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은 내 운명
<아무튼, 피트니스>를 읽고
오늘도 사무실에서는 동료 몇몇이 국밥, 찜닭, 중화요리, 분식 등의 점심메뉴를 자발적으로 거부하는 대신, 고단백 저칼로리 식단으로 몸과의 전쟁을 선포하며 전의를 다지는 모습이 목격되었다. 허리디스크 통증을 달고 사는 내게 운동이란 걷기와 수영뿐이었는데, 요즘 그들을 통해 다이어트를 위한 퍼스널 트레이닝(PT), 피트니스(fitness) 동작과 명칭들을 하나씩 배워나가고 있다. 우리는 저마다의 목적, 아니 몸을 위해 어떻게든 운동을 해나가고 있다. 여기 어느 체육관에서도 한 인권운동가가 운동을 하고 있다. 반평생 인권운동(movement)을 하다가 몸이 보내는 마지막 경고에 응답하여 몸운동(exercise)을 시작한 것이다. '아무튼 시리즈'의 시작을 알리는 <아무튼, 피트니스>는 인권운동가가 운동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에 대해 이야기해준다.
운동을 하고 살을 뺀다는 것이 외모에 대한 편견에서 도망치는 것인지 편견과 맞서 싸우는 것인지 자주 헷갈린다. 남의 눈에 들려고 하는 건지 나에게 나를 잘 보이기 위한 건지도 잘 모르겠는 때가 많다. 하긴 나에게 잘 보이고 싶은 나도 어차피 타인의 눈을 거치기 마련이다. '내 안에 너 있다'는 대사처럼 타자는 다양한 모습으로 내 안에 존재한다. 나와 타자의 경계는 명확히 그을 수 없다.(26쪽)
그러고 보니 나에게는 피트니스라는 말보다 헬스가 더 정겹다. 수능을 마치고 친구따라 강남, 아니 헬스장에 가서 (입학 전까지 남은 3개월을) 등록해놓고 아르바이트가 끝나자마자 PC방에 가서 두뇌와 손가락 근력만 길렀고, 군대에서는 반 년 가까이 헬스 트레이너 출신인 후임의 선의(를 가장한 보복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지만)를 보기 좋게 배신하고 그의 인내력만 길러주었던 기억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 후로 내 삶에서 헬스는 조금씩 사라졌고 앞서 말했듯이 일터에서 피트니스라는 새 옷으로 갈아 입은 그것을 마주하고 있는 것이다. 책에 따르면 피트니스는 목적에 부합(fit)하는 신체 단련을 뜻한다. 어느 새벽 갑작스러운 가슴 통증으로 병원을 찾은 저자는 (몸짱이 되고 싶은 게 아니라 좋아하는 술을 계속 마시고 싶기에) 다시 살기로 결심하고, 1년 넘게 헬스장 트레드밀 위 달팽이로 지내게 된다.
"지금, 뭐 하세요?"
(보면 모르냐?) "네, 그냥 뭐."
"이걸로 뭐 하시려고요?"
"네? 팔 운동 삼아 잡아당기고 있는데요?"
"회원님, 이건 등 운동 하는 기구입니다."
"에?"
"이리 와보세요."
올 것이 왔다.
(10~11쪽)
운동 전보다 더 불어난 몸무게로 시름에 잠겨 있던 그가 걷기만 해서는 안되고 근력 운동도 같이 해야한다는 조언을 받들어 기구를 잡아당기고 있는데 그의 첫 트레이너인 나이스가 나이스 타이밍에 찾아온 것이다. 인바디 체크를 시작으로 생애 최초로 개인 트레이닝을 받게 된 그는 본업인 운동과 부업인 운동을 병행하기가 힘들어 일단 나이스와의 수업 약속만은 절대 어기지 않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한 달쯤 지나 운동이 없는 일요일에 뒷산을 내려오다 살얼음을 밟고 미끄러져 무릎을 다치게 되는데, 운동의 효과가 살짝 느껴질 무렵이라 깁스를 한 채 운동에 대한 그리움을 한껏 키웠다고 그는 회상한다.
어느 날 나이스가 덜컥 명령을 내렸다. 간식 포함 매 끼니 먹은 것을 사진 찍어 운동 오기 전에 자기한테 전송하라고 했다. 엥? 즐겁게 먹고 살아야 하는데···, 운동을 열심히 하려는 거였지 다이어트는 내 계획에 없었는데? 게다가 나는 먹고 마시는 얘기로 책까지 쓴 사람인데?? 나의 연구소는 '술방'이요 나는 그 술방의 '주모'로 불리는 사람인데??? 다이어트라니, 존재의 배반이다.(37~38쪽)
다시 운동의 현장으로 복귀한 그에게 나이스는 숙제를 내준다. 이미 인생의 식탁에서 먹는 것도 못 바꾸면서 세상을 바꿀 수는 없다는 결심으로 고기를, 길 한복판에서 터진 코피가 몇 시간이 지나도 멈추지 않아 찾은 응급실에서 고혈압 선고를 받은 뒤 소금을 버린 그에게 세 번째 전환기가 찾아온 것이다. '무조건 먹지 말자가 아닌 잘 먹자'는 전략으로 차려진 그의 식단은 나이스에게 술병만 빼면 완벽하다는 찬사를 받기도 한다.
"다시!" "다시!" "다시!"
데드리프트 동작을 한 번 할 때마다 빨간 색연필로 좍좍 그어진 시험지를 받는 기분이다. 안되니까 약이 올랐다. 말뜻을 찾아보니 (중략) '죽을 만큼 필사적인 노력을 요하는 상황'을 가리키는 말이었단다. 또 다른 해석도 있다. 죽은 듯 가만있는 물체를 들어 올림으로써 움직임을 준다는 뜻이라고도 한다. 어느 쪽이 정확한 뜻인지는 모르겠다. 해보니 둘 다 맞는 말이다.(49쪽)
마운틴클라이머(엎드려뻗쳐서 팔다리 번갈아 뛰기), 암워킹(엎드려서 손바닥으로 걷기) 등을 하며 개같이 구르고 스트레칭을 하고 마시지를 받으며 몇 달의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머신 근처에는 얼씬도 못했던 그가 드디어 무거운 바벨을 바닥에서 허벅지까지 들어 올리는 데드리프트(deadlift) 동작을 하사받는다. 힘이라면 남부럽지 않다고 자부하던 그도 무겁지 않아 보이는 쇠막대기 앞에서 쩔쩔 매는데, 문제는 바로 자세라고 지적하며 나이스는 "진정한 보디빌더는 젓가락 하나를 들더라도 100킬로 들듯이 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이해한다. 글을 쓸 때 어떤 조사를 쓰냐에 따라 문장의 느낌이 미묘하게 달라지는 것처럼 운동에서도 취하려는 자세가 까다롭다고 말이다.
피트니스를 하면서 그의 로망은 다름 아닌 누워서 바벨 밀어 올리기, 즉 체스트프레스(chest press)다. 처음에는 '어깨가 아니라 가슴'이라고 외치는 나이스의 말을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몸에 익어가면서는 가슴을 마음껏 젖힐 수 있다는 해방감과 자신의 힘을 제대로 느낄 수 있기 때문에 좋아한단다. 특히 체스트프레스에서 형벌로써 하늘을 지는 아틀라스와 황금 사과를 위해 잠시 자발적으로 하늘을 떠받친 헤라클레스의 차이를 발견해내는 그의 통찰이 퍽 흥미롭다. 노 젓기를 활용한 등 운동에서도 영화 『벤허』의 한 장면을 떠올리며 노 젓는 노예가 느끼는 고통이 똑같은 동작임에도 헬스장에서는 쾌감으로 승화되는 데에서 인간이라는 존재를 다시금 바라본다.
"샘, 너무 서운하네요. 작년 이맘때 무릎 깨져 깁스했을 때처럼 아파요. 샘이랑 오래오래 운동하려 했는데···. 센터의 샘들이 자주 관두시는 거 봐온지라 일하는 환경이 별로 좋지 않은가 나름 신경 쓰이곤 했어요. 암튼 샘이 더 좋은 환경과 미래를 찾아가시는 거라 생각하고 응원할게요."(87쪽)
나이스 타이밍에 그를 찾아왔던 나이스가 떠날 때는 갑작스럽게 작별 인사를 전한다. 지난 1년 3개월 동안 체육관에서 일상을 함께한 스승과 제자를 갈라놓은 것은 열악한 노동 환경이었다고 그는 지적한다. 체육관이라는 같은 공간에서 누군가는 운동을 하고, 또 누군가는 노동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제서야 깨닫게 되었다. 그에게 중대한 사건이라 할 수 있는 이 대목에서 잊고 있었던 인권운동가의 면모를 엿보게 되었다. 체육관 샘들의 임금이나 노동시간과 같은 처우 개선뿐만 아니라, 그들은 언제나 웃는 모습으로 회원들의 무례함을 수용해야만 하는 이중고를 떠안고 있는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아울러 나 역시 수영장에서 종종 경험하는 '탈의실 정치', 즉 개인 혹은 집단의 타인에 대한 비하와 과시적 발언, 유언비어에 대해 그 역시 우려를 표하는데, 체육관에서 자신의 몸에만 몰두하지 말고 타인을 배려하는 마음까지도 함께 단련할 순 없는지 되묻는다.
피트니스는 수영이나 구기 종목과는 달리 단조롭고 지루한 느낌이 드는 게 사실이다. 저자 또한 팔과 복근 그리고 유산소 운동을 가르켜 지루한 삶과 같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운동신경이 둔해 할 줄 아는 운동은 없어도 꾸준히 버티는 것만큼은 자신있다는 그는 힘주어 말한다. '느리더라도 자기 속도로 자기가 할 수 있는 만큼 묵묵히 갈 수 있다'는 걸 몸소 깨닫게 해준 것이 바로 피트니스라고. 책을 덮고 나니 노화를 두려워 말고 나이듦과 더불어 살아가며 내 몸의 소리를 경청하고 '나에게 맞는 식으로 꾸준히' 운동하라는 어느 운동가(運動家)의 운동가(運動歌)가 어디선가 울려퍼지는 듯하다.
인생에도 퍼스널트레이닝 같은 게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아니지. 나와 내 주변 사람들, 또 다른 누군가가 서로에게 서로의 PT가 되어주니 살아가는 것이겠지.(102~10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