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와 함께 아시아의 노벨 문학상 후보로 자주 거론되는 작가가 중국의 위화다. 현존하는 중국 작가 중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작가라 하는데 위화의 작품을 그동안 한 권도 읽어본 적이 없었다. 하정우가 주연 감독한 <허삼관 매혈기>가 위화의 작품이라는 정도만 기억할 정도다.
그만큼 별 관심이 없었던 작가였는데 우연히 신문 신간 소개 기사에서 젊은날 위화가 쓴 고전문학과 음악에 대한 산문이 호기심을 불러 일으켰다. 대작가가 된 지금의 자양분이 되었을 젊은날 고전문학에 대한 글도 궁금했지만 위화의 음악이야기가 더 궁금했다.
<문학의 선율, 음악의 서술>은 1960년생인 위화가 젊은시절인 1990년 후반부터 2000년 초반에 걸쳐 쓴 글들을 모은 책이다. 산문 20편, 인터뷰 1편으로 구성 되어있는데 문학과 음악에 대해서 때로는 각자, 때로는 연결해서 썼다.
윌리엄 포그너, 후안 룰포, 가와바타 야스나리, 프란츠 카프카,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허밍웨이 등 위화에게 영향을 주었거나 좋아하는 작가와 작품에 대한 이야기부터 멘델스존, 차이콥스키, 말러, 리스트 등 음악가와 음악에 대한 이야기들을 통해 젊은날 혈기왕성한 작가의 패기와 자부심, 그리고 겸손함까지 엿볼 수 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와 카프카를 동시에 읽지 않아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는 위화는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무한한 부드러움과 상징이고 카프카는 극단적 날카로움의 상징이다"라며 두 대가에 대한 이야기와 함께 할도르 락스네스의 <청어>와 스티븐 크레인의 <소형 보트>, 그리고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이즈의 무희>를 통해 문학의 길로 들어섰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또한 천일야화가 우리를 매료시키는 문학적 이유를 설명해 주는가 하면 어니스트 허밍웨이의 <흰 코끼리 같은 언덕>과 알랭 로브그리예의 <질투>에서 서술이 특정한 심리 흐름을 드러낸다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카프카의 <성>의 주인공 K가 성채 주변에 머무는 수밖에 없는 운명이듯이 독자 역시 카프카 작품 주변에 머물 수밖에 없는 이유(카프카가 독자를 거부한다고 표현하고 있다.)를 분석해 주고 있다.
중국 작가의 모옌의 소설 <환락> 속 어머니에 대한 서술에 대한 거부감에 대한 이야기와 함께 카프카와 마찬가지로 20세기의 가장 훌륭한 작품을 썼지만 가장 중요한 작가는 될 수 없었던 브루노 슐츠의 불행을 문학의 불행이라고 비유하고 있다.
위화의 젊은시절 고전문학에 대한 비교 분석과 통찰들은 지금의 일가를 이룬 자양분이 되었음을 물론 당시 이미 대작가로서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나는 위대한 작품을 읽을 때마다 그들에게 끌려 들어간다. 겁 많은 어린애처럼 조심스럽게 그들의 옷자락을 붙들고 그들의 걸음걸이를 따라 시간의 강을 천천히 걸어간다. 따스하면서도 온갖 감정이 뒤섞이는 여정이다. 그들은 나를 이끌어준 뒤 돌아갈 때는 혼자 가라며 등을 떠민다. 돌아온 뒤에야 나는 그들이 영원히 나와 함께 있게 되었음을 깨닫는다." - p.56
서양 고전음악을 다소 늦게 듣기 시작한 위화는 오디오를 구매한 지 반년 남짓 만에 CD를 300여장을 구매할 정도로 클래식에 입문하자마자 음악에 대한 굶주림을 열정으로 표출했다. 앉아서 조용히 음악을 들을 수만 있다면 아침에 느지막이 일어나서 한밤중까지 계속 들었다고 한다.
복고적 태도와 고집스러운 성격의 브람스는 보수적 이미지를 스스로 부여하여 당시 시대를 대표할뿐만 아니라 급진주의자였던 리스트와 바그너와 적이 되었으나 브람스와 바그너가 세상을 떠나면서 보수와 급진의 분쟁도 자연스럽게 사라졌다는 이야기, 어려서부터 세계적 명성을 얻었으나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을 관람한 스탈린의 공개적인 매서운 질책을 얻은 후 오랜 불안을 안고 살았던 쇼스타코비치가 제2차 세계대전 독일의 레닌그라드 침공 중 완성한 <교향곡 7번>과 호른의 <주홍 글자>를 비교 분석하면서 긴 서술의 클라이맥스에 대한 글은 눈길을 끌기에 충분하다.
또한 우아하고 섬세하며 조화로운 선율을 추구한 멘델스존이 과격한 감정으로 변화무쌍했던 베를리오즈와 반대 방향에 선 이유와 함께 서술 속의 부정을 이야기 하고, 니콜라이 림스키코르사코프, 알렉산드르 스크라빈과 함께 토론했던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의 <회고록>을 통해 음악의 색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마지막 장 <애악> 잡지 기자와의 인터뷰를 통해 차이콥스키 작품을 높이 평가하고 있는 위화는 클래식 음악에 대한 이야기 뿐 아니라 문학과 클래식 음악을 비교 분석함으로써 차원이 다른 문학의 깊이를 맛보게 하고 있다.
"어떤 예술 형식도 음악과 비교할 수는 없습니다. 음악과 소설 모두 서술형 작품이지만, 소설보다 음악의 서술에 신비한 체험이 훨씬 많이 필요합니다. 음악 청중도 소설 독자보다 더 많은 자질을 가져야 하고요." - p.376
<문학의 선율, 음악의 서술> 서문에서 위화는 독서를 <산해경>에 나오는 "만만", 전설 속의 눈도 하나, 날개도 하나라 혼자서는 날 수 없는 새로 비유한다. 텍스트와 독서 행위를 각각 만만이라고 말하고 싶다는 위화는 텍스트의 만만이 독서의 만만을 찾고 독서의 만만 역시 텍스트의 만만을 찾아야만 두 마리 만만은 한 몸이 된 뒤 나란히 날개를 펼치며 날아오를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위화의 문학과 음악에 대한 비행을 통해 부족하지만 나의 만만을 경험한 것 같다. 책 속 읽지 못한 고전 문학을 보면서 아직 나의 독서 비행이 멀었다는 걸 새삼 느끼게 되었다. 아직 많이 부족하지만 하늘은 충분히 높고 수많은 만만들이 하늘 가득 널려 있으니 나의 만만을 찾아 즐거운 비행을 계속 이어가야겠다.
'후안 룰포를 회상하며'에서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이 작가의 작품이 3백 페이지도 되지 않지만 소포클레스의 작품처럼 광대하다고 말했다. 과감하게도 셰익스피어보다 훨씬 놀라운 작품 수를 자랑하는 작가로 자신의 비유를 완성한 것이다. 여기에서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작품의 광대함과 작품의 수가 일치하는 것은 아니라는 문학계의 오랜 진실을 지적했다. E.M.포스터도 T.S.엘리엇을 이런 식으로 언급했다. 윌리엄 포크너는 셔우드 앤더슨을, 아이작 싱어는 브루노 슐츠를, 존 업다이크는 보르헤스를 이렇게 언급했다. p.34
전부터 위화 작가의 산문이 좋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기에 궁금했었다. 기존에 에세이집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 <우리는 거대한 차이 속에 살고 있다>, 강연을 바탕으로 엮은 <글쓰기의 감옥에서 발견한 것>이 출간되었었고, 이번 작품은 국내 출간되는 네 번째 에세이이다. <허삼관 매혈기>, <인생>, <제7일> 등 그의 소설들을 흥미롭게 읽어 왔기에 그러한 작품들과 전혀 다른 분위기의 산문은 어떨지 기대가 되었다.
이 책은 '문학과 음악을 넘나들며 자신에게 필요한 테크닉을 정신 없이 빨아들였던 청년기 위화를, 오랜 수업시대를 끝내고 이제 막 예술가로서의 자립을 성취한 30대 후반의 위화가 회고하고 있다. 아이작 싱어, 윌리엄 포크너, 루쉰, 카프카, 보르헤스 등 탁월한 작가는 물론, 말러, 차이콥스키, 브람스 등 위대한 작곡가까지, 위화 작가가 젊은 시절에 만난 예술가들과 그들의 작품들을 예리한 시각으로 분석하고 있어 흡사 비평집을 읽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너새니얼 호손과 쇼스타코비치는 1804년부터 1864년까지 살았던 미국인과 1906년부터 1975년까지 살았던 러시아인으로, 한 명은 문학 작품을 쓰고 다른 한 명은 음악 작품을 썼다. 완전히 다른 시대에 판이하게 다른 운명을 살았기 때문에 두 사람의 거리는 그들 사이에 놓은 한 세기보다 더 멀다. 하지만 내면의 의지를 들여다보면 두 사람이 똑같이 고집스럽고 빈틈없다. 그런 영혼의 유사성 때문에 완전히 다른 두 사람이 때때로 한 사람처럼 느껴진다. 너새니얼 호손과 쇼스타코비치는 신비한 동일성 덕분에 비슷한 방식을 취하고 시간만큼 긴 서술에서 동일한 클라이맥스를 경험했다. p.287
위화는 '윌리엄 포크너'에 대해서 '타인의 글쓰기에 가르침을 줄 수 있는 몇 안 되는 작가'라고 말한다. 마치 열여덟 편의 장편소설과 수많은 중단편소설을 단숨에 완성한 뒤 옥스퍼드나 멤피스에서 빈둥빈둥 돌아다니는 것 같다며, 기교 수준이 아니라 입신의 경지에 이른 서술의 능수능란함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그리고 한 작가의 창작이 다른 작가의 창작에 영향을 미치는 것에 대해서 문학이 계승된다는 관점으로 읽어 낸다. 장 폴 사르트르가 카프카를 읽고, 보르헤스가 오스카 와일드를, 알베르 카뮈가 윌리엄 포크너를, 보들레르가 앨런 포를, 유진 오닐이 스트린드베리를, 서머싯 몸이 도스토옙스키를 읽었을 때 역시 문학에서 매우 감동적인 만남의 순간이었을 것이라고 말이다.
위화는 이 책의 서문에서 굉장히 흥미로운 이야기를 했다. '한꺼번에 연주되는 음표의 활기찬 움직임과 달리, 글자는 한 줄 한 줄 조용하게 배열돼 있어 잠에 빠진 듯 조용하다고. 그런데 독서는 겉으로만 조용해 보이지 사실은 거세게 일렁이는 물결과도 같다'고 말이다. 독자는 누구나 자기만의 경험과 느낌으로 책을 읽기에, 사실 독서란 매우 개인적인 것이다. 글을 읽으면서 우리는 자신의 경험에 빗대어 책 속의 상황과 순간, 이야기를 소환하거나 예전에 다른 작품을 읽었던 기억들을 떠올리게 된다. 위화는 바로 이것이 '독서의 화성'이라고 말한다. 그는 자신이 오랫동안 자신의 이야기를 풀고 남의 이야기를 들었다고, 이 책에서 자신은 비평가가 아니라 독자 혹은 청중의 한 사람일 뿐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 책을 읽는 대부분의 독자가 생각할 것이다. 그가 작품을 읽고 해석하는 수준은 웬만한 비평가 못지 않게, 날카롭고, 깊이가 있다고. 특히나 후반부에 나오는 음악과 문학의 만남에 이르면, 그야말로 시선을 뗄 수 없을 만큼 그의 글에 사로잡히고 말 것이다. 너새니얼 호손의 <주홍 글자>와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7번>을 함께 읽어내는 대목은 정말 흥미로웠다.
쉽게 견해를 밝히는 사람은 남의 지식을 잘못 받아들이고 과거의 지식을 미래의 것으로 오해하기 쉽다. 그런 다음 그들은 웃음거리가 되어 끊임없이 회자된다.
스스로에 대한 믿음에서 견해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위화는 뛰어난 견해들은 늘 우회적으로 드러난다고 말한다.
아마도 자신의 글들에 대한 스스로의 해답이 아닐까.
위화의 글은 처음이다.
그가 중국의 유명한 작가이고 그의 작품들이 영화화되었다는 것도 나는 이번에야 알았다.
허삼관 매혈기와 인생을 나는 영화로 보았기 때문이다.
영화는 감명 깊게 봤어도 영화 원작은 읽어 볼 생각을 못 했다.
작품이 아닌 산문으로 만난 위화.
문학을 선율로 음악을 서사로 말한다.
어떻게 읽고 어떻게 들어야 이렇게 장대한 글들이 나올 수 있는 걸까?
어떤 작가의 창작이 다른 작가의 창작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이미 문학 속 글쓰기의 연속성으로 자리 잡아, 오래전부터 내려오는 감정과 사상에 지속성을 부여한다. 여기에는 누가 이익을 얻는가의 문제도 없고 누가 가려지는가의 문제도 없다.
그의 글엔 많은 작가의 이야기가 나온다.
작가들은 그의 글에서 서로 이어져 있다.
한 명의 작가를 이야기하는데 결코 한 사람의 일생만 이야기하지 않는다.
위에 말처럼 글쓰기의 연속성으로 인해 서로서로 영향을 받기에 어느 누구도 독창적일 수 없다.
장문의 산문을 통해 그가 말하는 작가들을 읽어가며 얼마큼 읽어야 이렇게 쓸 수 있는지를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이렇게 깊게 사색하고, 심층적으로 살필 수 있다면 한 작품을 얼마나 자세하게 여러 번 읽은 걸까?
그저 읽었다는 것으로 만족했던 나 자신이 부끄러워지는 순간이었다.
음악의 서술에서 그는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7번> 과 <주홍 글자> 를 비교해서 설명한다.
갑자기 이 음악을 틀어 놓고 주홍 글자를 읽어야겠다는 강박이 생긴다.
그가 느낀 것을 나도 느껴보고 싶어서.
많은 작가에게 평생의 글쓰기를 관통하는 무엇이 있다면 언제의 방식과 서술의 스타일일 것이다. 그것들은 다양한 소재와 다양한 인물 배경 속에서 때로는 분산으로, 때로는 암시로, 또 때로는 툭 불거진 선명함으로 반복해 등장한다.
이 산문은 위화의 30대에 쓰여진 글들이다.
그의 인생에 음악이 끼어든 시기는 중학교 때였지만 선율이 아닌 음표가 그를 사로잡았다.
그는 루쉰의 광인일기를 필사하고 그 위에 음표를 그렸다.
광인일기를 음표로 만든 그 노트는 사라져서 그 음표들이 어떤 선율을 지녔는지 알 수 없지만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것만으로 위화가 보통의 사람을 넘어서는 무언가를 지닌 사람이라는 걸 느낄 수 있다.
음악의 서술을 문학의 선율로 흐르게 만드는 솜씨는 아무나 흉내 낼 수 없다.
이 사람의 심오함의 깊이를 이 한 권의 책으로 다 알기 힘들다.
이 책 한 권에 들어있는 글들을 다 이해하기도 나로서는 벅차다.
그래서 또 다른 긴 목록이 생겼다.
이 책에 실린 음악과 연결되는 책들을 들으며 읽어 보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언젠가
내 독서의 깊이가 깊어졌을 때
위화의 목록들이 내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가늠해 보는 것도 즐거울 거 같다.
고전에 조예가 깊고, 클래식을 가까이하는 분들에겐 참 와닿을 소재가 많은 이야기다.
고전을 잘 모르고 클래식도 잘 모르는 나 같은 사람에겐 투지를 불러일으키는 글이다.
무언가로 깊이 들어가고 싶게 만드는 위화의 글.
제가 보기에 차이콥스키는 도스토옙스키에 훨씬 가깝습니다. 두 사람 모두 19세기 말의 절망을 드러내고, 그 한없이 깊은 절망과 민족성을 모두 강렬한 개인성으로 표현하지요.
마지막 인터뷰 내용에서 차이콥스키와 도스토옙스키가 서로 비슷하다는 의견이 인상적이다.
차이콥스키의 음악을 들으며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을 읽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둘 다 어려운 선율이고 서술이지만 도전의식을 불러일으키는 문장들이 나를 다그치는 거 같다.
누군가의 글이
나의 깊이에의 갈망을 건드린 건 꽤 오랜만의 일이다.
진정성 있는 책 읽기가 하고 싶어졌다.
허삼관 매혈기의 위화 작가의 산문집이라는 사실만큼이나 놀라웠던 것은 제목이었다.
아귀가 안 맞는 듯한 문학과 선율. 음악과 서술...
문학은 서술과, 음악은 선율과 맞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며 책을 읽기 시작했다.
사실 선율이나 음악이라는 단어를 보고, 위화가 음악을 토대로 쓴 평론문(?)정도의 글이라 생각했었다.
물론 음악 관련된 글들이 있긴 하지만, 그의 머리말 서두에 나오는 대로 선율이나 화성에 해당하는 의미를 차용한 제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러 개의 음이 어우러져서 화음을 만들고, 음악의 선율을 통해 한 곡의 음악이 만들어지듯이, 그의 글 또한 화음을 만들어낼 수는 없지만 개개의 음과 같은 한 줄 한 줄의 문장이 또 다른 작품을 만들어 이야기가 된다는 그의 글이 제목과 잘 어울렸다.
산문이라는 형식으로 그가 쓴 글이 모여 있는 이 책에는, 타인의 작품을 읽으면서 혹은 떠오른 글이 위화만의 색으로 어우러져서 드러난다. 덕분에 위화의 글도, 그의 글을 통해 소화된 타인의 글도 함께 맛볼 수 있다.
수필이라기도, 평론 글이라기도, 에세이라기도 애매한 성격을 띠고 있는지라 산문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것은 아닐까?
글 말미에 이 글을 쓴 날짜가 들어있다. 대부분이 1990년대의 글이기에, 이 글이 책으로 묶여서 나오는데 상당한 시간이 소요된 것 같다. 그럼에도 옛스럽거나, 지난 이야기 같지 않은 것은 변하지 않는 이야기들이 담겨 있어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물론 작가이기 전에 위화라는 사람이 느낀 예술이나 책에 대한 이야기지만 말이다.
뒤 쪽으로 갈수록 음악의 이야기가 많다. 마지막 부분에 실린 인터뷰 글을 보면 위화가 음악에 상당한 조예가 있다는 사실 또한 알 수 있다.(어쩌면 그래서 이 책의 제목도 그런 게 아닐까?^^;)
음악을 사랑하고, 글을 사랑하는 위화 작가의 모습이 부담스럽지 않게 드러난 글이었다.
누군가와 비교하기는 그렇지만, 그의 글을 읽으면서 음악에 대한 조예가 상당한 어느 작가가 떠올랐다.
책 띠지에 적힌 한 줄이-생(生)을 헐어 쓴 글의 힘 위화의 산문은 그의 다른 일가(一家)이다.-이 책을 읽는 내내 딱 맞는 말이라는 생각이 드는 건 기분 탓은 아닐 것이다.
소설과 전혀 다르지만, 그렇다고 동떨어진 느낌이 아니었기에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