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결하게. 빠르게. 요점만.
요즘 'TMI'라는 단어가 유행하고 있다. 'Too Much Information' 이라는 말인데, 핵심이
없거나 불필요한 정보를 너무 과잉 제공하는 경우를 비꼬는 단어다. 유사한 뜻으로 투머치토커라는 단어도
있다. 이러한 현상들에 대해서 옳고 그름에 대한 가치판단을 할 마음은 없다. 그저 통신기술과 매체 등의 발달로 변화하는 생활양식에 따른 자연스러운 흐름이라고 여길 뿐. 확실히 스토리와 인과관계를 중요시하던 과거와는 달리 근래의 의사소통의 유형들은 요점과 결과만을 제시하는 방향으로
굉장히 간결해졌다. 또 포스트모더니즘 등의 영향으로 대부분의 매체가 과정보다는 결과에 무게를 두고 있는
감도 있고. 그러다보니 내용보다는 소통 자체가 더욱 강조되기 시작했고
(보통은 주고 받는 빈도에 따라 의사소통의 밀도나 컨텐츠의 전달력이 올라가다보니) 그렇게 '속도'가 의사소통의 중요한 요소로 자리잡은 느낌이랄까. 카톡에 '1'이 사라졌는데도 답이 없으면 초조해지고 무시받은 느낌이
들어 화가나는 것도 아마 그런 경우에 속한다고 볼 수 있겠지.
사실 이러한 흐름은 나에게 큰 부담을 주고 있다. 나는 내 생각과
감정의 표현을 즐기는 사람이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글쓰기와 말하기를 좋아한다. 문제는 좋아만 할 뿐 잘하지 못한다는 것... 특히나 요즘처럼 간결함이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상황이 되면서, 시대흐름과는 동떨어진 구닥다리 글쓰기와 말하기를 구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최근에는 자신감도 많이 떨어진 느낌이다.
이를테면
어떤 주제로 블로그포스팅을 한다고 해보자. 글을 쓰다보면 애초에 생각 정리를 해놓은 주요문장들에 너무
많은 살들이 붙기 마련이다. 문제는 이걸 다시 양적인 다이어트를 해주면서 서로 유기적인 관계를 만들어야하는데, 퇴고를 거듭할 수록
계속해서 생각이 확장이 되면서 도저히 양보할 수 없는 문장들의 무질서한 나열들이 남게된다. 어떤 생각을 전달하려면 주요생각을 위해 움츠려드는 주장들도 있어야하는데, 작은
양보도 이루어지지 않으니 중구난방의 장황한 글만 남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퇴고를 포기하고 비공개 상태로
끝내 올리지 못한 리뷰와 포스팅만해도 한 트럭이 넘는 것 같다. 정리도 힘들고, 마무리까지도 이끌어내지 못하는 능력부족을 여실히 느끼고 있다.
글은
그래도 시간을 두고 고쳐쓸 수 있다는 점에서 양반인 편이다. 대화에서의 말하기는 너무 심각한 수준! 실시간으로 이루어지는 대화의 특성을 머릿
속이 따라가지 못하는 느낌이랄까?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대화하면서 바뀌고 확장하는 머리의 속도를 말로
변환해내는 능력과 속도가 부족한 것 같다. 그러다보니 의식의 흐름으로 대화가 진행되고, 그렇게 주저리주저리 말이 길어지고 마는 것이다. 혹여나 대화 상대가
마음을 놓을 수 있는 편한 대상이거나, 상황이 자제력이 떨어지는 술자리라면 최악이다. 대화 도중에 '왜 내가 이 이야기를 하고 있지'하고 자각을 할 정도로.
내가 겪고 있는 글쓰기와 말하기의 문제점이
무엇일까를 고민해보았다. 근본적인 문제점은 단 하나, 바로 '내공부족'에 있다고 볼 수 있었다.
故정주영 회장의 일화였던가? 사업계획서나 각종 보고서를
A4용지 한장 분량으로 요약해서 가져오라고 지시를 했다는 기업총수의 일화를 들은 적이 있다. 비슷한
예로 대학에서 방대한 내용을 짧게 요약한 레포트를 제출하기를 요구하는 교수님들의 이야기들도 여러차례 들었다. 두
사례 모두 공통적 '분량을 줄이는 데 필요한 능력'에 대한
힌트를 이야기하고 있다. 긴 내용을 짧게 요약한다는 것은, 내용의 경중을 정확히 꿰뚫고 있어야만 가능하다. 반대로 요약이 안된다는 뜻은 곧 내용을 모두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고,
그것은 곧 서류를 작성한 사람이 본인의 생각(표현)에
그만큼 자신이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분량의 측면만이 아니라 속도 또한 그러하다. 유명한 작가들 중에는 매일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분량의 글을 쓰는 습관을 가진 이들이 많다. 그러한 기계적인 일이 가능하려면 그 분야에 대해서 잘 파악하고 있고, 구조에
대해서도 평소에 정리가 되어있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즉 글을 쓰거나 말을 하는 시간 외에는 본인의 내공을
더욱 축적하고 정리하는 것에 늘 정진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결국 나는 아는 것도 부족하고, 그것을 내 것으로 만들만큼의 시간을 투자하지도 않았다는 것.
<말의 내공>을
읽다
이런 고민을 하고 있던 와중에 <말의 내공>이라는
책을 접하게 되었다. 시중에 넘쳐나는 프레젠테이션법이나 화술을 가르쳐주는 실용서들과는 다르게, 제목 만으로도 내가 고민하고 있는 지점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을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책의 두께가 얇고 가벼운게 참 인상적이었는데, 어차피 내공을 쌓는
일이라는 게 긴 글을 읽는다고해서 바로 만들어질 수는 없을테니 어떤 태도와 양식에 대한 지도방향을 전달하기에는 간결하고 임팩트 있는 것이 요즘
추세와도 맞겠다 싶었다. 역시나 목차를 살펴보니 수양 / 관점 / 지성 / 창의성 등을 통해 자신의 그릇의 크기와 모양을 늘리는
법을 설명하고, 그 바탕에서 더욱 효과적인 말하기를 할 수 있도록 경청 / 질문 / 화법 / 자유
등이 필요함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게다가 각 파트별로 관련된 동서양의 고전이나 명언을 인용하고 있어서
이해도 쉬울 듯하여 책을 읽기로 했다.
종종 촌철살인의 힘 있는 문장을 구사하는 인물들 혹은 한마디 한마디에
깊이가 느껴져 무언가 전혀 다른 울림을 일으키게 하는 이들을 보면서, 말과 문장이 단순히 의미 그 이상의
무언가를 담고있음을 느끼게 된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말
이면의 표현되지 않은 함축된 의미들이 그들의 인생과 사상을 통해 이미 증명이 되기 때문이다. 즉, 말이란 단순히 기술적인 표현법의 영역에 그치는 것이 아닌 한 사람의 삶을 그대로 반영하는 거울이라 할 수 있다. <말의 내공> 역시 이 부분을 지적하며, 스스로의 말 그릇을 키워야한다는 내용으로
책의 시작을 알린다. 구체적으로 말의 그릇이라 할 수 있는 자기 자신의 자존감을 바로 세울 것을 권하고, 나아가 스스로의 도량을 넓히고 신뢰할만한 사람으로 거듭나기를 촉구한다.
꽃피는 사과나무에 대한 감동과,
엉터리 화가에 대한 분노가 나의 가슴속에서 다툰다.
그러나 바로 두 번째 것이 나로 하여금 시를 쓰게 한다.
-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 中, 베르톨트 브레히트
자존감을 세우는 것이 마치 토지의 정지작업과 같은 역할을 한다면, 이어지는
내용들은 기둥과 집의 형태에 해당하는 일들이다. 저자는 자신만의 기준점이라 할 수 있는 '관점'을 만들어 나갈 것을 이야기함과 동시에, '지성'을 통해 그 깊이를 만들어내야함을 이야기한다. 특히 개인적으로 '책과 경험을 통해 관계를 공부하고, 상대의 말을 경청하면서 상대를 이해해야 한다. 이것이 지성을 넓히는
길'이라는 <바가바드기타>의 글귀가 인상 깊었다. 또 히틀러와 나치를 용인했던 당대의
독일을 비판했던 위의 시처럼, 불편하고 어려운 것에 관심을 두는 것은 스스로를 확장시켜나가는 훌륭한
원동력이 될 수 있다고 조언하기도 한다. '창의성'에 관해서는, 무에서 유를 창조해낼 것이 아니라 접목과 개선, 변형 등을 적극적으로
이용하길 권하기도 한다.
내부의 감정을 풀어주는 것이 명상과 알아차림이라면,
그런 감정을 바깥으로
표현하는 것이 중용적 말하기다.
중용적 말하기란, 내뱉기 혹은
인내로 일관하는 말 습관을 버리고,
때와 상황에 맞는 적절한 언어로 자기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다.
- <말의 내공> P.142
앞선 부분들이 말의 근간이라 할 수 있는 '화자'의 개선에 집중되어 있다면, 후술 되는 부분은 말을 더욱 돋보이고
유용하게 만들 수 있는 기술적인 면에 치중하고 있다. 대부분이 나에게 필요한 부분이었지만 특히 '침묵과 경청'에 대한 부분이 마음에 와닿았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나는 공감의 가치를 너무 크게 산정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대방의 입장에 너무나도 몰입하는 나머지, 감정의 여과없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건 아닌지 반성을 해보게 된다. 여기에 대화 중 정적이 흐르거나 어색한 분위기가 되는 것을
참지 못하는 성향도 중구난방의 말하기를 만드는게 크게 일조했을 것이다. 글 또한 너무 많은 것을 전달하고
싶은 욕심을 조절할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절제'를
하는 동안 생각을 가다듬는 효과를 얻을 수도 있을테니, 이래저래 내게 필요한 건 '선을 지키는 말하기와 글쓰기' 였던 셈이다.
촌철살인, 힘 있는 한 마디를 꿈꾸며
때로는 누군가의 이야기 혹은 어떤 한 문장이 나에게 큰 영향을 끼치는 문장으로 다가오는 순간들이 있다. 나 역시 그런 순간들이 상당히 많았지만, 지금 당장 떠오르는 몇몇
순간들만 이야기해볼까 한다. 결혼을 앞두고 몽골로 여행을 떠났던 2014년의 여름. 다른 짐이
많아서, 가져간 책은 김연수 작가의 <청춘의 문장들>과 여행관련 가이드북이 전부. 그마저도 거의 볼 일이 없다가
마침내 쳉헤르 온천 지역에 일찍 도착한 하루, 노천온천을 마치고 노곤함과 함께 게르 침대에 누워 드디어
책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사실 지금 시점에서 <청춘의
문장들>에 대해서 기억나는 부분은 딱 하나 뿐이다. 그만큼
인상깊은 한 마디였고, 또 그 뒤의 나의 삶에 많은 영향을 끼친 문장이기도 하다. 김윤아씨의 '봄날은 간다' 노래와
봄날의 아름다움과 쓸쓸함을 이야기하며, '그 모든 것은 곧 사라질 텐데,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라는 문장이 적힌 부분이 있다.
그 모든 것은 곧 사라질 텐데,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 <청춘의 문장들>, 김연수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의 나는 과거에 얽매이는 경향이 많은 사람이었다. 추억이라는
명목으로 과거에 대한 아쉬움과 미련이 많았다. 현재에 보다 충실할 수 있는 에너지를 과거를 미화하는데
쓰다보니, 어느 시점에 가서는 그때의 현재로 또 다시 아쉬움만을 남기는 시간들이 되고 말았다. 그러던 찰나에 그 문장을 보게 된 셈이다. 흩날리는 벗꽃에 대한
아름다움과 그만큼의 쓸쓸함. 나는 그 문장에서 말하는 것이 '나의
현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이후로 나는 순간순간의 나를
사랑하기로 마음먹었다.
태도 외에도 가치관을 결정하는 것도 있었다. 이를테면
아마존닷컴의 창업자인 제프 베조스의 '후회 최소화의 법칙'이었다. 유튜브와 서적에서 그의 이야기를 들었고, 이 것은 나의 삶에서 미래를
설계하고 바꾸는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마다 중요한 기준으로 작용하고 있다. 늘 욕심이 많은 나에게 아쉬움은
어쩔 수 뒤따르는 부산물이었고, 그게 정도가 심해지면서 행동을 멈추는 두려움으로 자리잡혔던 시기가 있었다. 그때 제프 베조스의 이야기를 듣고, 후회를 최소화하는 기준을 통해
두려움을 극복하고 도전하는 삶을 살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계획을 세우는 것도 미래에서부터 실현가능한
현실의 방향으로 내려오면서 짜는 습관을 들이게 되었다.
김연수 작가의 글도, 제프 베조스의 말도 그들의 의도한 것 이상으로 나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고 나는 생각한다. 물론 수용자로서 나의 상황에 맞춰서 그들의 말과 글이 시기 적절하게 다가와 준 덕분이지만, 일단 그들의 표현들이 형식을 넘어선 힘과 진정성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리고 그들의 말과 글의 원천인 '말의 내공'을 나 역시 꾸준하게 연마해볼 작정이다. 언젠가 나도 내가 정말로
사랑하는 이에게 그런 진정성 있고 멋진 말 한마디 건낼 수 있는 때를 꿈꾸며 말이다.
책 속의 한 줄, 한 문장 (발췌하며
읽기)
- 말 한마디에는 말하는 이와 듣는 이 모두의 삶이 참여한다. 화자의
삶에 따라 말의 의미와 표현이 결정되고, 그것들은 또다시청자의 삶을 고려해 조정되기 때문이다. 이 과정 없이 말은 탄생할 수 없다.
- 그래서 말을 잘한다는 것은
단순히 화술이 능수능란한 상태를 이르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자신을 성찰해 성숙해져 있고, 타인에게
관심을 기울여 이해하며, 어떤 상황을 읽는 안목까지 갖춘 총체적인 상태를 이른다 그리고 그에 도달하기
위한 노력의 과정이 말공부다.
- 세상보다 자신을 사랑한다고 선언할 수 있는 사람은 '나'가 귀한 것처럼 '너' 또한 귀한 걸 안다. 개인의 가치를 이해하는 것이다. 반면 세상에 나를 바치려는 사람은 자신도 세상을 위해 희생하니 당신도 그러해야 한다고 하지 않을 리 없다. 그러니 노자는 모름지기 세상은 진정 자신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에게 맡겨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
- 내면이 부족한 사람은 말이 번잡하고, 마음에 주관이 없는 사람의
말은 공허하다. - 성대중
- 관점은 (중략) 사회의 묵은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중략) 그러나 관점은 사람을 변화시킨다. 관점이 새로워지면 사람 역시 새롭게 태어날 수 있다. 말 공부에
관점 공부가 필요한 이유다. 새로운 관점에서 사람이 태어나고 새로운 말이 나온다.
- 지식을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지성이 길러질 수 없다. 나의 해석을
거쳐야 지식은 지성이 되고 지혜가 된다. 이 지점에서 해설과 해석이 구분된다. 해설은 주어진 말을 알맞게 풀이하는 것인 반면, 해석은 말을 하는
화자와 그 말의 배경까지 꿰뚫어 보는 것이다. 단정하자면 해설은 객체로서 하는 것이요, 해석은 주체로서 하는 것이다. 세상의 지식을 익히고 이를 기반으로
나의 말에 힘을 부여하고자 한다면 해석하는 훈련은 필수다.
- 책은 반드시 세 번 읽어야 합니다. 먼저 텍스트를 읽고 다름으로 그 필자를 읽고, 그리고 최종적으로
그것을 읽고 있는 독자 자신을 읽어야 합니다.
- 철학자들은 세상을 여러 방식으로 해석했다. 중요한 것은 세상을 바꾸는 것이다. - 카를 마르크스
- 말씀의 세계에서 내쫓기는 것은 비참하지만, 그것에 감금당하는 것은
더 비참하다. - 버지니아 울프
-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은 '사랑'을 "남녀
간에 그리워하거나 좋아하는 마음, 또는 그런 일"이라
정의한다. 연인 간이라 하지 않고 '남녀 간'이라 한정함으로써 동성애를 배제한다. 이것은 성소수자가 말씀의 세계에서
내쫓긴 예다.
- 역사를 보면 지배계급은 언어를 소유했고, 피지배계급은
대체로 문맹이었다. 물론 지금 우리 사회의 문맹률은 매우 낮지만, 여전히
지배자는 언어를 지배하고 피지배자는 언어에 지배당한다. 지배자는 언어를 창안하고 규정하나, 피지배자는 지배자가 만든 언어를 사용한다. (중략) 이런 악순환을 역전시키는 것은 역시 해석이다. 해석이란 말씀의 감옥을
부수는 약자의 무기다.
- 나의 입장을 정한다는 것은 보이는 대로 믿지 않겠다는 선언이다. 주어진 대로 사고하지 않고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한쪽만 고집하지
않고 반대 측 목소리에도 귀 기울이는 등 다양한 주장을 섭렵한 후 나의 입장을 도출하겠다는 의지 표명이다.
- 창의성이란 (중략) 단절보다는, 현재에서
한 걸음 나아갔거나 내파한 곳에서 비롯된다.
- 침묵이 경청의 전부는 아니다. 경청하려면 상대방의 말을 듣는 차분함과 여유, 집중력도 필요하다. 그리고 알맞게 마음을 드러내 반응해야 하며, 상대의 의도와 속뜻을
읽는 해석의 기술과 안목 역시 필요하다. 이를 위해 꾸준히 훈련해야 한다. 마음을 둔다는 것. 이는 상대의 말에 온 정성을 기울임을 뜻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들어도 들리지 않는다.
- 흔히 우리 사회를 '질문 없는 사회'라고 한다. 하지만
더 정확히 말하면, 질문이 없다기보다는 질문이 한쪽으로 치우쳐 있는 사회다. (중략) 윗사람은 묻고 아랫사람은 답하는 구조다.
- 우리의 지향점은 질문다운 질문이 풍요로운 사회다. 질문이 많으면
무엇이 달라질까? (중략) 질문이란 곧 변화의 씨앗이고 소통을
현존시키기 때문이다.
- 문제의식은 변화의 첫머리다. 당연시하는
것에 숱하게 질문을 던진 덕분에 세상은 지금껏 발전해 왔다. 서양 학문의 시조를 탈레스로 보는데 실상
그가 남긴 업적은 보잘 것 없다. (중략) 그럼에도 철학사에서
그런 지위를 갖게 된 것은 그가 최초로 질문을 던진 이였기 때문이다. 비록 답은 미흡했지만 그 질문
적분에 질문이 이어져 철학이 탄생했고, 과학도 탄생했다.
- 모든
학문은 둘 중 하나만 잘해도 의의를 갖는다. 좋은 질문을 던지거나 좋은 답을 찾는 것이다.
- 전쟁에서는 정공법으로 싸우고, 변칙으로 이긴다. - 손자
- 내부의 감정을 풀어주는 것이 명상과 알아차림이라면, 그런 감정을 바깥으로 표현하는 것이 중용적 말하기다. 중용적 말하기란, 내뱉기 혹은 인내로 일관하는 말 습관을 버리고, 때와 상황에 맞는
적절한 언어로 자기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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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현으로서의 말의 내공을 수양하는 일이.
나를 수양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봅니다.
더 깊이있고, 더 넓고, 더 위트있는 이를 꿈 꿉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