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는 없지만 성경 속 이야기는 너무 많이 들어서 늘 궁금했던 것.
하느님이 자신의 모습으로 아담을 먼저 만들고 아담의 갈비뼈로 하와를 만들었다는 이야기.
존재함이 시작된 이후로 여성은 남성에게 예속된 존재라는 느낌을 지금도 깨끗하게 지울 수 없는 걸 보면
생각하는 사람으로서 건강하게 분노하고 차별과 혐오에 대해 목소리를 내는 일이
계속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그래서 이라영 사회학자의 독서에세이가 문예출판사에서도 나온 것일테죠.
전 세계 어디를 가나 남자들의 짝이라는 좁은 틀에 갇혀서 저평가 받았던 여성의 역사가 있습니다.
성별이나 인종이라는 차별과 배제로 인해 주류에서 밀려나
자신의 목소리를 제대로 내지 못하는 이들을 대변하는 미국의 작가 21명의 작품들과 생애를
<여자를 위해 대신 생각해줄 필요는 없다> 에서 만났어요!
저자의 서문까지 합치면 모두 22개의 글, 21명의 작가와 그 작품들을 독서에세이라는 타이틀로 만났는데
사회학자 이라영의 사회비평까지 더해지다 보니 가볍게 읽고 넘겨지진 않더라구요.
곱씹고 필사하며 오랜 시간 붙잡고 읽었습니다.
미국을 배경으로 한 작품들을 쓴 21명의 미국 시인과 소설가들 개개인의 삶의 여정으로 끝나지 않아요.
아니, 이것은 이라영 사회학자가 하고 싶은 말을 뒷받침해 주는 좋은 소스로 작용한 것처럼 보이구요.
대한민국 사회의 불합리하고 부조리한 현실들을 작품과 곁들여
사회비평을 내놓은 것이 이 책을 쓴 진짜 이유 같았어요.
인문학적, 철학적 질문과 생각들도 곳곳에 드러나 있어서
개인적으로 참 만족스러운 책이었습니다.^^
<여자를 위해 대신 생각해줄 필요는 없다> 제목처럼 여성 작가들이 주인공이겠다 싶었는데
2명의 남성 작가가 19명의 여성 작가들과 함께 라인업에 들어가 있더라구요.
이 부분은 성별 상관없이 월트 휘트먼과 비엣 타인 응우옌도
저자의 분노와 소통하는 작가와 작품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다루었다는 설명이 있어 수긍하기 어렵지 않았습니다.
모든 책들이 그렇듯이 완벽하게 저자와 독자가 서로 동의하는 책은 사실 좋다고 볼 수도 없겠죠.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잖아요.
<여자를 위해 대신 생각해줄 필요는 없다> 를 읽다 보면
시종일관 사회적 현실에 대해서 저자가 문제의식을 드러내는 사회비평서이다 보니
독자마다 다른 포인트에서 불편한 부분들이 있을 수도 있고 전혀 자각하지 못하고 그냥 넘어갈 수도 있을 거예요.
여기서 짚어두고 싶은 것은.... 불편한 지점이 있다는 것이 책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생각지 못한 지점을 저자가 짚어주면 새로운 관점을 발견할 수 있다는 건 독자로서 너무 좋은 거죠.
이런 이유로 저는 책을 읽는 것이기도 하구요.
얼마든지 책을 읽으면서 저의 고정관념을 뒤흔드는 생각이 담긴 구절을 만나게 되면
비판적인 사고를 발휘하면서 수용하거나 숙고할 마음의 자세도 되어 있습니다.^^
그런 부분으로 하나 얘기하고 싶은 것이 루이즈 글릭 편.
박원순 사망 후 권력형 애도에 대한 부분은 저도 읽으면서 여러 생각이 들더라구요.
과로사를 당하는 택배기사분들을 향해 저자는 '작은 개인들' 이라고 칭했고
그들의 목소리가 나올 창구가 특별히 없었던 것과 비교해서
조희연 교육감의 '친구 애도'가 일간지에 실린 것을 짚어주었거든요.
영향력 있는 인물이 사망했지만 성폭력 사건의 가해자로 인식되는 상황하에서
부고 소식을 일간지에 싣는 것은 매우 부적절한 권력행위라고 보는 시각이라는 것이죠.
적극적으로 그에 대한 상실감을 드러내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가.....라고 물어보는 거 같았어요.
슬픔을 드러내는 데에도 평등하지 못함에 대한 분노가 읽혀지는 지점은 저역시 다르지 않았구요.
어떤 죽음은 언론에서 적극적으로 알리고 어떤 죽음은 전혀 알려지지 않을 뿐 아니라
애도를 방해받는 일까지 일어나고 있다는 걸 듣게 되면 참 말문이 막히는 일이죠.
소시민들의 죽음과 비교할 때 죽음이란 것도 이렇게 평등할 수가 없는 것인가 싶어
특별히 몰입하며 읽은 부분이기는 했습니다.
여기서 나아가 루이즈 글릭의 시 <애도> 를 읽으면서 좀 더 깊이 생각하게 되었어요.
당신이 갑자기 죽은 후
그동안 전혀 의견 일치가 되지 않던 친구들이
당신의 사람됨에 대해 동의한다.
실내에 모인 가수들이 예행 연습을 하듯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당신은 공정하고 친절했으며 운 좋은 삶을 살았다고.
-루이즈 글릭, <애도>-
개인적으로 '애도한다는 것' 은 뭘까 이따금씩 생각하곤 합니다.
그래서 롤랑 바르트와 김진영의 애도일기를 기웃거리기도 하구요.
루이즈 글릭의 <애도> 와 함께 풀어가는 저자의 글에서 좀 더 깊이 들여다보자고 하는 거 같았죠.
"애도는 모든 것을 뒷전으로 한 채 죽음을 숭앙하는 것이 아니다.
맹목적인 애도는 오히려 죽음을 삶과 분리시켜 신비화한다."
"무조건 죽은 자를 칭송하는 것이 죽음에 대한 예의인가" 라고 질문을 던지는 것 같아요.
"죽음은 모든 인간에게 평등한가"..... 후자는 분명 아닌거 같구요 아직까지 한국 사회를 보면 ㅠㅠ
저자가 루이즈 글릭의 시 <애도>를 인용하면서
"상실의 정체를 정확히 알려는 태도" 라고 애도에 대해서 정의하고 있습니다.
죽음 그 자체를 미화하는 것을 경계할 필요가 있다는 뜻으로 읽혀지기도 해요.
너무나 상투적인 말이지만 그래도 저는 죽음을 스스로 선택했든,
타의에 의한 죽음이든, 자연사이든 사람의 죽음은
그 자체로 충분히 애도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사회적 동물인 인간은 타자를 통해 순환할 수 있다는 저자의 생각에서
사회학자의 민감하고도 날카로운 시각이 엿보이기도 했습니다.
애도에 대한 정의를 나타내는 구절에도 있듯이 상실의 정체를 정확히 알고자 하는 노력은
살아있는 사람들의 몫이겠죠.
미국 사회에서 배제된 자들은 입이 있어도 목소리를 내기 어렵죠.
그들의 고통에 공감하고 연대하고자 하는 작가들이
끊임없이 목소리를 내고 있는 미국 작가들이 활동한 도시가
이렇게 미국 지도로 보여지니까 더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더라구요.
소설을 너무 좋아해서 소나무 출판사에서 나온 <미국의 단편소설 작가들> 이라는 책을 재밌게 읽었는데
미국문학은 미국의 지역색을 나타내는 작가가 두드러진다는 특징이 있다는 것이었어요.
그 곳에서 나고 자란 작가들이 그 지역의 특징과
인간의 보편적인 주제를 인종과 성별에 관한 문제의식과 결합해서
작품을 통해 생각하는 사람으로 살아온 여정을 또 한번 확인할 수 있었어요.
메사추세츠에 에밀리 디킨슨, 실비아 플라스.
에밀리 디킨슨은 영미시 강좌를 들을 때 겉핥기로 접했었고
실비아 플라스는 민음사의 <쓰고 싸우고 살아남다> 를 통해 처음 접하고 인상깊게 남아 있었는데
또 다른 시각으로 접할 수 있어 좋았어요.
마음산책에서 나온 <벨 자> 라는 작품 한번 도서관에서 빌려보려고 제목 적어두었습니다.^^
펜실베니아의 베트남계 미국작가 비엣 타인 응우옌이라는 이름도 한 두번쯤 들어봤을 뿐이었는데
토니 모리슨의 영향을 많이 받은 작가이고
베트남전쟁에 대해서 미국이나 한국작가의 시각이 아닌,
당사자 베트남의 정서로 소설을 남겼다고 하니 <동조자> 라는 작품도 궁금하더라구요.
오하이오의 토니 모리슨은 <빌러비드> 를 진작부터 읽고 싶어서
문학동네 10주년 특별판으로 사뒀는데 아직입니다....
노예제도가 사라지기 전 19세기, 감옥에 가거나 죽었거나 사라진 남자들이 있는
'여자들의 집' 에서 벌어진 이야기.
읽고 쓰는 교육을 받을 수 없었던 흑인 노예들이지만 말하기의 힘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는지
설교하면서 사람들을 끌어 모으는 작중인물의 능력을 보면서
억압된 환경에서도 자신의 목소리를 내려는 인간의 생존력은 역시 대단하다는 생각도 해봅니다.
블루스, 재즈와 같은 음악들이 흑인의 영혼일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아픈 역사와 그들의 이야기를 모두에게 알리고 소통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구요.
토니 모리슨은 똑같이 흑인 여성들도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 소중한 딸들이라는 것을
<빌러비드>라는 문학에 보여주고 있고, 또 애도하고 있는 거라고 말하는
이라영 저자의 생각에 저도 따를 의향 100% 입니다.
특별히 <빌러비드> 는 내일 밤 10시에 줌온라인으로 블로그 이웃님이 주최하는
혼자독서 모임에 어떤 책으로 참여해볼까 했었는데 이 책으로 결정했어요.^^
한시간반 혼자서 독서하고 30분쯤 책 이야기 나누는 시간에 <빌러비드> 로 이번에는 꼭 완독할랍니다~~
미국 남부에서는 앨라배마의 젤다 세이어 피츠제럴드, 루이지애나의 케이트 쇼팽,
플로리다의 조라 닐 허스턴에 관한 글이 재밌었어요.
스콧 피츠제럴드의 아내라는 타이틀로 더 유명한 젤다 세이어 역시
작가인데도 불구하고 미국의 재즈 시대 '노는 여자'라는 이미지,
남편을 고생시킨 여자라는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시각으로 인해 삶이 참 힘들었던 신여성이었어요.
젤다 세이어가 돋보이는 지점은 당시 미국 남부의 보수적인 사회의 전통에 자신을 맞추지 않고
욕망을 드러내며 인생을 즐기는 신여성 '플래퍼' 였다는 거죠.
당시 플래퍼에 대한 인식이 열려 있지 않다보니 억압하는 분위기가 있었고
남편인 스콧조차도 젤다가 책을 낼 때 젤다의 소설을 3류라고 했다고도 하네요.
<위대한 개츠비> 제가 좋아하는 3대 소설중 하나이고 참 좋아하는 작가인데
응원좀 해주지.....이런 모습은 좀 별루다 .....^^;
역시 다른 입장의 관점도 들어봐야 하나봐요.
당시 사람들은 젤다의 글을 읽어보지도 않고 가십거리로만 사용했는데
젤다에 대한 평소가 스콧에 가려져서 분명히 왜곡된 경향은 있네요.
각자의 시각에서 보면 또 이야기가 달라지는 법이니까요.
루이지애나 케이트 쇼팽은 예전에 줌온라인강좌로
<각성> 이라는 작품과 그녀의 생애를 접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도 이런 소설을 쓴 작가인데 왜 이렇게 알려지지 않았을까 싶었는데
점점 이렇게 케이트 쇼팽과 각성 이라는 소설을 다루는 책들이 나오고 있네요.
이디스 워튼을 먼저 알고 있었는데 케이트 쇼팽이 언니였네요.^^
<각성> 이라는 소설도 이번에 제대로 완독해보고 싶은 소설이예요.
자아의식이 뚜렷한 여성들의 삶을 들여다보면
여성을 구속하는 보수적이고 불합리한 사회제도와
남자들의 지배하에서 벗어나는 과정에 고통이 따르긴 해도
각성이 일어난 여성이 스스로 정한 삶이기에 불행해 보이지는 않는다는 생각이 듭니다.
<각성> 의 주인공 에드나의 삶의 여정, 하루 빨리 만나보고 싶어지네요.
케이트 쇼팽은 여성의 인권뿐만 아니라 인종문제에도 관심이 있어서
<데지레의 아기> 라는 단편을 소개해줬는데 이 작품도 읽고 싶어져요.^^
케이트 쇼팽의 재발견입니다!
플로리다의 조라 닐 허스턴도 재발견한 작가예요.
<그들의 눈은 신을 보고 있었다> 의 주인공 재니는 3번의 결혼을 하고 3명의 남편을 통해
자아인식을 하며 성장하는 인물입니다.
소설 속 대사를 보면 왜 책 제목이 <여자를 위해 대신 생각해줄 필요는 없다> 인지 알 수 있어요!!!
"여자들과 아이들, 닭과 암소들에게는 대신 생각해 줄 사람이 있어야 해.
그럼, 분명히 그것들은 스스로 생각할 줄을 몰라."
법과 문화적 판결은 죽고 죽인 사람의 성별과 색깔에 따라 달라지는 당시 모습을 반영하고 있어요.
차별적 사회구조가 견고했던 시대에 내 운명의 주인으로 살기란 매우 어려운 일일거 같아요.
아무리 자의식이 강한 재니였을지라도 혼자서는 온전히 나로 살아가기 어려웠을텐데
결정적인 순간에 조라 닐 허스턴과 함께 가부장제의 폭력에 맞서서
아름다운 연대를 그려낸다고 하니 더더욱 직접 읽고 싶어집니다.
조라 닐 허스턴 말고도 재발견한 작가들이 아직 더 있어요....ㅋㅋ
와이오밍의 애니 프루는 가장 첫 번째로 소개된 작가였는데요.
서부영화 <용서받지 못한 자> 의 배경이면서 동시에 멋진 풍경을 보여줬던 영화 중에
<브로크백 마운틴> 의 원작 소설가라는 것도 새롭게 알았어요.
와이오밍이라는 거칠고 남성적인, 문명과는 거리가 먼 이 지역사회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
비주류이며 떠도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고
당시 암울하고 모순적인 시대를 그려냈던 애니 프루.
문학동네에도 <시핑 뉴스> 가 이미 있었더라구요. ㅋ
나는 몰랐네.....
마지막으로 캘리포니아의 옥타비아 버틀러.
간간히 추천받았던 작가였지만 저에게 이렇다할 인상을 남기지 않았었는데
이번에 제대로 흥미가 생겼습니다.
SF소설은 사실 큰 관심은 없어서 김초엽 작가의 소설책도 집에 있지만 보는둥 마는둥이었거든요...ㅋ
근데 옥타비아 버틀러의 1979년작 <킨> 이라는 소설 소개를 보고 완전 읽고 싶어졌어요!
현대 미국의 흑인 여성이 노예제도가 있는 과거로 시간여행을 하면서 벌어지는 타임슬립을 다룬 소설.
그리고 주로 시간여행자는 남성이었는데 버틀러의 <킨> 에서는 흑인여성의 시각으로
소설을 끌고 간다는 것도 소외된 약자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이 고무적이죠.
옥타비아 버틀러의 상상력에 기대를 해봅니다.
소설제목이 왜 <킨> 인가 했더니 Kindred에서 온 친족이라는 의미더라구요.
이거 읽고 나서 좋았으면 김초엽 작가의 소설로 아마 자연스럽게 넘어가게 될듯 ㅎㅎㅎ
언급하지 않은 작가들은 너무 생소해서 한번 더 읽어서 더 친숙해져야겠어요.^^
잘 알려지지 않은 작가들이어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작가나 작품보다
이라영 사회학자의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을 더 많이 드러내는 편들도 간간히 있었습니다.
레슬리 마몬 실코라는 작가는 생소했지만
그 속에 남겨진 저자의 인문학적인 메시지들이 너무 좋아서 필사해둔 문장이 있어요.
P.304
"인간다움이나 인간적이라는 말의 활용방식에 썩 동의하지 않을 때가 많다.
인간은 머리가 좋아 세상을 지배하고 살 뿐,
인간적인 것이 더 올바른 것이라 생각지 않는다.
인간이기에 얼마나 잔인할 수 있는지 직시하는 게 오히려 낫다.
그래야 인간다움을 넘어 기본적인 생명에 대한 존중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만물의 영장이라 자만하기보다 무자비한 최상위 포식자로서
인간이 자연을 얼마나 폭력적으로 대하는지 자각해야 한다."
기회의 땅이라는 수식어와 동시에 차별과 혐오가 팽배한 사회라는 상반된 평가가 존재하는 나라, 미국.
너무나 다양한 인종과 종교적 신념이 다른 이들이 섞여 있다 보니
다름을 인정하지 못할 때 차별과 배제가 일어나는 건 어찌 보면 또 당연한 일인 것도 같습니다.
나라는 다르지만 인간이 만들어가는 사회이다 보니
권력과 부의 가치만을 추종하거나 전통에 가려져 인권을 보지 못하는 이들이 또 존재하기도 하구요.
작가들마다 뿌리를 둔 그 지역의 사회문제와 작가들의 작품을 통해서
보편적인 인간의 삶에 대한 주제를 짚어주고 있어서 이라영 독서에세이를 읽으면서
다시 한번 인간의 한계를 똑바로 인식하고 겸허한 자세로
생명과 자연을 포용하자는 평소의 모토를 한번 더 새기게 됩니다!!
이라영 작가 본인이 직접 경험한 에피소드들로 시작해서 작가와 작품 이야기로
자연스럽게 연결되어서 글의 흐름도 좋게 다가왔어요.
흑인, 여성, 성소수자, 이민자.....
사회의 오랜 전통과 억압으로부터 견디어 내고 또 살아남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보편성을 띄고 세대에 걸쳐 전해지다 보면 결국은 고전이 되겠죠.
남성 작가들에 가려져서 온전히 읽혀지지 않았던 여성 작가들의 작품이
이제는 더 폭넓게 읽혀지면 좋겠습니다, 이라영 저자의 바램처럼^^
차별과 혐오로 동의할 수 없는 이 세계에 제대로 분노하기 위한 글쓰기.
이 책이 좋았던 것은 차별과 혐오의 시대를 향해 분노의 목소리를 내는데 그치지 않고
서로의 안녕을 바라며 연대하고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희망을 품자는 것입니다.
"몸을 움직여 이야기를 전하러 가는 그 '북우먼'들처럼
나도 꾸준히 몸을 움직이고 생각을 움직이는 사람이 되길 소망한다.
그렇게 성실하게 세계를 확장하는 것이 아름다움이라 믿는다."
-<여자를 위해 대신 생각해줄 필요는 없다> 서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