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봄에는 특별한 향기가 있다.
어디서 나는 건지 알 수 없는 부드럽고 달큰한 향기가 바람의 방향에 따라 흘러오는데, 누구나 발길을 멈추고 진원지를 유추해 볼 만큼 기분이 좋아지는 향이 온 동네에 퍼진다.
향기는 생각보다 멀리까지 퍼지기에 근처에 나무가 보이지 않을 때도 있다. 때문에 처음 맡아보는 사람들은 향기의 정체를 쉽게 파악하기 어렵다. 작고 흰 5개의 꽃잎을 가진 꽃. 감귤나무의 꽃이다.
--- p.15 「귤꽃 향기」 중에서
삼‘촌’ 아니고 삼‘춘’.
제주에서는 나보다 윗사람이면 남녀 구분 없이 ‘삼춘’이라고 호칭한다. 씨족사회의 흔적이 남아 있어 동네 모두가 친척뻘인지라, 가까운 관계가 아니라면 굳이 친척 관계를 하나하나 따지지 않는 거 같다.
고숙, 당숙에 익숙한 전라도 가정(나는 제주에서 태어났지만, 부모님은 전라도 출신이시다)에서 자란 나는 결혼 후 이런 호칭법에 적잖이 놀랐지만, 이 얼마나 편한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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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춘은 나이를 따지지 않는다. 성별을 가리지도 않는다. 심지어 존칭의 의미도 있다.
호칭이 애매할 때 어이~, 여보세요~, 저기요~,라고 부르지 않을 수 있어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다.
다정하게 한번 불러보자.
이름을 몰라도 친근하게 부를 수 있는 마법의 단어,
삼춘!
--- p.17~18 「삼춘」 중에서
본격적인 장마가 찾아오기 전 4월쯤, 온 제주가 습기에 침식되는 짧은 장마를 맞는데, 이 시기에 사람들은 고사리를 채취하느라 분주해진다.
‘고사리 장마’이다.
고사리는 뿌리를 뽑는 것이 아닌 줄기의 아랫부분을 꺾어서 채취하므로, 고사리는 ‘따러’ 간다고 하지 않고 ‘꺾으러’ 간다고 표현한다. 고사리를 꺾은 자리에는 금세 또 고사리가 자라나 며칠 지난 후에 가보면 ‘우후죽순’이 아닌 ‘우후고사리’라고 해야 할 판이다.
--- p.40 「고사리 장마」 중에서
미로와 같은 지하 쇼핑몰을 헤매면서 제주의 바람을 생각했다. 머리카락을 쓰다듬고 손가락 사이를 가늘게 스쳐가는 부드러운 바람의 냄새. 젊은 지난날, 촌에서 태어나 성장한 청년들이 그러하듯 도시를 꿈꿨던 내 모습이 믿기지 않았다.
저녁 무렵 도착한 제주공항. 짙은 구름에 가려져 달과 같던 해와 수면에 반짝이는 햇빛의 조각들이 괜찮다고, 이제 여기에 왔다고, 걱정할 것 없다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 p.61 「서울 나들이」 중에서
누군가가 나에게 ‘무슨 일 하세요?’ 하고 물으면 나는 약간 어버버 하게 된다. 그림과 관련된 직업을 연상하는 것을 어려워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림 그려요.” 하면 그냥 ‘취미’로 그린다고 생각하고, “일러스트레이터예요.” 하면 젊은 사람이 아니면 알아듣지 못한다. 괜히 그럴싸한 말로 포장하는 거 같아서 좀 쑥스럽기도 하고.
특히 상대방이 나이가 있는 경우에는 일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서 구구절절 설명해야 하는데, 이게 참 쓸데없이 말이 길어지는 터라 끊을 타이밍을 찾는 것이 어렵다.
“책이나 광고 같은 데에 들어가는 그림을 그려요. 서점에 가면 책에 그림들 많이 들어가 있잖아요? 그런 그림들이요. 책도 쓰고요.”
이렇게 이야기하고 나면, 나는 그 순간부터 ‘만화가’로 소개된다.
--- p.63 「직업이 뭐예요」 중에서
제주 사람이라고 모두 여름에 바다 수영을 즐기는 것은 아니다.
연세가 있는 삼춘들은 특히나 그러한데, 바다에 한해서 남자 삼춘들은 낚시를 좋아하고, 여자 삼춘들은 채취를 즐겨한다. 이미 유명한 보말 잡기는 물론이고 작은 게나 미역, 톳, 우뭇가사리 등도 좋은 식재료가 된다.
전국적인 의미로 보편적인 식재료로는 조개가 있다. 제주에는 조개잡이 스폿이 여러 곳 있지만, 제일 먼저 떠올리는 곳은 성산과 종달리 일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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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개를 잡는 바닷가는 대부분 무릎 높이가 안 되는 곳이다. 엉덩이가 젖지 않을까 하는 걱정은 접어두고, 일단 무조건 과감하게 주저앉아 주자! 조개는 한두 번의 호미질로 나타나 주지 않으니, 어정쩡하게 앉아 있으면 허리가 뻐근해져서 잘 펴지지 않는 사태를 맞이할 수 있다.
꽤 오랜 시간 팠는데도 수확이 없다면 주변을 둘러보자. 알록달록한 무늬의 모자와 옷을 입고, 어쩐지 현지인 중의 현지인의 느낌이 물씬 나는 삼춘들이 있는지 살펴본다. 찾았다면 은근슬쩍 근처로 이동한다. 틀림없이 수확이 있을 것이다.
--- p.84 「조개 캐기」 중에서
호텔 식음료팀에서 일했었다. 그것도 꽤 오래, 그저 그런 등급의 호텔에서.
힘들었다.
하루 16시간을 근무하는 날도 있었으며, 꼬박 한 달을 못 쉴 때도 있었다. 6시 반에는 출근해야 했으므로 새벽 5시에 일어나야 했고, 보수는 넉넉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만둘 수 없었던 건 경제활동을 계속해야 하는 이유가 있기 때문이었다. 자기가 번 돈을 자기를 위해 쓸 수 있는 사람이 가장 부러웠던 시절이다.
손님이 없을 때 카운터 구석에 앉아 책을 읽고 그림을 그렸다. 딱히 뭐가 될 거란 계획 같은 건 없었지만, 어릴 때부터 해오던 어쩌지 못하는 습관이었다.
가끔 자신의 앞날에 대해 나에게 조언을 구하는 사람들이 있다. 내가 감히 뭐라고 그들에게 조언씩이나 할 수 있겠느냐마는, 그저 아는 대로 경험을 나누어 주려고 노력한다.
“저도 처음부터 그림 작가는 아니었어요. 작가가 멋진 직업도 아니고, 제가 멋있는 작가도 아니지만, 좋아하는 일을 열심히는 하고 있지요. 일면식도 없는 저에게 질문하기까지 고민했을 시간을 가볍게 여기지 않고 있어요.”
--- p.109 「숨죽인 꿈들」 중에서
아이를 좋아하지 않았다.
나로 인해 인생이 좌우되는, 무조건적인 돌봄을 필요로 하는 존재라는 것이 큰 부담으로 다가왔던 것 같다. 그런데 작은 사람을 안게 된 이후로, 내가 누군가에게 절대적으로 구해지고 있으며 나도 구해질 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라는 생각으로 바뀌게 되었다.
어제는 우리 집 작은 사람 까꿍이의 4번째 생일이었다. 어느덧 본인이 받는 축하 노래는 따라 부르지 않고 감상할 만큼 성장한 아기, 감정이 풍부하고 섬세하며 표현을 잘하는 아기.
요즘 나는 곧잘 “엄마는 까꿍이가 있어서 너무나 행복해.”라고 말하곤 하는데(아, 나도 감정 표현이 풍부하다. 하루에 사랑 고백을 200번쯤 하는 거 같다), 그때마다 우리 아기는 “나도 엄마가 있어서 행복해. 매일매일 사랑해.”라고 답해준다.
맙소사.
--- p.171 「매일매일 사랑해」 중에서
언젠가 잘 알려지지 않은 오름에 오른 적이 있다. 나무 숲길도 좋았고, 공기도 좋았다. 길이 잘 보이지 않아 풀을 헤치고 다니는 것도 모험을 하는 것 같아 좋았다.
그런데 그 오름에 다녀온 이후로 집안에 흙먼지 같은 것이 많이 보였다. 자세히 보니 그 먼지가 움직인다.
이럴 수가…. 진드기다.
그렇다. 코코의 몸에 진드기가 붙어와 며칠 사이 엄청나게 증식을 한 것이다.
우리는 진드기와 한바탕 전쟁을 치르느라 고통스러운 나날을, 코코는 바싹 밀어버린 털 때문에 부끄러운 나날을 보내고, 이후로는 풀숲을 뚫고 길을 개척해야 하는 오름은 다시 오르지 않았다는 슬픈 이야기였다.
--- p.182 「오름」 중에서
겨울 제주의 하루는 해가 뜨기 전에 시작되며, 다른 계절과 다르게 소란스러운 새벽을 맞는다.
아직 어둑한 새벽 5시쯤이 되면 동네 삼춘들이 삼삼오오 모여 귤밭으로 이동할 차를 기다린다. 대체로 6-80대의 어르신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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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구니를 끌고 다니며 귤을 따는지라 생각보다 힘과 지구력이 필요하다. 높은 나무를 만나면 귤을 저장하는 컨테이너 박스를 밟고 올라가 수확해야 한다. 나무 하나에 앉았다, 일어났다가 수십 번이다.
귤 수확 작업을 하는 사람은 대부분 나이가 지긋한 어르신들이다. 하지만, 나이가 많다고 효율이 떨어질 거라는 생각은 큰 오산. 번개같이 빠른 손으로 사정없이 귤을 딴다.
--- p.223 「귤색 헤드라이트」 중에서
한락산.
어른들은 이렇게 발음하는 한라산.
그를 활용한 예문으로는 ‘빚이 한락산만 하다.’가 있겠다.
맙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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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쪽에서 보는 한라산의 모습은 여인의 옆모습이라고 배웠다. 그치만 내 눈에는 여인은 보이지 않고, 눈이 오는 날이면 거북이가 보인다. 이 사실은 아무리 알려줘도 볼 수 있는 이가 드문데, 평생 이해하지 못할 것 같던 짝꿍이 어느 날 북쪽으로 운전을 하다가 ‘아!! 거북이다!’ 하고 눈이 뜨이게 되었다.
거북이, 보이실는지?
--- p.242~243 「한라산」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