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랬듯, 너도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알고 싶으리라 생각한다. 너는 내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거의 알지 못할 테니까 말이다. 마침 시골에서 일주일간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여유롭게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되어 너에게 그 이야기를 해보려고 자리에 앉았다. 물론 다른 이유도 있다. 나는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집안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이제는 상당히 풍족하고 세계적으로 어느 정도 명성을 얻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 하나님의 축복으로 크게 성공했지만, 후손들은 내가 성공하는 데 어떤 방법들을 사용했는지 알고 싶어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후손들이 내 이야기를 읽고 각자 처지에 맞추어 적합한 방법을 찾아 따르면 되지 않을까 싶다. …
나는 문법 학교를 채 1년도 다니지 못했다. 처음에는 그해 입학한 학급의 중간쯤이었지만 점차 일등으로 올라섰고, 게다가 위 학년으로 월반까지 했다. 또 그해 말에는 학습 수준을 맞추기 위해 3학년으로 월반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그사이에 아버지는 생각이 바뀌었던지 나를 문법 학교에서 데리고 나와 쓰기와 산수를 가르치는 학교에 보냈다. 대가족을 부양해야 했던 까닭에 학비를 부담할 만한 여유가 없기도 했지만, 아버지가 보기에 교육을 많이 받는다고 해서 반드시 넉넉하게 사는 건 아니라는 이유였다.
---「1장. 보스턴의 조상과 청소년기」중에서
나는 소크라테스식 논쟁법에 완전히 매료되어 그 방법을 내 것으로 만들려 애썼다. 상대 의견에 반박하지만 내 주장을 일방적으로 전개하지 않고 상대에게 겸손하게 묻고 의문을 제기하는 방법이었다. 당시 나는 앤서니 섀프츠베리와 앤서니 콜린스를 읽고 우리 종교에 대해 많은 의문을 품게 된 터라, 이 방법이 나에게는 안전하지만 상대방을 난처한 지경에 몰아넣을 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따라서 나는 이 방법을 즐겨 꾸준히 연습한 끝에 나보다 지적으로 우월한 사람도 굴복시킬 수 있을 정도로 능수능란해졌다. 하지만 그들은 그런 방법을 예측하지 못한 까닭에 곤란한 지경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허우적거렸다. 따라서 나는 내 지적 수준이나 명분을 넘어서는 승리까지 쟁취할 수 있었다.
---「2장. 인쇄소 도제 시절」중에서
우리 인쇄소는 종종 활자가 부족했다. 당시 미국에는 활자를 주조하는 데가 없었다. 런던에 있을 때 제임스 인쇄소에서 활자 주조하는 걸 본 적이 있었지만 눈여겨보지는 않았다. 그래도 나는 기억을 더듬어 주형(鑄型)을 만들었고, 우리가 갖고 있던 활자를 각인기 삼아 납 주형에 찍어 눌러 그럭저럭 활자를 채울 수 있었다. 때로는 필요한 모형을 조각하고 잉크도 만들어 사용했다. 심지어 창고를 지키는 등 온갖 잡다한 일을 해야 했다. 그야말로 잡역부나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팔방미인 격으로 일해야 했지만, 직공들의 능력이 향상되면서 내 일도 조금씩 줄어들었다. 급기야 카이머는 나에게 두 번째 분기 임금을 지급하면서 내 임금이 그에게는 무척 부담스럽다며 임금을 줄였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게다가 나를 대하는 태도도 점차 무례해졌고, 주인 노릇을 하려 들며 흠을 잡고 까탈스럽게 구는 경우도 많아졌다. 한마디로 언제라도 크게 폭발할 듯했다. 그럼에도 나는 참고 또 참으며 계속 버텼고 그의 상황이 나빠졌기 때문이라고 이해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하찮은 일로 우리 관계는 마침내 완전히 틀어지고 말았다. …
나는 인간 사이의 행복한 삶을 위해서는 ‘진실함’과 ‘성실함’, ‘청렴함’이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렇게 얻은 신조와 도덕관에 대해 글로 써두었고 평생 지키기로 마음먹었다. 그와 관련된 글은 지금도 내 일기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일반적으로 말하는 계시는 나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성경이 어떤 행동을 금지한다고 해서 무조건 나쁜 게 아니고, 어떤 행동을 권장한 다고 해서 무조건 좋은 것은 아니라는 의견에는 크게 공감했다. 요컨대 어떤 행동을 금지하는 이유는 우리에게 나쁜 것이기 때문이고, 어떤 행동을 권장하는 이유는 그 자체로 어떤 상황에서든 우리에게 유익하기 때문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7장. 필라델피아에서 사업을 시작하다」중에서
토론 후에도 나는 그 문제에 깊이 몰두한 끝에 「지폐의 성격과 필요성」이란 제목의 소논문을 써서 익명으로 신문에 게재했다. 일반인들은 대체로 그 논문의 논조를 환영했지만 부자들은 싫어했다. 내 논문이 더 많은 통화량을 요구하는 목소리에 힘을 실어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부자들 중에 내 논문을 반박할 만한 글을 쓸 만한 사람이 없었다. 따라서 그들의 반대는 점차 힘을 잃었고, 결국 의회에서 지폐 추가 발행 안건이 과반수로 통과되었다. 그 안건 통과에서 내 공로를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한 의회 친구들이 지폐 인쇄 일을 나에게 맡겨 보상해야 함이 마땅하다고 말했다. 지폐 인쇄 일은 상당한 이익을 보장했기 때문에 나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이것 역시 내가 그런대로 글을 쓰는 능력을 지닌 덕분에 얻은 이익이었다.
---「8장. 성공적인 사업을 위한 공공 서비스」중에서
나는 한 주에 하나의 덕목을 엄격히 실천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하여 첫 주에는 ‘절제’를 방해하는 요인을 멀리하려 애썼고 다른 덕목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리고 매일 저녁 그날의 잘못을 잊지 않고 표시했다. 그리하여 첫 주에 내가 ‘절제’에 해당하는 첫 줄에 아무런 표시도 하지 않는다면 절제라는 덕목과 관련된 습관은 강화된 반면, 그렇지 않은 다른 습관은 약화된 것으로 생각했다. 다음 주에는 관심의 폭을 확대해 ‘침묵’이란 덕목에 신경 쓰며 두 줄 모두에 검은 점이 표시되지 않도록 애썼다. 이런 식으로 마지막 덕목까지 진행하면 한 과정을 끝내는 데 13주가 걸리고, 1년에 그 과정을 네 번 반복할 수 있다. …
저명한 작가의 글을 모방하며 완벽한 글을 쓰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그 작가만큼 탁월한 수준에 이르지는 못하더라도 그런 노력을 통해 글이 나아지며, 명쾌하고 읽기 쉬운 글을 써내게 되는 것은 사실이다.
내가 일흔아홉에 이르기까지 항상 행복한 삶을 살았던 이유가 이 작은 습관 덕분이었다는 것을(물론 하나님의 축복 덕분이지만) 내 후손들이 알았으면 좋겠다. 앞으로 어떤 반전이 있을지는 하나님 손에 달렸지만, 설령 역경이 닥치더라도 과거의 행복했던 시절을 돌아보면 그 역경을 견디는 데 도움이 되지 않겠는가. ‘절제’한 덕분에 나는 오래전부터 건강하게 살았지만 지금도 건강한 몸을 유지하고 있다. 또 ‘근면’과 ‘절약’이란 덕목을 습관화한 덕분에 젊었을 때부터 어려운 상황을 만나도 상대적으로 쉽게 이겨내고 재산도 모았다. 지식을 쌓아 쓸모있는 시민이 되었고, 지식인들에게 높은 평가도 받았다. ‘성실’하고 ‘정의’롭게 행동함으로써 국가의 신뢰를 얻었고, 명예로운 직책도 부여받았다. 그 덕목들을 완전한 수준까지는 습득하지 못했지만, 불완전 상태에서도 그 덕목들이 서로 상승효과를 일으킨 덕분에 나는 평정심을 유지하고 즐겁게 대화하는 능력을 갖추었고, 아직도 많은 사람이 나와 어울리고 싶어 하고 젊은이들 또한 내 조언에 귀를 기울인다. 따라서 내 후손 중에서도 몇몇은 이를 본받아 보람찬 결실을 거둘 수 있으면 좋겠다.
---「9장. 완벽한 도덕적 삶을 위한 계획」중에서
1739년에는 아일랜드에서 조지 휫필드 목사가 우리 도시로 왔다. 휫필드는 아일랜드에서도 순회 설교자로 명성을 떨치던 목사였다. 그는 처음에 몇몇 교회의 허락을 얻어 설교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모든 성직자가 그를 탐탁지 않게 여겨 교회 설교단에 서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그는 야외에서 설교해야 했다. 종파와 교파를 가리지 않고 많은 신자가 그의 설교를 들으려고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나는 이런 현상이 신기해 그의 웅변적인 설교가 신자들에게 미치는 특별한 영향력이 있는지 확인해보려고 그의 설교를 들어보았다. 그는 신자들을 향해 “반은 짐승이고 반은 악마”라며 독설을 퍼부었지만, 이상하게도 사람들은 그를 무척 칭송하고 존경했다. 게다가 곧이어 주민들의 행동거지에서도 눈에 띄는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저녁에 시내를 걷다 보면 어디에서나 찬송가를 부르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종교에 무심하고 무관심하던 세상이 온통 종교적으로 변한 것 같았다.
---「11장. 공적인 일에 관심이 생기다」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