇살은 한여름 뺨치게 따갑고, 모기떼마저 그악스럽다. 아이들은 휴대용 블루투스 스피커로 음악을 크게 켜놓고 작업한다. 하늘이가 선곡했는데, 1950년대 냇 킹 콜의 목소리부터 최신 음악까지 시대를 넘나드는 곡들이 튀어나온다. 장범준의 〈흔들리는 꽃들 속에서 네 샴푸향이 느껴진 거야〉처럼 모두가 아는 곡이 나올라치면 아이들은 빠르게 손을 놀리면서도 목이 터져라 ‘떼창’을 한다. 밭두렁 너머 산골 계곡 가득 아이들 목소리가 한순간 가득 찬다. (…) 합창 소리는 웃음소리로 이어지고, 이거 언제 끝나랴 싶던 잡초 뽑기 작업이 시나브로 마무리된다.
--- pp.121~122
장 자크 루소는 자기 학생이 ‘농민처럼 일하며, 철학자처럼 사색하길’ 바랐다. 학생들을 그런 사람으로 변화시키려면 교사는 자기 존재를 걸어야 한다. 꼭뒤를 모두 보여주면서 아이들과 함께 뒹굴어야 교사 자신도 한 뼘씩 성장한다. 자신의 인격과 지성, 즉 삶 전체라는 자원을 죄다 끌어 써야 아이들 마음이 약간이라도 움직인다. 철수세미 같은 선생들이 전력을 다하고 있는 학교와 교무실은 세상 최고의 사범대학이다. 생애사 연구를 해보고 싶을 만큼 다양한 삶의 경로와 사연을 간직한 우리 교사들. 이철수는 그 교사 공동체를 구성하는 22분의 1이다. 그에게 존경심과 매력을 동시에 느낀다.
--- pp.176~177
지난 6년간 약 400명의 학부모를 만났다. 각종 위원회 회의, 학부모 연수, 포럼, 공동작업, 개별 면담, 발표회, 독서회, 간담회, 지역모임, 마을축제, 장터, 온라인 커뮤니티 등에서 만나 갖가지 이야기를 나눴다. ‘자발적 비주류’를 선택할 만큼 강단지고, 의식도 깨어 있는 학부모들이었다. 그럼에도 학부모가 대안학교와 청소년의 성장에 관해 웬만큼 몸으로 이해하는 데까지 6년이 걸린다. 졸업을 앞둔 즈음 프로젝트 발표회를 참관하면서 부모들은 손수건으로 연신 눈꼬리를 닦는다. 지난 세월 불안 속에서도 참고 기다리며 말없이 자녀를 지원했던 자신을 위한 다독거림의 눈물이리라.
--- pp.187~188
교직은 의료나 사회사업처럼 대표적인 ‘조력 전문직’이다. 교사의 몸과 마음이 다치면 다른 이를 도울 수 없다. 특히 대안학교에서 갖가지 불리한 조건을 감내하며 자발적으로 선의를 베풀고 있는 교사들이 소진됐을 경우 그들이 최후에 할 수 있는 선택은 ‘애정 철회’밖에 없다. 교사가 그 ‘마지막 옵션’을 선택하는 순간 가르침은 멈추고, 학교는 위기를 맞는다.
--- p.1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