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텍쥐페리는 한국인들이 대단히 좋아하는 작가다. 그의 작품을 들 때 많은 이들이 <어린 왕자>, <인간의 대지>, <야간비행>을 거론한다. 그러나 생텍쥐페리에게는 이런 작품들 말고도 뛰어난 작품이 있다 바로 <성채>이다. 어느 이는 <성채>를 이야기하면 A.J. 크로닌의 <성채>나, 카프카의 <성>을 이야기 하는 경우도 있다. 잘못 알고 있는 것 아니냐는 반응이다.
<성채>는 카프카의 <성>과는 전형 다른 세계를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다. 생텍쥐페리의 많은 작품들이 그렇듯이 <성채>도 그의 문체적 특징을 그래도 확인할 수 있다. 작품에는 한 사람의 지도자가 등장하는데, 그의 시선을 통하여 세상을 읽어나가는 구성 형식을 갖고 있다.
“성채여, 따라서 나는 배를 만들 듯 너를 만들었다. 너를 꼼짝 못하게 세워둔 뒤 한껏 치장하여 순풍 간은 시간 속에 풀어 놓아 주었다.
배가 없으면 사람들은 영원성을 잃어버릴 것이다.
하지만 나는 내 배에 어떤 영향이 미칠지 알고 있다. 배라는 건 새까만 바다에 의해 요동치기 마련이다. 비단 바다뿐 만은 아닐 것이다. 다른 사원 즉 거짓도 진실도 아닌, 온당하지도 부당하지도 않은 또 다른 사원을 만들기 위해 언제라도 이전 사원에서 돌을 빼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채> 중에서 / 배영란 역, 현대문학, 32∼33쪽
성채는 인간이 사는 세상이다. 생텍쥐페리는 성채를 배로도 비유하고 있다. 그 배는 어떤 가? 예측할 수 없는 변수들이 가득한 큰 세계 속에 부유하는 존재이다. 그 배를 생텍쥐페리는 다시 사원으로 비유하고 있다. 사원은 또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의 정신이 만든 무형의 세계이다. 그 안에는 정치적 이념, 신념, 세상을 재편하는 방식, 시스템 등이 모두 녹아들어 있다. 실제로 인간은 무수한 사원을 만들었다. 기독교, 불교, 이슬람교, 그보다도 더 무수한 종교들. 그뿐인가. 자본주의 민주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무정부주의, 그보다도 더 무수한 주의들. 예술, 문학도 마찬가지다. 모든 영역에서 삶의 모든 단면에서 인간들은 사원을 만들었다. 또 필요에 의해 이전의 사원들을 만든 무형의 재료들을 이용하여 자신들만의 사원을 만들어낸다. 인간의 역사는 그렇게 늘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생텍쥐페리는 인간들의 그러한 면들을 한 왕(王)의 입과 생각을 빌려 글로 풀어내고 있다. 생텍쥐페리의 탁견을 여실히 확인할 수 있는 뛰어난 작품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사람들은 이 작품을 잘 알지 못한다.
“저들이 함께 탑을 쌓게 하라. 그리고 저들을 형제로 만들라. 하지만 저들이 서로 싫어하길 바란다면 저들에게 곡식을 던져주라.” <성채> 중에서 / 배영란 역, 현대문학, 69쪽
좋은 책을 읽는 일은 함께 탑을 쌓는 일과 같다. 무수한 책들이 쏟아져 나오는 가운데 좋은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다. 쓰레기 같은 책들이 너무 많은 세상이다. 누군가 자꾸 사람들 속에 곡식을 던지는 때문이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그 곡식들은 싹을 틔울 곡식이 아니라 인스턴트식품들일 뿐이다.
번역이 묘하게 옛날말투라 글이 무겁게 느껴지는데, 실제로도 글이 가볍지만은 않은게 읽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나 칼릴 지브란의 '예언자'같은 류라면 같은 류인데, 저 책들에 있는 줄거리조차 없이 '말씀'만을 집중적으로 나열해 놓았다면 무게감이 비슷할 것 같습니다.
무겁다 싶은 글에, 많지는 않지만 환한 삽화들이 중간중간 끼어있어서 조금 당황스러웠습니다.
그림이 예쁘기는한데, 글의 무게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아 불필요해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