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사에 대한 관심은 많지만 사실 제대로 잘 알고 있는 것은 없다. 로마인 이야기를 통해 로마의 건국 신화라거나 시작점에 대해 오래전에 읽었지만 로마인 이야기는 로마의 위대함만을 이야기하는 로마 만세의 이야기여서 - 아니, 사실 그렇게 로마를 인식하게 되어서 로마 여행을 갔을 때 부러 아피아가도를 찾아가기도 했었다. 뭐하는 짓이냐,는 표정으로 쳐다보는 동행에게 잠시 민망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맨발로 이천년이 넘은 길을 걸어보며 좋아했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몇년 전 마스터스 오브 로마 라는 소설의 첫부분을 읽으며 로마가 어떻게 이루어졌는가,에 대해 조금 더 깊이있게 들여다볼 수 있었다. 문제는 그 소설의 흐름에 대한 기억과 역사의 흐름에 대한 간극이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생각이 엉켜 있는 걸 풀지 못하고 막바로 리비우스 로마사 3권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역사의 흐름은 단절된 것이 아니지만 그래도 커다란 사건을 중심으로 흐름의 중간에 끼어들어 책을 읽는 것은 괜찮으리라 생각하고 리비우스 로마사의 21권부터 - 그러니까 이 책 리비우스 로마사 3을 읽기 시작하는 것이 어렵지 않을 줄 알았는데 솔직히 처음에는 적응이 되지 않았다. 포에니 전쟁으로 알고 있는 - 리비우스가 첫머리에 밝히고 있듯이 '로마 역사에서 가장 기억에 남을 만한 전쟁을 다룬' 이야기인데 너무나 낯설게도 한니발의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다. 마치 일본의 역사 속에서 명량해전에 대한 이야기를 읽는 듯한 느낌인 것 같은?
그런데 포에니 - 이건 카르타고를 일컫는 로마어라고 한다 - 전쟁이라고 하면 단연 한니발이 주인공일텐데 어색하다는 것은 내가 너무 일방적인 시선으로 먼나라의 역사를 바라본 것임을 절감하며 책을 읽기 시작했다. 솔직히 어색함을 넘기고 나면 역사서라기보다는 한편의 역사 대하 드라마를 보는 듯한 느낌으로 이야기속으로 빠져들어가게 된다. 한참 재미있게 읽어나가기 시작하다가 주중에는 집중해서 책을 읽을 시간이 없어 조금씩 쪼개 읽다보니 전체적인 흐름이 끊겨 온전히 빠져들 수 없는 아쉬움이 있었지만 리비우스 로마사는 소설 이상의 흥미로움으로 읽을 수 있는 책이라는 것은 장담할 수 있다.
포에니 전쟁이라고 하면 한니발과 코끼리밖에 기억하지 못하는 내게 칸나이 전투에 대한 자세한 묘사는 흥미로움 그 이상이다. 사실 이 부분이 좀 어색하기도 했었는데 마스터스 오브 로마를 읽으며 전투 경험이 많은 호민관의 조언보다 명예와 승리에 대한 욕심으로 무리한 전투를 벌이는 지휘관의 형편없는 전략전술은 얼마나 많은 위대한 로마병사와 장군을 죽음에 이르게 했는가에 더 집중을 했었는데 리비우스 로마사는 한발 물러선 상태에서 전쟁을 바라보는 듯한 느낌이라 한번 더 생각하며 로마의 전쟁을 바라보게 된다.
리비우스의 이야기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온갖 약탈이 가능하고 승리를 취할 수 있었던 1차 포에니 전쟁때보다 오히려 2차 포에니 전쟁에서의 한니발이 더 훌륭하다고 표현 한 것이다. 용병으로 이루어진 군인들을 통솔하고 본국의 지원도 없이 물자를 조달할 수 있는 약탈의 기회도 가질 수 없는 지역에서 한번의 반란도 없이 , 그러니까 오직 돈을 받기 위해 한니발의 군인으로 전쟁에 뛰어든 용병들이 급여지급이 늦춰지고 식량이 부족한 상태에서도 단 한번의 반란이 일어나지 않는 상황을 만들어낸 한니발의 위대함에 대해 '그의 주변 모든 것이 몰락으로 빠져드는 중이었는데도 여전히 후광이 남아있었다'(707)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보다 더 위대한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에 대한 이야기, 조금은 다른 결이지만 한니발의 만찬에 초대되어 그를 독살하려는 스키피오에게 자신의 심장을 먼저 뚫어야 한니발의 심장에 칼날이 꽂힐꺼라는 스키피오 부자의 이야기, 18살(이거나 혹은 19살이거나 여전히 십대인 것은 똑같지 않은가)에 전투에 참가하고, 시칠리아의 정예부대 300명을 만들어 낸 일화라거나 그의 공명함과 현명함을 보여주는 이야기가 더 많이 기억에 남기는 하지만.
역사의 이야기에 대해서는 백과사전을 보면 오히려 더 쉽게 이해를 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러한 지식이 평면적이라고 한다면 리비우스의 로마사를 읽는 것은 입체적인 영화를 글로 읽는 느낌이 들게 된다. 리비우스 로마사를 읽은 후 읽다가 사정이 있어 끊긴 후 다시 집어들지 못한 마스터스 오브 로마를 다시 읽기 시작한다면 훨씬 더 흥미진진하고 이해하기 쉬운 로마의 역사를 알 수 있게 될 것 같다. 예전에는 그저 단순히 아피아 가도의 돌덩이에 발의 감촉을 느끼는 것으로 만족했다면 언젠가 다시 로마로 가게 된다면 그 길을 걸어다녔던 로마의 영웅들을 떠올리며 이천년이 넘는 세월의 흐름에 담긴 역사를 느껴보고 싶어진다.
원제목은 로마사인 리비우스 로마사는 기원전 27년에서 25년 사이, 고대 로마의 역사가 티투스 리비우스가 저술하기 시작한 로마의 역사이다.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는 고대 로마 역사가다. 비슷한 나이인 아우구스투스와 우정을 나누었으나 정치생활과는 인연을 맺지 않고 142권이라는 방대한 《로마사》 저술에 몰두하였다.
소실되지 않은 리비우스의 로마사는 다음과 같이 구성 됐었다고 알려져있다.
1 ~ 5장 ? 로마의 개국 신화, 로마 왕정 시대 그리고 로마 공화정의 수립부터 골족에 의한 정복(bc.753~bc386)
6장 ~ 15장 ? 이탈리아 반도의 복속과 카르타고와의 분쟁 이전(11장부터 15장까지는 결락. bc.387~bc264)
16장 ~ 30장 ? 제1, 2차 포에니 전쟁(16장에서 20장까지는 결락, 기원전 264년부터 201년까지)
31장 ~ 45장 ? 기원전 167년까지의 마케도니아 및 동방 왕국들과의 전쟁(기원전 201년부터 167년까지)
ㅡ밑으로는 소실된 장들이다.ㅡ
46장 ~ 70장 ? 기원전 90년, 동맹시 전쟁의 발발까지
71장 ~ 90장 ? 술라의 죽음까지(bc.90~bc.78)
91장 ~ 108장 ? 갈리아 전쟁까지(bc.78~bc.50)
109장 ~ 116장 ? 로마 내전부터 카이사르의 죽음까지(bc.49~bc.44)
117장 ~ 133장 ? 안토니우스의 죽음(bc.44~bc.30)
134장 ~ 142장 ? 아우구스투스의 통치(~bc.9)
리비우스 로마사 3은 3번째 책이라 그런지 앞에 이런저런 설명 없이 바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문득 열 페이지 정도 읽고 나서는 이게 정녕 기원전에 쓰여진 역사서인가 싶었다. 술술 잘 읽히는 느낌 ^^
세계사를 한 번 본 사람들은 로마 제국이 방대한 영토를 지배했으며 오랫동안 번성했다는 걸 알 것이다. 그리고 로마의 문화는 유럽과 아프리카, 중동 각지에 퍼지며 후대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언어, 종교, 예술, 건축, 철학, 법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로마의 입김이 미쳤으며, 특히 로마에서 사용되던 라틴어는 로망스어로 분화되며 유럽 거의 대부분의 권역에서 사용되게 되었다. 또한 로마의 체계적인 법률은 후대에까지 널리 이어지며 나폴레옹 법전, 미국 헌법 등에 계승되었으며 전세계 민주주의의 근간을 이루며 널리 사용되었다. 그런 로마의 역사를 되짚어 보는 것은 우리가 앞으로 맞이할 이런 저런 사건들에 어떻게 대응하면 좋을지에 대한 교훈을 준다.
*리딩투데이를 통해 출판사의 지원을 받은 도서입니다.
가장 정통한 로마 역사라고 인정받고 있는 로마의 위대한 3대 역사가 '티투스 리비우스'의 로마사 3권이 드디어 출간되었다. 로마의 개국 신화과 국가의 건국을 시작으로 저자가 살았던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시대까지 700여년의 로마 역사를 다룬 142권의 방대한 분량인 로마사는 아쉽게도 원래 분량의 1/4 정도만 현존하고 있다. 로마시대의 역사가의 시선으로 쓰여진 리비우스 로마사는 당대 로마를 좀더 생생하게 느낄 수 있게 해주며, 여타 로마사와 다른 시각과 즐거움을 준다.
21권~30권에 해당하는 3권은 로마 역사상 중요한 전쟁 중 하나인 제2차 포에니 전쟁을 다루고 있다. 현존하는 리비우스 로마사 내용 중 가장 기대했던 부분이기에 더욱더 반갑다. 카르타고의 장군 한니발이 로마와 동맹을 맺은 스페인의 사군툼을 공격하면서 시작된 이 전쟁은 한니발 전쟁으로 불릴 정도로 그야말로 로마와 한니발의 전쟁이라도 볼 수 있다.
기존에 사용되었던 해상로가 아니라 몇만명에 달하는 병사와 코끼리를 이끌고 아무도 상상할 수 없었던 가혹한 알프스 산맥을 넘어 로마군을 공격하고 오랜시간 로마를 불안에 떨게 만든 한니발 바르카와 젊은 나이부터 한니발 군대와의 전투에서 아버지를 구하는 등 두각을 나타내고 지략과 인품으로 결국 자마에서 한니발을 격파하고 제2차 포에니 전쟁을 승리로 이끈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의 대결을 비롯하여 17년간 이탈리아 본토를 비롯하여 카르타고, 스페인, 시칠리아, 아프리카 등 로마와 카르타고 영토에서 벌어지는 두 나라의 다양한 대결이 리비우스의 글을 통해 마치 소설이나 영화을 보는 것처럼 생동감있게 눈앞에 펼쳐진다.
유려하고 매혹적인 문장, 당대 역사가의 저서, 방대하고 자세한 분량, 리비우스 로마사가 극찬받는 이유는 다양하지만 나는 그 중에서도 나는 유독 연설하는 장면을 다루는 부분을 좋아한다. 회의나 선거, 사람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전쟁을 앞두고 사기를 높이기 위해 이루어지는 다양한 연설, 웅변은 단순한 역사의 서술이 아닌 당시의 상황과 그 인물의 성향, 인물상을 추측해볼 수 있게 해준다. 한니발과 스키피오, 로마의 여러 집정관과 장군들이 전투전 병사들을 향한 연설을 통해 그려보는 제2차 포에니 전쟁은 그렇기에 더욱 생생하고 흥미롭다.
아쉽게도 3권과 함께 출간된 4권으로 리비우스 로마사는 완결되었다. 4권을 이루는 한니발과 스키피오의 인생 후반기와 제2,3차 마케도니아 전쟁을 다룬 31권~45권 이후 부분은 모두 결락되었다고 한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등장하는 로마 공화정 말기를 어떻게 그려냈을지 볼 수 없다는 사실이 무척 안타깝다.
1000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손을 놓을 수가 없을 정도로 흥미진진한 <리비우스 로마사> 이번 권을 통해 2000년이 지난 지금도 계속해서 사랑받고 읽혀오고 있는지 그 이유를 다시금 확인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리비우스 로마사 3>은 역사적 사료에 리비우스 자신의 문장력을 가미해 2차 포에니 전쟁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서술하고 있다. 포에니 전쟁은 기원전 264년부터 기원전 146년까지 3차례에 걸쳐 로마와 카르타고가 싸운 전쟁이다. 포에니 전쟁이 역사적 의미를 갖는 것은 도시 국가로 출발해 주변국을 병합하며 세력을 키우던 로마가 3차례의 포에니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로마의 세력권을 크게 넓혔다는 점에 있다. 포에니 전쟁이 있기 전에도 로마는 상당한 영역을 지배하고 있었지만 주로 이탈리아 반도에 국한된 수준으로 시칠리아나 스페인 그리고 갈리아 일부 도시와 동맹을 맺는 정도에 불과했다. 그러나 로마가 포에니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이탈리아 반도뿐 아니라 아프리카와 이베리아 반도에도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면서 지중해의 패권을 거머쥔다. 특히 농업과 상업이 번창한 시칠리아와 아프리카는 이어지는 로마의 원정(갈리아, 트라키아, 아시아, 시리아, 이집트 등)을 지원하는 창고가 된다.
3차례의 포에니 전쟁 가운데 가장 극적인 전개를 보인 것은 2차 포에니 전쟁이다. 한니발이라는 걸출한 영웅의 등장, 그의 앞을 막아서는 많은 로마의 인재들, 한니발에게 결정타를 날린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그리고 이름조차 기억되지 않은 로마와 카르타고의 병사들에 이르기까지 16년 동안 이어진 전쟁은 그야말로 영웅들의 피와 땀으로 장식돼 있다. 세계사에서 2차 포에니 전쟁이 차지하는 위상이 높은 여러가지 이유와 특색은 로마의 부흥기에 벌어진 대규모 전쟁이었던는 점 외에도 한니발의 가족사(한니발의 아버지 하밀카르는 1차 포에니 전쟁에서 카르타고를 이끌었으며 로마에 패해 불평등 조약을 받아들여야 했고 죽는 날까지도 로마에 대한 복수심을 잊지 않았다), 당시까지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알프스 산맥을 넘어 이탈리아 본토로 진격한다는 무모한 전략을 실현한 최초의 전쟁, 기병의 유용성을 돋보이게 한 전쟁, 로마의 본토에서 장기간 이어진 전쟁, 그리고 로마인의 정신과 기상이 돋보이는 전쟁이라는 것들이 한데 모여 2차 포에니 전쟁을 역사적으로도 극적으로도 돋보이게 만든다.
<리비우스 로마사 3>은 어린 한니발이 아버지 하밀카르를 따라 이베리아 반도로 향하면서 시작된다. 1차 포에니 전쟁의 패배로 굴욕적인 조약을 수락해야 했던 하밀카르는 로마에 대한 복수심에 불탔으나 이를 완수하지 못하고 생을 다한다. 아버지부터 로마에 대한 적개심을 주입받았던 한니발은 성년이 되고, 군대를 통솔하는 역량을 키우고, 이베리아 반도 내의 전쟁에서 연이은 승리를 하며 자신의 입지를 다졌다. 때가 됐다고 생각한 그는 기원전 219년 로마의 동맹 도시인 사군툼을 공격한다. 거센 저항에 부딪혀 수개월의 시간이 소요됐지만 결국 사군툼을 정복했다. 한니발이 사군툼을 공격했다는 보고를 받은 로마는 사절단을 파견해 한니발과 카르타고 측에 항의했으나 한니발과 카르타고 정부는 1차 포에니 전쟁 후 맺었던 조약 위반을 시인하지 않았고 필요하다면 로마와의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의지를 전했다. 사절단으로부터 카르타고의 뜻을 전해들은 로마는 곧바로 전쟁준비에 착수한다.
로마의 대응이 말로 끝나지 않을 것이란 사실을 잘 아는 한니발은 카르타고, 이베리아 반도의 여러 부족, 누미디아족 등으로 구성된 병력을 꾸려 아무도 시도하지 않았던 대원정을 준비한다. 이베리아 반도에서 피레네 산맥을 넘어 갈리아의 영토를 지나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 본토로 향한다는 대담한 계획이었다. 한니발의 게획은 그와 함께 전장을 누비고 다닌 용맹한 병사들조차 두려움을 느낄 정도로 무모해 보였다. 그러나 한니발은 전쟁의 승리와 영광 그리고 그에 대한 보상을 제시하며 병사들을 독려해 결국 기나긴 원정길에 오른다. 한니발의 행보를 보고 받은 로마는 2명의 집정관(코르넬리우스와 셈프로니우스)에게 군단을 맡기고 한니발을 저지하라 명한다.
한니발은 갈리아의 여러 부족을 통과해야 했기 때문에 크고 작은 싸움을 수행하며 알프스를 향해 나갔고 로마 정규군과의 마찰을 피하기 위해 연안이 아닌 내륙으로 진군해 알프스에 이르렀다. 수많은 병사와 수레, 그리고 코끼리까지, 알프스 산맥을 넘는다는 것이 불가능해 보였지만 한니발은 강행하고 성공한다. 한니발이 이탈리아 본토에 도착해 포 강 유역에서 전열을 정비하고 있을 때 로마의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또한 포 강 근처에 진지를 구축한 상태였다. 상대의 전영을 정찰하기 위해 기병대와 함께 나왔던 한니발은 우연히도 같은 목적으로 나온 코르넬리우스와 마주치게 되어 전투가 발생한다. 기병대의 우위를 바탕으로 한니발이 승리했고 코르넬리우스는 부상당해 간신히 전장을 탈출한다. 이 때 코르넬리우스를 구출한 자가 그의 아들이었다. 스피키오.
회전은 아니였지만 첫 교전에서 참패한 로마군은 진영을 뒤로 물리고 셈프로니우스의 합류를 기다린다. 셈프로니우스가 군단을 이끌고 합류해 한니발과 대치하는 상황에서 작은 교전에서 승리한 후 자만심에 들떠 성급히 공격에 나서고 결과는 참패로 이어졌다. 두 명의 집정관의 연달은 패배로 로마군의 사기는 크게 저하되었다. 해가 바뀌어 기원전 217년이 되자 새로운 집정관으로 플라미니우스와 세르빌리우스가 선출되었다. 갈리아에서 수많은 전쟁을 경험한 플라미니우스는 곧장 전장으로 이동해 한니발 군과 조우한다. 트라시메네 호수 근처에서 벌어진 양 군의 충돌은 수많은 사상자를 낳았으며 특히 로마군에 치명타를 입혔다. 집정관이자 군단의 총사령관인 플라미니우스의 전사는 로마군의 사기를 떨어뜨렸고, 플라미니우스의 위기를 전해 듣고 출정한 세르빌리우스의 기병대마저 참패하면서 로마의 근심은 깊어졌다.
로마 원로원은 파비우스 막시무스를 독재관으로 임명해 로마의 방위를 강화하고 국난에 대응하고자 했다. 파비우스의 전략은 대규모 교전을 피하고 지연 전술을 이용해 시간을 벌어 병력을 충원하고 타국에서 전쟁 중인 상대방의 보급을 차단함으로써 승리를 거두거나 적군을 물러가게 만들고자 했다. 그의 전술은 냉철한 판단에 바탕을 둔 것으로 이내 효과를 발휘해 한니발을 조급하게 하고 곤궁하게 만들었지만 파비우스의 전술의 진가를 모르는 젊은 장교 및 로마 시민들은 파비우스를 비겁하다고 맹비난했다. 그럼에도 파비우스는 자신의 전략을 고수한 덕분에 로마군의 피해를 줄이고 지원군을 늘려 군단의 규모를 키웠다. 반면 한니발의 세력은 처음 피레네 산맥을 넘어설 때의 1/3 이하로 줄어 있는데다 보급이 원활하지 않아 늘 불안한 실정이었다.
파비우스가 독재관의 임기를 마치고 물러난 뒤 기원전 216년 임명된 두 명의 집정관은 파울루스와 바로였다. 그 중 바로는 시민들의 인기에 영합하여 집정관의 위치를 꿰찬 자로 전면전을 옹호하는 입장이었다. 그의 주장대로라면 귀족들이 한니발을 막을 수 있음에도 공연히 전쟁을 지연시키는 중이였기 때문에 자신이 전면에 나서 군을 지휘하게 되면 쉽게 한니발을 제압할 수 있다고 공언했다. 파울루스와 교대로 군단을 통솔하게 된 바로는 자신의 차례가 왔을 때 한니발이 전장으로 삼은 칸나이에서 카르타고 군을 섬멸하고자 대규모 교전을 벌였다. 결과는 로마군의 굴욕적인 참패로 이어졌다. 당시 군단의 사정이 갈수록 나아지는 로마군과 달리 줄고 있는 병사를 충원할 대책이 없고 식량을 비롯한 각종 군수품 부족에 시달리던 카르타고 군은 얼마간의 시간만 지나면 군사들의 자발절 탈영이나 배신으로 자멸할 가능성이 높은 상황이었는데 바로가 정면에서 맞대응 해준 것은 한니발 입장에서 너무 감사할 일이었다.
칸나이 회전에서의 대패는 궁지에 몰렸던 카르타고 군에게 활기를 불어넣어준 반면 로마는 현직 집정관인 파울루스와 여러 전직 집정관과 법무관 등의 고위 관료가 전사했고 5만이 넘는 군사를 잃어 치명타를 입게 됐다. 로마의 입장에서 불행 중 다행이라 할만한 점은 한니발이 칸나이 회전에서 대승한 기세를 몰아 바로 로마로 진격했더라면 준비가 안된 로마마저 점령될 가능성이 높았지만 한니발은 노고에 지친 병사를 쉬게 하는 선택을 함으로써 로마에게 다시 일어설 시간을 주었다.
칸나이의 대패를 전해들은 로마는 혼란에 빠졌다. 이제 더 이상 군단도 없고 지휘관도 없으며 설상가상으로 카르타고가 시칠리아를 압박하고 있다는 소식까지 전해져 그곳으로 함대를 파견해야 되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로마의 혼란은 오래가지 않았다. 로마는 패배와 현재 상태를 겸허히 받아들이고 주어진 상황에서 할 수 있는 대책을 논의했다. 도시의 혼란을 통제하기 위한 노력과 더불어 지휘관과 군단을 다시 모집하였다. 이미 많은 젊은이들이 전장에 투입된 상태였기 때문에 이 때 모인 군단에는 미성년자와 노예 그리고 사형수까지 포함돼 있었다는 점은 로마의 절박한 상황을 말해준다.
로마의 대패로 이탈리아 반도 중남부의 몇몇 지역이 로마와의 동맹 관계에서 이탈해 카르타고에 붙었다. 한니발은 로마로 진격하는 대신 캄파니아 지방을 온전히 정복하여 새로운 이탈리아의 중심지로 삼고자 했다. 그러나 그의 예상과 달리 카푸아를 제외한 캄파니아의 많은 도시들은 로마와의 동맹을 충실히 이행했고 한니발에게 항복하지 않고 성에 틀어박혀 수성에 전념했다. 한니발은 때로는 무력으로 때로는 회유로 그들을 달래봤지만 대부분 허사로 끝났다. 결국 카르타고 군은 겨울이 오자 공성전을 다음해로 미루고 카푸아로 들어갔다. 카푸아에서 보낸 겨울은 카르타고 군에게 독이 되었는데 거친 환경에서 끊임없이 싸워오던 전사들에게 도시가 주는 향락은 전사들의 몸과 마음을 병들고 나태하게 만들었다. 카푸아에서 겨울을 보내는 동안 강철같던 정신과 육체는 사라지고 같은 군대라고는 믿기 힘든 방종한 군대로 변모했다.
로마의 동맹도시들이 로마와 카르타고 사이에서 저울질하고 있을 때, 이 도시들을 로마와의 동맹에서 이탈시키기 위한 카르타고의 노력과 동맹을 수호하고자 하는 로마의 노력이 부딪혀 이탈리아 중남부는 흡사 내전이 일어난 것처럼 잦은 전쟁에 휘말렸다. 이탈리아 본토가 한니발과 로마군이 치열한 공방을 벌이던 시기 스페인, 샤르데나, 시칠리아에서도 변화가 일고 있었다. 한니발이 다져놓았던 이베리아 반도의 지배권은 로마의 스키피오 형제에 의해 와해되었고 샤르데나 또한 로마에 반기를 든 움직임이 제압되어 로마가 우세한 상황에 놓였다. 반면 로마를 전적으로 믿고 지지해줬던 시라쿠사의 히에로가 기원전 215년 사망하고 그의 손자 히에로니무스가 권력을 잡자 시라쿠사는 카르타고와 손을 잡았다. 여기에 더해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왕도 참전의사를 밝힘으로써 로마가 감당해내야 하는 전선의 규모는 더욱 커졌다.
이탈리아 본토는 물론이고 스페인, 아프리카 북부, 그리스 서부, 시칠리아 등 로마와 카르타고의 지배권이 작동하는 많은 나라에서 전투가 지속되었다. 어느 한쪽이 일방적 우세를 점하지 못하고 공방이 펼쳐졌는데 한니발은 대부분은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그 밖의 지역은 엎치락뒤치락하거나 로마의 우세가 점쳐지는 상황이었다. 한니발이 아무리 뛰어난 명장이라 할지라도 전투를 지속하기 위해서는 인적 물적 지원이 필수적이었기 때문에 시칠리아와 스페인에서 승기를 잡아야 했다. 기원전 215년 히에로니무스가 암살되자 카르타고 지지세력에 의한 폭동이 일어났고 이를 카르타고가 지원하면서 히에로 왕의 통치동안 로마와 굳건한 동맹을 유지했던 시라쿠사는 혼란에 빠졌다. 로마군에 의해 폭동은 진화되었으나 일시적인 평화였고 카르타고군은 시칠리아 곳곳으로 장소를 옮기며 로마와 싸웠다.
기원전 212년 스페인에서는 한니발의 동생 하스드루발이 스키피오 형제를 제압함으로써 스페인에서의 카르타고의 지배력을 높였다. 기원전 211년 푸불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티키누스 전투에서 부상당했고 스페인에서 전사한 스키피오의 아들)는 아무도 원하지 않았던 스페인의 사령관으로 지원한다. 스키피오는 수년에 걸쳐 스페인에서 카르타고의 영향력 아래 있는 도시들을 점령하고 여기에 더해 아프리카까지 진출한다. 기원전 206년 카르타고에 기마병을 제공해 주던 누미디아와 동맹을 체결함으로써 이후 수 세기 동안 이어지는 로마의 충실한 아군을 획득한다.
기원전 207년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 북부로 진입한 하스드루발은 이탈리아 남부에서 활약중이던 한니발과 합류해 로마군을 제압하고자 했다. 그러나 한니발에게 보낸 전령이 로마군에 포획됨으로써 그의 계획이 들통났고 이를 이용해 로마군은 하스드루발의 부대를 향해 진격하자 하스드루발은 퇴각하고자 했지만 길을 잃고 시간을 허비하느라 시기를 놓쳤고 결국 하스드루발은 수적 열세임에도 불구하고 메타우루스 강변에서 일전을 감행했다. 결과는 로마군의 대승이었다. 하스드루발은 그의 아비 하밀카르의 위명과 그의 형 한니발의 용맹에 어울리는 모습으로 싸웠고 승기가 기운 상태에서 로마군의 한가운데로 돌진하여 장렬히 전사했다.
한니발에게 하스드루발의 죽음은 일개 장수의 죽음 이상의 충격이었다. 카르타고 측에 합류한 이탈리아 도시들로부터 어느 정도의 지원은 기대할 수 있을지라도 한계가 있고 그들이 언제 변심할 지 모르는 불안한 상황인데다 로마측에 충성하는 도시들 또한 건재했기 때문에 이탈리아 외부로부터의 지원과 협조가 절실한 상황이었다. 한니발이 전투에서 선전하고 승리한다 할지라도 결국 그의 자원은 로마군에 비해 항상 부족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런 약점을 제대로 간파하고 이용한 자는 스키피오였다.
스페인을 평정한 스키피오가 이탈리아 남부와 아프리카 북부에서 영향력을 넓혀가며 압박을 넣자 위기를 느낀 카르타고 정부는 한니발을 소환했다. 기원전 203년 이탈리아를 포기하고 카르타고로 귀환한 한니발은 스키피오라는 젊은 용장과 마주할 운명에 놓인다. 스키피오는 한니발이 로마에서 벌였던 티키누스 전투와 칸나이 전투에서 죽을 위기를 넘긴 인물이고 한니발과의 전투를 통해 전략과 전술을 배웠기 때문에 어찌보면 한니발의 제자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로마와 카르타고의 강화가 실패하자 기원전 202년 자마에서 스키피오와 한니발의 대군이 격돌한다. 로마군은 연이은 승리로 기세가 높고 훈련이 잘돼 있었던 반면 한니발의 군대는 급조된 용병 위주의 병력이었기 때문에 이미 승기는 로마로 기운데다 한니발의 전술 전략에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인 스키피오였기 때문에 전투의 변수도 크게 작용하기 힘들었다. 한니발이 고군분투했지만 결국 승리는 로마에게 돌아갔고 자마회전을 통해 길었던 2차 포에니 전쟁도 막을 내린다.
<리비우스 로마사 3>은 역사적으로 굉장히 중요하게 평가되는 2차 포에니 전쟁의 시작부터 결말까지를 다룬다. 주목할만한 점은 리비우스가 역사를 서술하는데 있어 객관적 사실의 나열에 그치지 않고 마치 대하드라마를 써내려가듯 문장을 썼다는 점이다(이런 감흥을 느끼게 한 것은 역자인 이종인의 공 또한 크다고 생각한다). 덕분에 <리비우스 로마사 3>을 읽는 내내 역사서의 딱딱함보다 박진감 넘치는 소설을 읽는 기분이었다. 로마사에 관심이 많아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 몸젠의 <몸젠의 로마사> 등을 읽고 있지만 <리비우스 로마사>가 주는 흥미와 재미는 이들 이상이라 여겨진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원정기를 다룬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역사적 사실과 소설을 혼합해 독자에게 즐거움을 선사했다면 <리비우스 로마사 3>은 역사설 사실만으로 이런 재미를 이끌어 낸다는 점에서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2차 포에니 전쟁에서 로마를 승리로 이끈 다양한 요인이 있고 그것은 역사가나 독자의 주관에 따라 달리질 부분이다. 내가 생각하는 포에니 전쟁의 승패를 좌우한 결정적 요인은 3가지이다. 첫 번째는 로마인의 정신이다. 포에니 전쟁이 한창이던 당시 로마는 분명 엄청난 위기 상황이었다. 그렇지만 로마인들의 애국심은 국난 극복이라는 공통 과제에 임해 신분과 세대를 뛰어넘는 단결력을 보여줬다. 국가를 위해 기꺼이 복무했고 그것을 영광으로 생각했으며 전쟁자금을 지원하기 위해 사유재산을 꺼내는 것도 꺼려하지 않았다. 전투에 돌입하면 집정관부터 말단 병사에 이르기까지 투혼을 발휘하는 경우가 많았고 설령 패배했다 하더라도 금새 털어내고 다음 전투를 준비했다. 이것은 후기 로마가 쇠망의 길을 걷을 때 보였던 행보와는 크게 다른 모습이라 새삼 새롭게 느껴졌다. 두 번째는 로마가 만들어 놓았던 동맹체계의 견고함이다. 로마의 중심인 라틴연맹 뿐 아니라 많은 도시 국가들이 로마가 가장 불리할 때 조차 로마의 손을 놓지 않았다. 로마는 이들의 희생을 잊지 않았으며 자신들을 배신했던 도시조차 포용하는 자세를 보여 제국으로서의 풍모를 보였다. 마지막으로 적기를 놓친 한니발의 실책과 카르타고의 분열된 모습이다. 16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진행된 포에니 전쟁에서 로마는 어떤 형태로든 의견을 모으고 공통의 적을 물리치기 위한 체계를 지니고 있었다. 혹자는 군주제, 귀족제, 민주제의 형태를 조화롭게 갖춘 체계라고 호평하기도 하는 로마의 체제는 실패하는 경우조차 단결된 모습으로 전쟁에 임했다. 그러나 카르타고는 한니발이 맹활약하던 시기에도 불규칙한 지원으로 한니발의 원정을 뒷받침하지 못했으며 결정된 지원도 원활히 이루어지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역사에 가정처럼 우스운 게 없다고 하지만 만약 한니발이 칸나이 회전을 마친 직후 로마로 진격했더라면, 초반 3년 가량 로마가 패전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을 이용해 카르타고로부터의 지원이 확실히 이루어졌더라면, 하스드루발의 전령이 한니발을 만났더라면 등 한니발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아쉬운 대목이 참 많기도 하다.
많지는 않지만 <리비우스 로마사 3>을 비롯해 현재까지 로마사를 읽은 경험에 비추어보면 로마사의 이해를 높이기 위해서는 지도가 반드시 필요하다. 로마가 장악한 영역이 유럽, 아프리카, 아시아에 걸쳐 있기 때문에 광대한 지도가 요구되는데, 인터넷 창을 열고 독서하면 편하긴 하지만 늘 그런 환경에서 책을 읽을 수 없기 때문에 몇개의 로마시대 지도를 프린트해서 보는 게 편할 때가 많다. <리비우스 로마사 3>에도 맨 뒷편에 이탈리아 지도 3장이 삽입돼 있지만 이것만으로는 많이 부족하고 별도의 지도를 같이 보는 게 유용하다. 그리고 로마사를 읽다보면 생소한 인명과 지명에 많은 어려움을 느끼게 된다. 천 년 로마 제국이 유구한 역사에 기록된 수많은 인명은 이름, 가문이름, 부친의 성이 같이 나열되기 때문에 길고 낯설다. 개인적으로는 로마사가 진행될수록 몇몇 가문이 주로 회자되어 더 헷갈리므로 이름과 성을 기억하려고 노력한다.
로마사는 언제 읽어도 재미를 준다. 인류 최대의 제국을 건설한 로마, 천 년이라는 긴 세월을 살아남은 로마, 그리고 그 제국을 거쳐간 수많은 인물과 사건들은 역사적 지식과 함께 교훈을 남긴다. 많은 로마사를 다룬 저작들이 참고하는 <리비우스 로마사>를 늦게라도 읽을 수 있었음을 행운이라 생각한다.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읽고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