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뒤 부회장의 자리에서 나를 죽음으로 내몬 진영준을 발견했을 때는 온몸이 부르르 떨렸다. 만약 내 손에 총이 있다면 저놈을 쏴 죽여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 이때 내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이 느껴졌다. “우리 도준이, 오늘 주인공이네.” 손길의 주인공은 바로 진영준이었다. 그를 확인하자 머리카락이 곤두서는 듯했지만 억지로 웃었다. 10년이나 나이 차이가 나서인지 그는 나를 보며 흐뭇하게 웃고 있었다. 어린 막냇동생을 귀여워하는 큰형다운 모습이다. ‘그 웃음, 언제까지 가는지 두고 보자. --- pp.50~52
중요한 순간이다. 회장이 내게 가진 애정의 크기가 어느 정도일까? 그 크기를 가늠해야 한다. 그 크기에 맞춰 어리광도 부려야 하고 필요한 만큼 내 존재감을 드러내야 한다. 일단 첫 번째 테스트! 나는 플라스틱 말을 쓰다듬으며 진 회장을 향해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어울리진 않지만. “전 진짜가 좋아요, 할아버지.” “뭐라?” “플라스틱 말보다는 진짜 말이 좋고요. 저기 있는 장난감 자동차보다는 씽씽 달리는 진짜 차가 좋아요. 배도 목욕탕에서 가지고 노는 게 아니라 바다 위를 떠다니는 진짜 배를 갖고 싶고요.” 조금 놀랐을 거다. 아니, 아주 많이 놀란 모양이다. 진 회장의 표정이 단단히 굳어졌다. 화났을 때 오히려 웃고, 놀랐을 때 그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 철면은 감정을 잘 숨긴다. “진짜라… 우리 도준이는 진짜가 무슨 뜻인지 아니?” 어떤 대답을 해야 할까? 아니, 어떤 대답을 원할까? 망설이지 말고 대답해야 한다. 즉흥적인 것처럼, 어린애답게. “네.” “뭘까? 그게?” “할아버지 거요.” 진 회장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번만큼은 감정을 숨길 수 없나 보다. “할아버지가 만드는 자동차, 배, 텔레비전은 모두 진짜잖아요. 전 그런 것들이 좋아요.” 어른은 아이의 말을 성인의 언어로 번역해서 듣는다. 내가 처음 내뱉은 진심, 진 회장은 이 말을 어떤 의미로 받아들일까? 놀란 얼굴이 다시 딱딱하게 변했다. “흠, 도준아.” “네, 할아버지.” “네가 말한 진짜를 가지려면 아주아주 힘든 일을 많이 해야 한단다. 죽을 만큼 무서운 일도 많이 겪을 수 있어. 하지만 가짜를 좋아하면 이런 일이 없을 거야. 그냥 즐겁고 재미있지.” 죽을 만큼? 내가 죽음을 마주했을 때, 무섭기도 했지만 억울함이 더 컸다. 순양그룹이라는 진짜배기를 갖기 위해서는 그 정도는 감수해야 하지 않겠는가?
순양그룹 미래전략기획본부 실장 윤현우는 재벌 총수 일가의 온갖 구린 일을 뒤처리하며 충성을 다하는 인물이다. 지금은 비록 재벌가의 뒤치다꺼리나 하고 있지만 언젠가는 최측근이 되어 출세하겠다는 꿈을 가진 그에게 어느 날 해외 자금에 손 담그는 중대한 업무가 맡겨진다. 드디어 꿈에 한발 다가섰다고 생각했지만, 그에게 맡겨진 실제 업무는 총수 일가의 악행을 뒤집어쓰고 나쁜 놈이 되어 죽는 것이었다. 13년을 개 같이 일하고 버려지면서도 “도대체 내가 왜 죽어야 해? 난 그냥 심부름꾼일 뿐이잖아!”라는 절규밖에 할 수 없는 억울한 죽음….
그렇게 억울한 죽음으로 끝인 줄 알았는데, 1987년 다시 과거로 돌아가 눈을 뜨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을 죽인 순양그룹의 창업주 진양철 회장의 열 살짜리 막내 손자 진도준으로 말이다. 자신을 죽인 집안에 환생한 것은 신이 주신 복수의 기회일까, 아니면 또 다른 악연의 시작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