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시기(envy)와 부러움(jealousy)을 똑같이 취급할 때가 종종 있다. 하지만 둘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 부러움은 우리가 가진 것에 중점을 두고, 시기는 남이 가진 것에 중점을 둔다. 우리는 우리에게 없는 것을 부러워하고(그래서 부러움이 항상 죄는 아니다), 남들이 가진 것을 시기한다. 탐심(covetousness)은 내 소유가 아닌 것을 탐하는 오만한 욕구다. 나는 어린 자녀들에게 이렇게 설명하고는 하는데, 탐심이란 무언가를 굉장히 갖고 싶어서 안달복달하게 되는 것이다. 탐심은 남이 가진 것을 원하고, 시기는 그 사람이 그것을 가졌다는 사실에 분노한다. 탐심은 이웃이 소유한 것에 중점을 두고, 시기는 그 사람 자체를 향한다.”
---「3장 시기」중에서
“죄가 되는 분노와 싸우는 최고의 방법은 하나님의 분노를 기억하는 것이다. 그분의 사랑을 기억하고, 그 사랑을 위협하는 모든 것을 없애기 위해 그분이 어떤 대가를 치르셨는지 기억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볼 때만이, 그분의 사랑에 맞추어 우리의 사랑을 조정할 때만이 우리의 분노가 거룩해질 수 있다. 하나님처럼 사랑할 때 우리의 분노는 정당성을 얻는다. “대체 무엇 때문에 화를 내는 것이냐?” 그 답은 하나님의 영광을 공격하는 것들 때문이어야 한다. 시간이 흘러, 최종적으로는 그 마지막 날에 이런 사랑은 올바른 분노를 낳고, 모든 잘못된 분노를 사라지게 할 것이다.
분노의 해독제는 엄격한 금욕주의나 차가운 무관심이 아니다. 가장 사랑할 만한 것을 미치도록 사랑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온전히 사로잡으시도록 끈질기게 추구할 때 죄가 되는 분노가 사라지기 시작한다. 마침내 하나님이 우리를 가득 채우시고, 하나님이 가치 있게 여기시는 모든 것을 우리도 가치 있게 여기게 된다. 하나님의 경이로움을 ‘긍정’하고 그분이 점점 더 우리를 사로잡도록 내드릴 때, 죄가 되는 분노와 그 분노가 우리를 갉아먹는 반복된 형태를 ‘거부’하게 된다.”
---「4장 분노」중에서
“나태한 사람들은 영원히 이 방탕을 한탄한다. 이생에서 자기밖에 사랑할 줄 모른 그들은 이제 영원히 사랑받지 못한다. 창조세계의 달콤한 대기를 즐기지 못한 그들은 이제 진흙 속에서 숨을 쉬어야만 한다. 피부에 닿는 따스한 태양을 즐기지 못한 그들은 이제 검은 늪 속에 잠겨 있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나태를 제대로 진술해 주는 문장이다. 나태의 핵심에는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을 기대하는 마음이 없다. 나태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한다. 나태는 진정한 여유를 누릴 능력이 없다.
게으름뱅이들은 자신의 안락함만 지키려 하고,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점점 더 보지 못하게 된다. 일중독자들은 자신의 월급과 권력, 좋은 인상만 꽉 붙들려 하고, 하나님 앞에 선 피조물로서 성장하는 데 필요한 여유를 놓친다. 무기력한 사람들은 인생을 방해물의 연속으로 보고, 사소한 일들에 파묻혀 오락거리로 기분전환이나 하면서 서서히 영적 혼수상태에 빠진다. 하나님 안에 있는 진정한 여유와 기쁨은 그들을 피해 간다. 그들은 게으른 영혼의 소유자다. 토머스 맨턴이 말한 대로, “영원한 기쁨은 게으른 영혼의 입속으로 그냥 떨어지지 않는다. 영원한 기쁨은 하찮은 것이 아니어서 성실함과 진지함이 필요하다”(빌 2:12; 히 11:6).7) 이 세 가지 형태의 나태는 모두 하나님을 따분하게 여기기에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나태는 죽음이다.”
---「5장 나태」중에서
“탐욕은 좋은 욕구가 잘못된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이 무언가 획득하기 원하는 건강한 욕구를 소유하도록 창조하셨고, 풍성한 창조세계를 다스리는 권한을 주셨다. ‘탐내다’라는 말은 바라서는 안 되는 대상을 바라거나, 무언가를 지나치게 바란다는 뜻이다. 소유에 대한 갈망 자체는 선하다. 하나님은 갈망하는 분이시며, 우리를 갈망하는 존재로 설계하셨다. 언젠가 우리의 선한 욕구는 모두 충족될 것이다. 하지만 욕구가 과도하거나 엉뚱한 방향으로 튀면 죄가 된다. 그것이 죄의 본질이다.
이렇게 탐욕은 상반된 두 결과를 낳는다. 탐욕은 단순히 이기적으로 부를 쌓은 사람들만 따라다니는 죄가 아니다. 탐욕은 가지지 못한 사람들도 쫓는다. 브라이언 헤지스는 이렇게 쓴다. 성경은 ‘탐욕의 문제를 돈이나 소유 그 자체보다는 우리 마음의 과도한 애정으로 정의한다. 이는 돈이 없는 사람에게도 탐욕이 문제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 탐욕은 당신이 무엇을 소유하느냐가 아니라, 무엇이 당신을 점유하느냐의 문제다.’ 탐욕은 낭비하는 사람과 인색한 사람을 똑같이 괴롭힌다.”
---「6장 탐욕」중에서
“하나님의 선한 창조세계의 일부인 음식은 우리가 자급자족할 수 없는 존재임을 일깨워 준다. 인간이 목숨을 유지하려면 자기 몸 밖에 있는 무언가를 의존해야 한다. 음식은 우리를 치유하고, 살아가게 한다. 하지만 창세기 2-3장에서 보듯, 음식이 우리를 죽일 수도 있다. 하나님은 동산에 인간을 두시고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을 수 있다고 알려 주셨다. 단, 한 가지 열매만 제외하고 말이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창 2:17). 슬프게도, 아담과 하와는 뱀의 교활한 계획에 넘어가 생명 대신 죽음을 선택했다. 이후로 인간의 삶과 음식은 완전히 달라져 버렸다.
탐식이라는 죄를 다룰 때, 인류의 타락이 첫 인간 부부의 미각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에 주목하라. 그 유혹은 식욕에 관한 것이었다. 가인과 아벨에게서 보듯, 인간이 은혜에서 떨어져 타락하는 계기가 살인이 될 수도 있었다. 강간이나 근친상간 같은 다른 사악한 행위가 타락의 계기일 수도 있었다. 그런데 인류의 운명은 먹을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왜일까?
창세기 3장 6절에서 이 열매는 하와에게 단순한 에너지원 이상을 상징했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유혹의 순간에 이 열매는 하와의 깊은 갈망, 곧 쾌락과 아름다움과 지혜에 대한 갈망을 구체적으로 드러냈다. 하와는 하나님의 선한 계획이라는 경계 내에서 이 갈망들을 채우지 않고, 반역에 자신의 입(과 마음)을 벌리고 말았다.”
---「7장 탐식」중에서
“최고의 만족을 누리라. 그리스도 안에서 즐거움을 누리는 법을 배우라. 많은 사람이 정욕의 지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 한 가지는 그리스도께 큰 매력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즐거움이 없다시피 하기에 거짓에 속아 넘어간다. “그런 즐거움은 나와 안 맞아요”라고 말하지 말라. 예수님에 대한 애정을 일깨우기 위해 몇 단계나 밟아 보았는가? 그 기쁨을 얻으려고 정말로 싸워 보았는가? 태생이 그렇게 안 된다고 말하지 말라. 당신은 전심으로 그리스도를 즐거워하도록 창조되었다. 우리는 성이나 설탕, 스포츠나 쇼핑보다 그분을 더 기뻐할 수 있다. 예수님을 별로 기뻐하지 않는다면, 다른 쾌락이 이길 것이다. 당신이 소유하지 못한 만족을 하나님께 구하라.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이 우리를 만족하게 하사 우리를 일생 동안 즐겁고 기쁘게 하소서”(시 90:14). 그런 다음, 온 우주에서 가장 놀라우신 그분을 보고 또 바라보라. 가장 아름다우시고 우리에게 큰 만족을 주시는 그분의 진짜 모습을 볼 수 있을 때까지 계속해서 바라보라.”
---「8장 정욕」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