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채색으로 가라앉은 진아씨네 집에서 식탁 등은 제일 빛나는 사물이었다. 우리는 그 등 아래에서 얼마나 여러 초저녁 함께 술을 마셨던가. 윤이들은 집안에서 안전하게 놀고 있고 남편들은 안 오거나 늦었고 우리에겐 술을 마시지 않을 수 없는 많은 이유들이 있었다.
--- p.14, 「보내는 이」
내가 사는 집. 두세 방울의 불빛으로 겹쳐지면서 아른아른 떠 있는 집. 나는 그 순간의 느낌을 위해 집에 일부러 불을 켜두고 오기도 했다. 내 십여 년이 통째로 담겨 있는 곳을 보려고. 일어났다 사라지고, 솟아났다 흩어지고, 눌리고, 찌그러지고, 터져나와 천장에 파편처럼 박혀버린 모든 감정, 말들, 욕과 사랑, 애원과 멸시, 체념, 기대, 자책과 비명, 난간을 잡고 비틀, 하면서 그걸 건너다보고 있으면, 하…… 그래 씨발, 뭐 있나, 나의 윤이도, 진아씨의 윤이도, 진아씨도, 남편도, 나 자신까지도, 나는 다 사랑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어떤 수단으로든 나에겐 그런 감정적 고양 상태에 도달하는 것이 너무나 중요했다. 그런 걸 안 느낀 날은 초조하고 또 초조할 정도로.
--- p.19, 「보내는 이」
일 때문에 가족들한테 민폐를 끼치는 것 같은 그 기분. 일을 잘하려고 하면 할수록 수렁에 빠지는 그 기분. 그건 육아와 일을 병행하는 동안 지긋지긋하게 반복됐던 감정이었고 십 년 가까운 시간 동안 경험과 체념이 쌓이면서 조금씩 뭉개가던 감정이기도 했다. 어쩌면 맞춰가고 있다고 믿었던 일과 가사와 육아의 균형을 2020년 봄은 다시 원점으로, 원점 그 이전으로 밀고 가고 있었다.
--- pp.59~60, 「여기 우리 마주」
수미는 알고 있었을까. 누구누구의 맘도 아닌, 무슨무슨 샘도 아닌, 딱 떨어지는 ‘선생님’이 되어야 할 때, ‘지도사’라는 정식 호칭으로 서 있어야 할 때, 내가 나의 무엇을 보이지 않게 하는지. ‘선생님’으로 생존하기 위해 내가 얼마나 깨끗하고 멀쩡하게, 주부로서의 노동만을 선별해서 지워버리는지. 하지
만 ‘선생님’인 그 순간에도 내가 알아서 감춰버린 그 노동에 얼마나 실시간으로 잠식당하고 있는지. 어떻게 얼굴이 지워진 채로 다른 여자에게 다른 여자가 되어가는지. 나로 서 있기 위한 최소한의 힘을 기르기 위해 어떻게 또다시, 계속 다시, 매일 다시, 내 노동을 지우고, 지운 것에 먹히고, 먹혀가는 채로 지우면서, 편하게 사는 여자들 중 하나가 되는지. 왜 나는 나의 어떤 부분을 지워야만 내 실력을 신뢰받을 수 있다고 믿게 되었는지.
--- p.74, 「여기 우리 마주」
그뒤로 내담자는 입을 닫아버린다.
그대로 시간이 흐른다.
기다리기로 한다. 그냥 흘러가는 시간이 아니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자신의 상자 속 집을 내려다보고 있는 내담자를, 상담자는 기다린다. 이 모래치료실이 안전한 곳이며 모래 상자 안에선 무엇을 해도 허용된다는 것을, 최선을 다해 기다리는 것으로 전달한다.
--- pp.141~142, 「나와 내담자」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을 보지 않고 사는 것. 강수영이 그걸 얼마나 원하는지 안다.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을 보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 강수영에게 그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도 안다. 한 번도 만지지 못하던 것들을 자신의 상자 안으로 가져오는 일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를 나는 알고 있다.
--- p.150, 「나와 내담자」
수련자는 살아온 과거를 시간순으로 떠올리며 과거를 시각화해야 한다. 지워지지 않는 과거의 어떤 장면들, 섬광 같은 기억들은 물론 잡히지는 않으나 없는 것은 아닌 기억들까지 모두, 모두 시각화해 차례차례 지구에 버려야 한다. 기와유리집의 상점 한쪽에 쌓여 있던 소책자에 그 방법이 자세히 기술되어 있었는데, 기억을 선명히 불러내는 과정을 사투에 빗댔던 것이 떠오른다.
--- p.162, 「운내」
내가 정말 가져보고 싶었고 만져보고 싶었던 것, 그것이 내 손에 닿자마자 훼손되던 순간의 충격과 슬픔을, 나는 여전히 떠올린다.
--- p.216, 「美山」
유정이 두려운 것은 유정 자신이 가족들을 안 보게 되는 것이었다. 유정이 두려운 것은, 무언가를 체념한 채로 계속 가족들을 보면서 그런 자기 자신을 다시 혐오하게 되는 것이었다. 유정이 원하는 것은 어떤 분열도 겪지 않고 제정신으로 가족들을 보는 것이었다.
--- p.264, 「내게 내가 나일 그때」
유정씨는 빠져나오고 싶다고 했어요. 오랫동안 갇혀 있던 원래 그래의 세계에서 유정씨는 빠져나오고 싶다고 했습니다. 자신을 비껴서 나오는 게 아니라 자신을 통과해서 나오고 싶다고 했어요.
--- p.266, 「내게 내가 나일 그때」
등에 막 불이 켜지는 걸 함께 본다는 건 뭔가 마법 같고 선물 같은 데가 있었다. 그곳에 서서 같이 등을 보고 있자 경은 왠지 민과 아주 가까워질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 p.323, 「점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