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나를 지켜내는 방법은 단순했다. 할 수 있는 일을 계속하는 것. 비록 오늘 하루가 별 볼 일 없었더라도, 돌이켜보면 삶은 끊임없이 질문을 던져왔던 것 같다. 생의 의미가 무엇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누구를 사랑하는지. 그 대답은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에 깃들어 있었다. 보송한 수건 한 장, 시원하게 들이키는 물 한 컵, 한 걸음 내딛는 산책, 한낮의 따사로운 햇볕, 마음을 밝히는 문장 한 줄 그리고 바로 지금의 나. 삶은 여전히 두렵지만 앞으로 이어질 뻔한 날들도 계속해서 살아보고 싶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이 하루를 생의 전부처럼.
--- p.6
프리랜서는 자유롭다.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고, 자고 싶을 때 잔다. 놀고 싶을 때 놀고, 내킬 때 출근한다. 혼내는 사람도 없다. 하지만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고, 자고 싶을 때 자면 큰일 난다. 통장 잔고는 언제 바닥날지 모르니 늘 대비해야 하고, 퇴근이 없으니 항상 업무 모드다. 아무도 나를 챙겨주지 않는다. 누구도 나를 책임져주지 않는다. 모든 걸 알아서 해야 하는 9년 차 프리랜서는 자유롭지만 자유롭지 않다.
--- pp.19~20
누가 알려준 것도 아니고, 어디서 배운 것도 아닌, 오직 내 경험으로 얻은 소중한 이야기가 지금의 나라는 레이어를 층층이 채워주었다. 앞으로도 계획적이지만 즉흥적으로, 체계적이지만 유연하게, 성실하지만 자유롭게 계속 이 직업으로 잘 먹고 잘 놀고 잘 살고 싶다. 메일 수신함에 1이 떴다. 프리하지 않은 프리랜서, 책상 앞으로 출근할 시간이다.
--- p.24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살아라” 같은 크고 무서운 말보다는 “할 수 있는 만큼만 하자” 같은 작고 귀여운 말과 함께 매일 실천하는 힘이 더 크다.
--- p.49
무언가를 처음 경험할 때, 익숙하던 순간이 특별하게 다가올 때, 미처 몰랐던 세상을 마주할 때, 낯선 감정을 느낄 때, 삶은 새로워진다. 지루하기 짝이 없던 삶이, 이젠 더 이상 새로운 것도 모르는 것도 없다고 단언하던 나를 비웃듯이, 신선한 생의 순간은 생각지도 못한 방법으로 내게 들어온다.
--- p.69
괜찮아. 처음처럼 언제나 힘이 넘치게 살 수는 없어. 그동안 열심히 네 몫을 다해왔는데, 닳고 낡는 게 당연한 거야.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넘치는 힘을 주체하지 못했던 예전의 나는 아마 1등급 스티커를 붙이고 다니지 않았을까. 이제는 달리는 대신 천천히 걷는다. 골목 구석구석을 다니며 알아낸 지도에 맞춰 지름길로 걷는다. 에너지는 적지만 효율적으로 목적지를 향해 갈 수 있다. 느린데 오히려 더 빨리 도착하기도 한다. 지금 나한테는 아마 4등급, 아주 가끔 3등급 스티커가 붙어 있을 것 같다. 나쁘지 않은 효율이다.
--- p.78
우리는 모두 어떤 방식으로든 꾸준하고 성실하다. 나처럼 그림이 아니어도 다양한 방법으로 각자의 이유로 무언가를 남긴다. 찰나의 순간을 사진 찍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진심을 편지에 적고, 지나간 시간을 글로 기록한다. 무엇보다 명확한 결과물이 없다 할지라도, 매일 잠을 자고 밥을 먹으며 하루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의 매일은 꾸준하고 성실하며 가치 있다. 그런 오늘의 나는 언제나 사랑스럽다. 어떤 모습이어도.
--- pp.102~103
건강한 음식을 먹고, 예쁜 것을 보고, 아름다운 색을 사진으로 남긴다. 높이 기지개를 켜며 일어나 레몬 차 한 컵을 크게 마시고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일한다. 냉동실에서 아이스크림을 꺼내 먹으며 소파에 누워 쉰다. 선풍기 바람을 쐬면서 영화를 한 편 보고 하루를 마무리한다. 보통의 여름날이 달고 시고 노란 맛과 함께 지나가고 있다. 이 평범한 날들과 여름 입맛이, 나는 제법 시원하고 좋다. 그러니까 더위랑 외로움 먹지 말자. 대신 잘 자고 잘 챙겨 먹자.
--- p.119
사실 잠옷 대신 낡은 티셔츠를 입든 어떤 물건을 쓰든 별문제 없다. 하지만 내가 어떤 것을 좋아하고 내게 무엇이 어울리는지 안다는 것은 나라는 사람을 알아가는 과정과 같다. 나는 검은색과 흰색 티셔츠의 단순함을 좋아하고, 사용감이 익숙한 물건에서 안정감을 느낀다. 비싼 물건일 필요도 없다. 유행하는 것이 아니어도 된다. 내가 좋다면. 내가 가진 물건에는 삶의 태도가 담겨 있다. 캐비닛 안에 차곡차곡 접어 넣어둔 옷에서 나는 향기가 좋아 빨래를 열심히 하고, 몸에 가볍게 닿는 촉감을 느끼며 잠드는 밤이 소중해서 침구를 갈고 잠옷을 정리한다. 이러한 반복 뒤에 누릴 수 있는 시간은 세상에서 가장 평화롭다.
--- p.155
엄마는 이날 처음 알았다. 그동안 싫어했던 건 진한 커피가 아니라 쓴 커피였다는 것을. 자신의 취향은 과일 향이 도는 산미 있는 커피라는 것을. 행복해하던 엄마의 모습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다. 예순 살이 넘어도 몰랐던 취향을 알게 되고 좋아하는 것이 새로 생기는구나. 너무 멋진 일이다.
--- pp.158~159
과거를 돌아봤으니 이제 미래를 그릴 차례다. 그동안 마음을 다해 쓴 것들이 반짝반짝 빛나기를 감히 소망한다. 그리고 그 빛의 끝에 서서 이렇게 말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파란만장해도 괜찮으니, 삶이란 살아볼 만한 것이구나.”
--- pp.201~2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