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더 라스트 프로세코〉의 배경
샤르마 방식으로 만들었지만 결코 프랑스의 샴페인에 못지않다고 칭찬하였더니, 선조들이 변함없이 추구해왔던 “자연의 법칙에 따라 와인을 만든다”는 철학의 결과물이라서 그렇다고 스테파니 씨가 말하였다. 그래서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모든 포도밭을 철저하게 유기농으로 가꾸고 있으며, 그 증표로 와인 병 하나하나에 일일이 친필서명을 하고 있다고 하였다. 시음이 끝나고 어둠이 깃든 유기농 포도밭을 바라보면서 나는 문득 얼마 전 보았던 영화 〈더 라스트 프로세코The Last Prosecco〉가 바로 이들의 이야기가 아닌가 생각했다.
“자연이 세운 규칙에 따라, 땅을 속이거나 지나친 욕심으로 착취하지 않으면서 만드는 와인. 농약을 뿌리거나 복잡한 농법을 사용하지 않고, 배양된 효모가 아닌 순수한 자연 효모에 의해 발효된 와인.”
그리고 영화 속에서 프로세코 와인 생산자인 주인공 안칠로토Ancillotto 백작이 자살 직전에 자신의 셀러에서 프로세코 와인을 마시면서 했던 독백을 가슴에 안고 이번 여행의 마지막 종착지인 베네치아로 향했다.
? 사랑하는 친구들과 한 잔! ? 베니스의 여인과 한 잔! ? 그냥 한 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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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자 두오모 레스토랑
알바 시의 또 하나의 자랑거리는 두오모 광장에 있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미슐랭 가이드 3스타 레스토랑인 피아자 두오모Piazza Duomo이다. 이 레스토랑은 매년 50대 세계 베스트 레스토랑 목록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전에는 이곳을 방문할 때마다 예약을 하기 힘들었는데, 이번 방문 때는 다행히 점심 예약이 가능했다. 미국 화가가 실내 벽화를 그렸는데, 컬러와 대담한 그림이 나를 압도하였다. 점심이었지만 어렵게 예약한 것을 생각해서 테이스팅 메뉴를 주문하였다. 수석셰프가 일본에서 요리공부를 한 경험 때문인지 전체적으로 심미적이고 섬세한 요리를 선보였다. 각종 허브와 채소 같은 식자재 또한 레스토랑에서 바이오다이나믹Biodynamic 농법으로 직접 재배한 것이라 신선하고, 피에몬테 지방의 독특한 풍미도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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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퀘 테레의 해안절벽에서 나온 리구리아 와인
저녁때쯤 호텔이 있는 몬테로소로 돌아와 석양에 물든 해변 길을 산책한 후 미슐랭 가이드에 등재된 레스토랑인 미키Miki에서 저녁을 하였다. 친퀘 테레가 자랑하는 명물은 단연 EU가 원산지 표시로 보호해주고 있는 멸치다. 전통 음식의 하나인 튀긴 멸치 요리에 다섯 마을에서 생산한 각각의 향기로운 와인을 음미하면서 친퀘 테레 여행의 마지막 밤을 보냈다. 문득 〈투스카니의 태양Under the Tuscan Sun〉이라는 영화에서 여주인공 프란시스Frances가 잠시 사귀었던 마르첼로Marcello를 찾아 친퀘 테레의 리오마죠레를 방문하는 장면이 떠올랐다. 친퀘 테레의 자연 풍광은 여전히 문명과는 먼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지만, 정신은 한없이 풍요로운 힐링의 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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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와 함께한 와인 문화
와인의 전파 과정이나 특정 와인의 뿌리를 찾다보면 대부분 문명의 이동 경로와 일치하면서 군대도 함께했음을 알 수 있다. 대표적인 곳이 고대에는 ‘갈리아’라 불렸던 프랑스와 현재 독일의 라인강 남부 지역 그리고 ‘신대륙’인 남미의 대표 와인 산지인 칠레와 아르헨티나이다. 갈리아 지역은 이 지역을 정복한 로마군에 의해, 남미 지역은 잉카?아즈텍 문명을 지구상에 사라지게 한 스페인의 정복군Conquistador에 의해 전파되었다. 미국 캘리포니아의 대표적인 와인 산지들은 천주교의 신부들에 의해 형성되었는데, 이는 산타바바라Santa Barbara나 샌프란시스코San Francisco처럼 전주교의 성인들의 이름을 딴 도시 이름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 정복군 병사들에게는 알코올음료로서, 천주교에서는 미사주로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용품이었을 것이다. 고대 이집트의 정복왕 람세스Ramesses 2세 때 오늘날의 시리아 일대를 놓고 히타이트Hittites왕국(터키에 있던 고대 국가)과의 전쟁 시 전투 여부에 따라 군인들에게 매일 공급했던 와인의 양이 달랐으며, 부상병들을 치료하는 의약품으로도 사용되었다. 이러한 목적의 와인 수요는 로마군에도 적용되었으며, 그래서 로마군에 의해 현재의 유럽 와인 지도(와인 생산 지도)가 사실상 완성되었다는 사실은 여러 차례 언급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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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골의 포도나무로 만든 베난티 와인
근대 와인산업에서 재앙에 가까운 필록세라 문제는 필록세라에 강한 미국의 포도 품종의 뿌리에 유럽의 포도나무 줄기를 접목시켜 해결했다. 따라서 오늘날 대부분의 유럽 포도나무는 진골眞骨이고, 이곳 에트나화산 일대나 칠레와 같이 피해를 입지 않은 포도나무Prephylloxera vines를 성골聖骨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이곳 에트나화산 일대의 와인은 원래 포도의 품종의 특질을 나타내는 순수한 혈통의 와인이라 할 수 있겠다. 아직도 이곳에서는 유럽이나 미국과는 달리 다른 품종을 접목하지 않고 땅 위에서 자연적으로 칡넝쿨처럼 뻗은 어미 줄기에서 새로운 새끼 포도나무가 자라게 하고 있다. 포도나무의 나이가 80살이 보통이며, 100살이 넘은 포도나무에서 건강하게 익어가고 있는 포도송이를 보면 새삼 와인산업에서 테루아의 중요성을 깨닫게 된다. 100년이 넘은 그루터기의 주름살이 마치 우리 인간의 인생 역정이 반영된 것처럼 느껴지고, 와인도 그만큼 다양하고 복합적인 풍미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p.266
모파상이 머물고 싶어했던 그리스의 고도 타오르미나
타오르미나의 상징인 고대 그리스인들이 만든 노천극장으로 가기 위해 낭만적인 중세의 움베르토Umberto 1세 거리를 따라 아름다운 상점들을 천천히 구경하면서 10여 분을 걸었다. 기원전 3세기 그리스인들이 건설한 극장은 후에 로마인들이 재건하면서 지름이 109미터나 되는 웅장한 반원형 극장이 되었다. 지금도 여름철에는 각종 공연이 열린다. 맨 위쪽 스탠드를 오르는 순간 나는 잠시 숨을 멈추었다. 찬란한 태양 아래 선홍색 부켄빌레아, 분홍색 유도화의 현란함, 흰빛 아라비안 재스민꽃의 향기가 바람에 날리는 담장 너머 펼쳐진 아름다운 해안선, 코발트색의 이오니아해, 멀리 흰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에트나화산과의 완벽한 조화를 이룬 파노라마! 일찍이 요한 볼프강 폰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는 이 장면을 “이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관”이라 부르며 감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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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극복한 일념의 와이너리, 해발 1,100미터
지난 겨울에는 겨울의 포도원 풍경을 담기 위해 인터라켄에서 유명한 뢰치베르크 터널을 통해 다시 한번 발레를 방문하였다. 기차가 바다의 카페리와 같이 자동차를 싣고 터널을 통과한다. 알프스를 자동차로 넘어가려면 두 시간 가까이 걸리는데, 뢰치베르크 터널 덕분에 30분으로 단축되었다. 유럽에서 가장 높은 지역에 위치한 비스피테르미텐 마을의 포도원은 해발 1,100미터에 위치해 있다. 부로Bulo가 비스프에서 남쪽으로 10킬로미터 거리이지만 급경사에 20여 분 동안 곡예운전을 해야만 도착할 수 있다. 겨울의 산골마을 풍경은 스산했지만, 산을 오르내리는 등반객들이 있어 꽤 활기차 보였다. 마을에서 유일한 카페의 테라스에 자리하니 눈 덮인 융프라우산의 연봉들이 병풍처럼 다가왔다. 그 연봉들 중에 유난히 날카로운 삼각형 모양의 하얀 봉우리가 아이거Eiger다. 변화무쌍한 알프스의 날씨로 인해 아이거는 마치 사막의 신기루처럼 구름과 안개 사이로 사라졌다 다시 나타나곤 했다. 해발 1,100미터에서 생산된 발레의 황금빛 샤슬라가 담긴 글라스를 설경에 비추어보면서 진정한 평화와 행복감을 만끽하였다. 이곳에서는 누구나 알프스의 ‘별’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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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캔팅은 반드시 필요한 절차인가?
디캔팅의 장점은 여과주인 와인의 특성상 병 바닥에 침전되어 있는 찌꺼기를 제거하고 순화되지 않은 거친 타닌을 산화시켜 부드럽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와인의 맛을 온전히 음미하려면 순화되지 않은 처음의 와인 맛부터 그 풍미를 다할 때의 맛까지를 비교해야 한다. 나는 이 음미법을 와인 애호가들에게 ‘잠자는 미인The Sleeping Beauty’에 비유하여 설명하곤 한다. 아무리 미인이라도 수십 년 동안 잠자던 미인이 막 잠에서 깨어났을 때는 푸석푸석한 피부에 눈꼽이 끼어 있을 것이고, 세수한 후의 맨얼굴은 자연미인의 것이겠지만, 화장한 얼굴은 더 화려하고 매혹적일 것이다. 와인에 비유한다면 화장한 얼굴을 내보인 그 순간이 디캔팅을 통해 최고조의 맛과 부드러운 향기가 우러나오는 시점이다. 만약 매번 디캔팅해 마신다면 우리는 항상 미인의 화장한 얼굴만 보는 셈일 것이다. 또한 한 병의 와인 속에서 피어나는 향기의 변화 과정을 통해 유년기?청년기?장년기 그리고 노년기의 인생 역정을 반추할 수 있다면 우리는 와인을 통해서 더 많은 철학과 감동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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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이 바뀔 때마다 새로운 와인 잔으로 바꾸어야 하는가?
“와인이 바뀔 때마다 반드시 새로운 잔으로 마셔야 한다”는 게 상식으로 통용되고 있다. 그러나 이 주제에 대해 나는 이미 언급한 ‘디켄팅’처럼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다. 나는 상대방에게 격식을 차려야 할 비즈니스 디너나 외교적인 모임을 제외하고는 샴페인 잔, 화이트와인 잔, 레드와인 잔 각 한 개씩으로만 와인을 마신다. 와인을 마신 후 잔을 잘 세척하는 것은 귀찮은 일이지만 가장 중요한 일이다. 보통 전문가들은 베이킹파우더로 세척한 후 고온의 수증기와 함께 마른 수건으로 닦아낸다. 그런데 민감한 사람들은 이렇게 정성들여 닦은 잔에서도 세척제와 물 고유의 냄새를 느낄 수 있다. 와인 잔은 와인으로 세척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다. 마치 어패류를 바닷물로 씻는 게 좋은 것처럼……. 실제로 유럽의 고급 레스토랑들에서는 손님이 주문한 와인을 소믈리에가 와인 잔에 조금 부어 잔의 내벽에 코팅하듯이 흔들고 버린다. 따라서 같은 종류의 와인을 마실 때는 새로운 병을 열어도 굳이 잔을 바꿀 필요가 없다. 사용했던 잔은 와인으로 이미 자연스럽게 세척된 잔이기 때문이다. 물론 미세하게 남은 와인이 새로운 와인의 맛에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할 수는 있겠지만, 실제로 이를 분별할 수 있는 슈퍼 테이스터Super Taster를 본 적은 없다. 최악의 경우는 마시고 난 잔에 물을 부어 행군 후 그 잔으로 새로운 와인을 마시는 것이다. 나는 오래전부터 ‘와인 잔 바꾸지 않기 운동’을 하고 있는데, 이는 두 가지 면에서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하나는 레스토랑이나 와인 바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불필요한 노고를 줄여주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물을 아끼고 폐수를 줄이는 환경 보호를 실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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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두에는 포르투갈인들의 눈물이 녹아 있다
세투발에서 여러 와이너리 방문을 마치고 오랜만에 나는 바다처럼 넓은 테주Tejo강을 건너 리스본에 입성했다. 기원전 1200년경에 페니키아인들이 영국과의 무역 거점으로 건설했다는,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수도의 풍모가 넘쳐났다. 저녁에 테주강가의 식당에서 생선구이와 커다란 솥에서 막 삶아낸 문어를 안주 삼아 상큼한 비뉴 베르드로 여행의 피로를 풀었다. 리스본에 머무르는 동안 매일 저녁 영화 〈리스본행 야간열차Nachtzug nach Lissabon〉에 나오는 뒷골목에 있는 포르투갈의 전통 음악인 파두Fado 공연장을 찾았다. 그 어원이 ‘숙명’이라는 의미의 라틴어 단어 ‘파툼fatum’인 파두는 스페인의 플라멩코Flamenco에 대비되는 대항해 시대의포르투갈인의 한恨을 노래하는 국민 음악이다. 인생, 추억, 향수, 사랑의 슬픔을 주제로 한 애절한 음률이 한의문화에 익숙한 나를 유혹했는지도 모른다. 지금도 나는 이따금 리스본에서 구입한 대표적인 파두 가수 크리스티나 마데이라Cristina Madeira의 음반을 감상하면서 유럽이면서 유럽이 아닌 듯한 유럽의 변방, 포르투갈의 와인과 문화를 추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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