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키호테는 근대의 여명이 트고 신이 떠난 자리에 부재한 질서를 회복하고 싶어했다. 밀란 쿤데라의 말을 빌리면 이렇다.
"신이 우주와 그 가치의 질서를 관장하고 악에서 선을 가르고 모든 사물에 뜻을 부여했던 곳을 서서히 떠나버릴 때, 돈키호테는 집을 떠났고 이제는 더 이상 이 세계를 알아볼 수 없게 된다. 지고의 심판관 이 부재하는 이 세계는 돌연 무시무시한 애매성 속에서 그 모습을 드러낸다. 하늘의 유일한 진리는 인간들이 나누어 갖는 수많은 상대적인 진실들로 흩어져 버렸다. 이리하여 근세가 탄생되었고 그와 더불어 이 세계의 영상이자 모델인 소설 또한 탄생되었다(밀란 쿤데라 지음, 권오룡 옮김 『소설의 기술』(책세상, 2004) 16~17면. - 『돈끼호떼』, 매혹과 환멸의 서사시 (신정환)에서 재인용)
1권이 어마어마하게 성공을 거둔 후 돈키호테는 10년만에 후속편으로 세상에 재등장한다. 10년이라는 시간은 긴 시간이고, 돈키호테 못지 않은 온갖 모험으로 재산과 건강 모든 것을 탕진하고 어렵게 살아가던 그가 저작권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무수한 해적판이 유럽은 물론 대서양을 건너간 이후에도 세르반테스는 크게 경제적으로 나아진 게 없는듯 하지만, 작품의 성공은 성공이고, 돈키호테가 쌓은 명성을 통해 작가 세르반테스가 차기 작품에 대해서는 자신감을 갖게 된 것만은 확실한 것이다. 2편에는 당대 문학계에서는 아마도 상상도 하지 못했을 새로운 장치들이 등장했던 것이다.
1편에서도 돈키호테의 이야기는 작가 자신이 지어낸 이야기임을 부정하고, 시데 아메테라는 무어인이 전하는 이야기를 역자를 시켜 번역해서 전달하는 식으로 이야기를 끌고 갔다. 이러한 액자식 구성은 흔히 보는 구성이라 크게 신경쓰지 않고 지나갔는데, 2편에서는 한발이 아니라 아주 멀리 멀리 더 나아간다. 2편의 등장인물로서 돈키호테는 1편에 이어 동일한 캐릭터와 연속성을 지닌다. 동시에 자신의 이야기가 <기발한 이달고 돈키호테 데 라만차>라는 책으로 출간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고 있음을 알게 된다. 흥미로운 지점은 여기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이 다름아닌 전편의 독자들이라는 사실이다. 대개는 돈키호테와 산초라는 인물에 몹시 흥미를 느끼는 인물들이다. 때문에, 전편에 비해 처절한 육체적 개고생은 뒤따르지 않는다. 전편의 독자가 후속편의 등장인물이 되어 나타나고, 돈키호테의 모험에 대한 전반적인 이야기의 진행을 조정하고 있는데다가 전편의 이야기에서 모순되거나 얼버무린 부분을 설명할 뿐만 아니라 전편과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기이한 동거가 계속된다.
돈키호테가 세번째 모험을 떠나게 되는 계기는 자신의 무훈이 책으로 출간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주는 삼손 카라스코 학사와의 대화가 발단이 된다.
자기가 무삐른 적들의 피가 아직 칼날에서 채 마르지도 않았는데 자기의 기사도 무훈들이 인쇄되어 돌아다니게 한 사람들이 있다니 말이다. 여하튼 그는 어떤 현자가 자기를 좋아해서건 아니면 싫어해서건 마법을 이용하여 그것을 인쇄시켰을 것이라고 상상했다.
하지만 비루하고 비쩍 마른 말들을 보면 저기 로시난테가 간다라고 말할 정도로 누구나 돈키호테를 읽고, 널리 알려져 있을 뿐만 아니라, 작품 자체에 대해서도 여러 의견들이 있다는 말들을 듣는다. 여기서 세르반테스는 자신의 작품의 헛점들을 스스로 공개하는데, 거기에 대해 동조하기도 또한 해명하기도 한다. 특히, 그의 작품속에는 작가 자신이 쓴 내용을 혼동하여 불일치하거나 일관성이 없거나 얼버무린 부분들이 많은데(예를 들어 도둑맞은 당나귀는 누가 훔쳤었는지 또 어떻게 찾았는지, 산초가 발견한 금화는 되돌려주었는지 안했다면 후에 무엇을 했는지 등) 하도 곁가지들이 많아서 읽을 때에는 크게 눈치채지 못했데, 2편에서 1편에서 삼손 학사의 입을 빌어 이것이 해명되기도 설명되기도 하는데, 웃기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건망증으로 인한 이러한 불일치들이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것이다.(그러한 불일치는 역자가 친절하게 주를 달아주어서 알수 있었다). 독자들의 의견 중에는 1편에서 여러 이야기들이 등장하는데, 돈키호테의 모험에 집중하지 않고 다른 여러 단편들에 대해 다루는 것에 대한 불만도 들어 있었으며, 2편에서는 돈키호테에 대해서만 오롯이 집중하겠다는 작가의 의지를 비치는 부분도 있다.
삼손 학사가 돈키호테에게 책 소식을 전하면서 1편에 대한 이런 저런 해명들이 계속되는 가운데, 돈키호테는 작가가 혹시 후속편을 쓸 것인지에 대해 관심을 보이는데, 이에 대해 삼손은 후속편을 기대하는 독자들이 많기에 작가가 그 후속 이야기를 찾고 있으며, 이야기를 '발견'하는 즉시 인쇄에 넘길 것이라는 의견을 낸다. 이 때 밖에서 로시난테는 울음 소리를 내고, 삼손을 소개해준 산초는 덩달아 흥분하고, 돈키호테는 이를 징조로 여겨 또다시 모험을 떠날 결심을 한다. 삼손에게서는 여정의 코스에 대해 조언을 구하기까지 한다. 자신의 이야기가 출간되려면 먼저 발견되어야 하고 그것이 발견되려면 먼저 자신이 여행에 나서서 무훈을 만들어야 하는 인과 관계 성립을 위해서는 다시 여행을 떠나야 했던 것이다. (한편 여행중 그는 가짜 돈키호테 후속편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그 위작의 곳곳에서 캐릭터와 사건의 모순 및 불일치 등을 찾아내어 깨알같이 디스한다. )
하지만, 이제 돈키호테는 무명의 이달고가 아니다. 가는 곳마다 그가 무훈이라 믿고 사람들은 미친짓이라고 알고 있는 것을 쌓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해진 영웅이다. 사람들은 더이상 그에게 칼을 휘둘러 귀를 베거나 매질을 하지 않으며, 그의 미친짓들에 더욱 부채질을 하며 그것을 즐길 뿐이다. 그를 잘 모르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돈키호테가 기사도 모드가 아닐 때의 모습에서 이성적이고 현명한 자질과 방대한 지식에서 나오는 식견에 반해 수많은 주제에 대해 토론한다. 돈 디에고 데 미란다라는 신사는 그가 사자 우리를 열어 사자와 담판을 벌이려 하는 완전히 정신나간 '편력 기사'이지만 이내 자신의 아들의 진로에 대해 이야기하는 중 문학에 대한 대단한 식견을 알아채고 놀라 아들을 만나게 하려고 집으로 데려간다. 4일동안 극진한 대접을 받으며 신사의 아들에게 높은 학식과 박식함을 보여주었음은 돈키호테의 새로운 면모를 보여주는 첫 단계일 뿐이다.
이후 부자 카마초의 결혼식에 초대되어 그들의 꼬이고 꼬인 애정관계를 풀어주고, 마찬가지로 극진한 대접을 받으며 새로운 신혼 부부의 집에서 몇일을 머무는데, 2부의 클라이맥스는 이후 사냥을 하던 공작 부부와의 만남으로 이어지는 공작집으로의 초대와 그 공작 부부가 꾸미는 재미있는 계략이다. 그들 부부는 돈키호테와 산초의 상태를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고, 엄청난 무대장치와 인력을 동원하여 그들의 환상을 현실 속에 실현시켜줌으로써, 그들에게 미친짓을 부축이며 그것을 실시간으로 관람하며 즐거워한다. 이로써 뭐든 이해가 안가는 것을 마법사의 탓으로 돌리곤 했던 돈키호테와, 이를 이용해서 주인을 속여먹던 산초마저도 믿을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
산초는 1부에서도 돈키호테 다음으로 비중있게 다루어지는 인물이지만, 그의 어리숙하면서도 나름 꾀부리는 독특한 캐릭터는 2부에서 더욱 두드러지며, 특히 공작부인의 집에서 그 진가를 발휘한다. 섬을 약속한 돈키호테를 대신하여 산초에게 어떤 마을을 섬이라고 말하며 통치를 맡기고, 믿기지 않게도 몇일 동안 그 섬을 훌륭하게 통치하는 저력을 보이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의 가장 중심에 둘시네아에 대한 돈키호테의 사랑이 있다. 그녀는 사실상 알돈사 로렌소라고 하는 농부의 딸이다. 1부에서는 돈키호테도 그 사실을 알고 있고, 산초는 더더욱 더 잘 알고 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고귀하여, 돈키호테가 무찌른 모든 것의 영광이 바쳐지는 그 돌시네아가 뚱뚱하고 힘센 농부의 딸이라는 사실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돈키호테와 산초가 그 사실을 인지하고 있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에 대해 1부에서 돈키호테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래, 시인들이 자기들 멋대로 이름을 붙여서 찬양하는 여성들이 모두 실제로 있는 인물들은 아니지. 자네는 ...책이나 로만세나 이발소나 극장들을 가득 채우고 있는 여성들이, 모두 살과 뼈를 가진 정말로 살아 있는 여자들이며, 그녀들을 기렸고 기리고 있는 그 사람들의 진짜 연인이라고 생각하는가? 물론 아니지. 다들 시의 소재로 쓰기 위해 만들어 낸 인물들인 게야. 자기들을 사랑에 빠져 있거나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인물로 만들기 위해서 지어낸 여인들이란 말일세. 그러하기에 나도 저 알돈사 로렌소라는 그 착한 여자가 아름답고 정숙한 여자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믿으면 되는 거라네. 가문 따위는 중요하지가 않아. 의복을 내리기 위해 가문을 수소문하러 갈 것도 아니잖은가.
즉 알돈사 로렌스는 시적 영감을 위해 사용된 뮤즈다. 실존하는 알돈사 로렌소의 외모, 가문, 행동, 이름까지 모두 버린 후에 둘시네아라는 대단한 가문의 기품있고 아름답고 고귀한 여성을 탄생시키고 그녀를 열열히 사랑하며 목숨까지도 바칠 준비를 하는 것이다. 1편에서 산초는 그녀에게 전달해주기로 한 편지를 가지고 가지도 않은 채 신부와 이발사를 만나 돌아와서는 만났다고 얼버무리고 거짓말을 하는데, 2편에서는 돈키호테가 그녀를 찾으러 간다. 둘시네아는 알돈사 로렌스로부터 창조된 환상이며, 만일 그녀를 만난다면 그의 환상은 깨지게 되어 있음을 인지하고 있을지언데, 그는 부득불 그녀를 만나러 마을로 들어서고, 그녀의 집이 어디에 있느지도 모르는 산초는 꾀를 내어, 길가던 농부들을 둘시네아라고 알려주는데, 만일 실제 인물인 알돈사 로렌소를 만났다고 하더라도 크게 다르지 않지 않았을까. 특히 돈키호테는 그녀를 본 적이 4번 정도 있다고 했는데, 그 때의 기억이 만들어낸 환상과, 실존과의 차이는 이 길에서 만난 처자들과 크게 다르지 않을텐데 어떻게 극복할까.
well. 마법이 해법이다. 때는 바야흐로 중세가 저물고 근대의 여명이 밝아온 16~17세기였으며, 철학과 과학혁명은 이제까지 굳건히 믿고 있던 절대 진실의 세계가 거짓이었음이, 이제까지 천년이 넘도록 지켜온 기독교적인 세계관이 모두 미친짓이었음을, 그리하여 우리에게 남겨진 것이 증명된 것과 객관적인 것만 확실하고 그 외의 모든 것은 혼동 속에 빠져 있음이 유럽을 통해 조금씩 드러나던 중이었고, 그 때의 스페인은 세르반테스가 전쟁중 접한 다른 세계와는 차이가 있었을 것이다. 아직도 마녀사냥이 기승을 부리고 있었을까? 공교롭게도 세르반테스와 세익스피어는 같은 해 같은 날 죽었다. 1616년 4월 23일. 이 날은 책의 날이기도 하다. 죽기 1년 전에 이 책을 내놓았으며 그 한 해 전에는 위작인 가짜 돈키호테 후속편이 등장하기도 했다. 설명될 수 없는 모든 것은 마법의 탓으로 돌릴 수 있는 시대가 중세였다면 근대에는 설명할 수 없는 모든 것은 설명되고 규명해야 진실이되는 시대이며 돈키호테는 그 혼란의 한 가운데에서 과거를 붙잡고 장렬히 전사한다. 그에게 새로운 진실을 대면한다는 것은 곳 패배이자 죽음이었기 때문이다.
둘시네아라는 존재하지 않는 환상을 만들고 사랑에 빠지는 모습은 사랑에 대한 진실된 모습을 은유로 보요주는 최고의 풍자다.
돈키호테가 죽었다. 그의 죽음으로 편력기사도 구현을 위한 긴 여정도 끝이 났다. 기사도에 대한 끝 모를 광기를 제외하면 그는 진실했고, 순결했으며 정의 그 자체였다. 그는 신의가 있었으며 의리의 화신이었다. 편력기사도에 빠져 세상을 올바로 바라보지 못한 것만 제외하고는 가장 지성적이고, 올바른 삶을 살아간 존재였다. 엄청난 책의 두께로 인해 휴대하지 못하고 매일 퇴근 후 한 쳅터씩 읽어 나간 이야기가 거의 두 달이 다되어서야 끝을 만났다. 오랜 시간의 만남 때문인지 그와의 이별이 아쉬었다. 그만큼 돈키호테는 매력적인 캐릭터였다. 자신의 지난 삶에 대한 후회와 자신의 전 재산을 여 조카에게 물려주는 대신 나중에 조카가 결혼을 하게 될 때 그 배우자 될 사람이 기사소설을 읽었거나, 기사소설에 관심을 가지고 있으면 유산을 회수해서 불우한 이웃의 구제에 쓰라는 유언을 남기고 죽었다. 그의 묘비의 마지막 구절처럼 그는 미쳐서 살다가 정신 들어 죽었다.
오래전 어느 저명인사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청년들이여. 돈키호테가 되라” 취업난을 비롯하여 5포세대로 실의에 빠져있는 청춘들에게 격려의 의미로 한말이었으리라. 그런데 왜 하필 그 대상이 돈키호테였을까. 청년들을 향한 이 말의 의미는 돈키호테처럼 무모한 도전이라도 하라는 의미였을 것이다. 그게 청년의 특권이라고. 하지만 묻고 싶다. 그분은 과연 돈키호테의 원전을 끝까지 다 읽었을까? 기사도에 빠져 인생을 허비했던 자신의 지난시간에 대한 회환의 아쉬움으로 삶을 마감했던 돈키호테의 삶을 과연 젊은이들이 본받아야 할 삶이었을까? 무모한 도전이었지만 죽음의 순간까지 자신의 삶에 대한 긍지와 자부를 가졌다면, 그 도전의 현장에서 생을 마무리 지었다면 그러한 격려가 당연한 듯 보였겠지만, 돈키호테의 마지막을 읽은 사람이라면 그렇듯 무책임한 격려를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돈키호테는 자신의 삶에 대한 회환에 가슴 아파 하며 자신의 생을 마감했기 때문에. 더불어 제정신으로 돌아왔을 때 돈키호테는 궁극의 기쁨을 느꼈으므로.
그 증오할 만한 기사도 책들을 쉬지 않고 지독히도 읽은 탓에 내 이성에 내려앉았던 무지의 어두운 그림자가 이제는 없어졌거든. 그 책들이 가지고 있는 터무니없음과 속임수를 이제야 알게 되었단다. 이러한 사실을 참으로 늦게 깨달아, 영혼의 빛이 될 다른 책을 읽음으로써 얼마간이라도 보상할 수 있는 시간이 조금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이 단지 원통하구나(중략) 그러니 미치광이라는 평판을 남길 정도로 내 삶이 나쁜 것이 아니었음을 알릴 수 있는 죽음을 맞이하고 싶구나. 비록 미쳐 살기는 했으나 그러한 모습을 죽음 앞에서까지 보여주고 싶지는 않아.(880쪽)
한 가지 짚고 넘어가자.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은 진정으로 아는 것일까. 길가는 사람 누구를 붙잡고 물어봐도 돈키호테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은 없다. 거의 모든 사람이 그에 대해서 알고 있다. 풍차를 거인으로 착각하고 달려들고, 양떼를 군대로 생각하고 박차를 가하던 돈키호테의 이야기를. 우리가 알고 있는 이야기는 어린 시절 동화책 속에 본 요약된 이야기다. 누군가가 자신의 생각을 개입시켜 변형시킨 원작의 부스러기를 마치 우리는 그것이 전체인양 알고 있는 것이다. 자신이 아는 것이 아는 것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깨닫지도 못하고 그저 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건 문학작품에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어떤 사건이 발생했을 때 우린 그 사건을 보도하는 신문기사나 주위의 이야기를 통해 그 사건의 전모를 파악한다. 전해지는 이야기나 기사를 보고 그것이 마치 사건의 진실인양 생각하고 판단을 내린다. 하지만 그 사건 자체가 아닌 누군가에 의해 쓰여진 기사나 이야기는 이미 그 사건을 보고난 후 어떤 개인의 주관적인 생각이 개입되어 변형되어있는 것일 뿐, 그 사건의 본모습은 아니다. 우리가 현장에서 직접 보고 느낀 것이 아니면 그것이 진실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바로 우리의 착각이고 오산이다. 하지만 우린 그걸 진실인양 오도하고 그 오도된 근거를 가지고 자신의 판단을 내린다. 그리고 스스로가 그 사건에 대해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왜곡된 허상을 보고 그것이 마치 실상인양 그대로 믿어버리는 것이다. 그리고는 그 사건의 진실에 접근하려는 어떠한 노력도 하지 않는다. 그럼 그것이 과연 아는 것일까. 그건 아는 것이 아니다. 아예 모르는 것보다 더 못한 것이다. 이렇듯 앎에 대한 우리의 잘못된 판단들이 세상에 많은 문제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아닐까. 지금도 광화문 앞에서 억울함을 토로하는 많은 이들이 그래서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그릇된 정보로 인해 안다고 판단하는 것은 마치 우리가 돈키호테를 안다고 생각하지만, 돈키호테에 대해서 모르고 있는 것과 대동소이하다.
노자에 이르기를 ‘知不知 上. 不知知 病’(지부지 상. 부지지 병)’이라 했다. 풀어 말하자면 ‘알면서 모른다고 하는 것이 최고이며, 모르면서 안다고 하는 것은 병이다‘하는 말이다. 우리가 안다고 애기하는 것이 과연 아는 것일까. 어쩌면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그 모든 것들을 우리가 모르는 것은 아닐까.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고 누군가에겐가 우리의 앎을 전달할 때 그건 바로 나의 생각이 개입된 의견일 뿐이다. 의견이 개입된 앎이 누군가에게 전달될 때 그 전달받은 사람에게는 진실이 아닌 개인의 의견이 가입된 허상이 전달될 뿐이다. 리뷰를 읽는 것도, 쓰는 것도 어쩌면 누군가의 생각의 파편을 만나는 것이지. 그 대상의 실체를 보는 것은 아니다. 타인의 리뷰나 의견은 그들의 삶이 만든 각각의 거울에 비친 허상일 뿐이다. 그 작품을 읽어보기 전에 아는 것은 아는 것이 아니다. 그럼 내가 아는 것은? 나만 아는 것이다. 그건 그 의견 속에 나의 생각이 깃들여있기 때문이다. 나의 앎에 대한 궁극적인 의문이 돈키호테를 비롯하여 여러 고전들을 만나게 했다.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고전도 우리가 원전을 만나보기 전에는 아는 게 아는 것이 아니다. 내가 아는 것 또한 나만 아는 것이다. 그건 내가 살아온 삶의 연륜이 만들어낸 시선 속에 갇혀 사물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자의 위정편의 말씀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 바로 아는 것이다” 에 비쳐보면 우리가 아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어떠한 사건에 대한 진실된 모습을 보기위해서는 자신의 눈으로 확인해야 한다. 반드시 자신의 눈으로 자신의 생각으로 세상을 볼 것이다. 하지만 이 또한 자신만 아는 것이다. 이런 의견을 타인에게 강요하는 것 또한 스스로 허상의 우를 범하는 것이다. 이미 누군가에겐가 자신의 앎을 전하는 것은 각색을 통해 내 생각에 의해 변형이 일어난 허상을 전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부(工夫)란 답을 아는 것이 아니라, 생각의 기회를 갖는 것이다. 그리고 깨닫는 것이다. 제대로 된 진실을 만나기 위해.
돈키호테는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다. 2편에 나와 있는 내용을 참고로 하면 돈키호테를 안 읽은 사람이 없을 지경이며, 어느 집 사랑방치고 그 책 한권 없는 집이 없다는 것이다. 그만큼 인기있다보니 속편에 대한 요구도 증가되었다. 돈키호테 1편 이후 10년 정도 지나고 나서 세르반데스는 2편의 작업을 시작한다. 한데 웬걸.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작가가 쓴 짝퉁 2편이 세상에 나온다. 아마도 세르반데스에게 반감을 품은 이가 서술한 것으로 보인다. 돈키호테는 어떤 현자가 자신의 행적을 낱낱이 기록하여 출판했으리라 생각하는 한편 혹시나 마법사의 저주로 인해 자신의 이야기가 왜곡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의혹에 빠진다. 명성에 대한 자부심과 왜곡에 대한 의혹에 사로잡힌 돈키호테는 다시 길을 떠난다. 1편에서는 모험을 찾아 돈키호테가 길을 떠났다면 2편에서는 1편에서 이야기된 자신의 이야기가 사실에 맞게 회자되는지 확인하기 위해 길을 나선다. 책만 보다 미쳐버린 돈키호테가 이제는 책 자체가 된 것이다.
헌데 책을 읽다보면 돈키호테의 저자가 누구인지 혼돈이 된다. 책에 의하면 일단 원작자는 아랍인 ‘씨테 아메떼 베넹헬리“다. 원작자가 아랍인이면 역자는? 이것이 바로 세르반데스의 풍자요 아이러니다. 1인칭과 2인칭 3인칭의 시선이 혼돈된 화자의 관점도 그렇고 기독교사상에 입각한 기사소설의 원작자가 무슬림이란다. 거기에 짝뚱2편의 작가는 아메야네다라는 사람이다. 2편에서는 짝퉁소설을 비하하기 위해 돈키호테가 일부로 자신의 여정을 수정하는 장면도 나온다. 또한 대부분 속편은 1편이야기의 연장이다. 하지만 돈키호테는 다르다. 두 작품이 전혀 별개의 이야기로 구성되어있다. 세상에 이런 연작이 있나할 만큼 2편의 이야기는 생뚱맞다. 그러니 2편을 읽지 않고 읽었다고 함부로 거짓말을 했다가는 큰 코 닥친다.
돈키호테의 무용담이 책으로 출간되었다. 돈키호테의 이름이 세상에 알려졌다. 세 번째 떠나는 그의 행보에서 만나는 많은 이들이 돈키호테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유명인사가 된 것이다. 자신의 편력기사로서의 행보가 이제야 사람들의 인정을 받기 시작한 것으로 착각한 돈키호테, 그의 모험에 박차를 가한다. 이때 초원에서 만난 부에나비아 궁전의 공작부부가 그의 광기에 더욱 더 힘을 실어준다. 그를 제대로 된 방랑기사로 인정하고 자신의 궁전으로 초대하여 마치 기사도가 이 땅에 다시 구현된 것 인양 그를 진정한 편력기사로 대우한다. 그들의 대저택을 연극무대로 꾸민다. 자신의 영지를 성으로 인지시키고, 기사도 책에 나오는 모든 관습과 예식을 따른다. 하인들을 시켜 각자의 역할을 주고 상황들을 연출시킨다. 한바탕 연극이 시작된 것이다. 돈키호테를 믿게 하기 위해 공작부부도 배우가 된다. 연극이 판치는 세상이다. 그들이 깔아놓은 멍석위에서 돈키호테는 방랑기사의 명성과 자신이 꿈꾸던 세상을 구현하며 살고, 싼초 판사는 꿈에도 그리던 섬의 총독이 되어 지배자로서의 광영을 누리지만 이 모든 것이 한편의 연극이고, 그는 실상 슬픈 삐에로가 된다. 이렇게 되면 이제는 누가 진짜 광대이고 누가 미친 자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 그래도 돈키호테는 허황된 이상에 빠져 황당한 광기에라도 빠져 그렇다고 치자. 하지만 다른 이들은 그 광기도 없다. 아무런 이상도 욕망도 없다. 소위 삶을 추동하는 진실도 없다. 광기에 사로잡힌 돈키호테는 그나마 그 광기 안에서나 밖에서나 진실하다. 하자만 그들은 그저 돈키호테의 광기를 오락적으로 소모하는 것뿐이다. 돈키호테는 기사도의 이상에 눈멀고 싼초는 총독이 되겠다는 최소한의 욕망이라도 있었다고 치자 한데 다른 이들은 그저 즐기기 위해 어릿광대짓에 빠져들었다. 예술적 상상력이나 지적 호기심도 아닌 그저 달리 심심해서이다. 여기서 세르반데스의 풍자의 묘미가 드러나다.
돈키호테가 그리는 시대는 바로 스페인의 황금시대이다. 먹고살기 위해 아등바등 하지 않고 모두가 잘살게 되는 그런 사회. 세상에 정의가 살아 숨 쉬는 사회. 그것이 모두가 상상하는 이상세계이다. 그런 세상이 되면 모두가 행복할까. 아니다. 착각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때부터 사람들은 권태에 빠진다. 권태는 망상을 낳고, 망상은 허상을 꿈꾼다. 그래서 사랑에 미치고, 오락에 미친다. 아니 뭔가에 미치지 않고는 제정신으로 살기 어려운 세상이 된다. 그저 꿈만 꾼다. 그 결과, 세상은 온통 연극판이 되고 사람들은 하나같이 광대가 되어버렸다. 그렇다면 우리네 인생 또한 한바탕 꿈이 아닌가. 그럼 꿈에서 깨어나면 되는가. 아니다. 이 꿈에서 깨어나는 순간 바로 저 꿈을 꾸게 된다. 꿈과 현실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수많은 꿈들의 이합집산만 있을 뿐이다. 이쯤 되면 진실과 거짓의 구분이 모호해진다. 모두가 꿈만 꾸는 세상, 현실을 외면하고 삶에 진실을 뒤로하고, 그저 눈에 보이는 허황된 꿈만을 위해서 달려 나가는 삶. 바로 지금 우리의 모습이다. 모두가 자본주의의 논리에 갇혀 허상만을 향해 치닫는다. 미치고 미치지 않고는 구분이 없다. 누군가는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누군가는 장난삼아. 누군가는 생의 모든 것을 걸고서 그 미친 행로에 발을 맞춘다. 다 같이 미쳐서 한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 밖에서 보는 이들에겐 그들의 어이없는 행보가 미친 행동으로 보이지만 그 속에 몰입된 이들의 시선으로는 자신들의 행위를 돌아보지 못한다. 그저 향락과 재미에 빠져 반복하고 또 반복한다. 미친 행위들을.
무대 위의 배우는 안다. 자신이 지금 연극을 하고 있다는 것을, 자신의 삶이 꿈인 것을. 하지만 우리는 모른다. 지금의 현실이 한편의 꿈이라는 것을. 연극도 꿈도 막이내리고 나면 현실로 돌아온다. 그런데 모두가 그 현실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그저 꿈만 꾸다 꿈속에서 죽고 만다. 죽음에 순간에 다다라서야 그게 꿈인 줄을 안다. 죽음에 순간이 돼서야 돈키호테처럼 현실을 직시하고 지나간 시간에 대한 아쉬움으로 애증의 죽음을 맞는다. 지나간 모든 시간이 한때의 영광이었고, 자신을 향해 환호하던 그 모든 것들, 자신이 추구하던 그 모든 것들이 허황된 것이었음을 그제서야 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미 우리가 허비해버린 시간은 다시 되돌릴 수 없으니.
1편에서 가장 매력적인 케릭터가 자유 선언을 하고 모두가 추구하는 삶의 길에서 벗어나 자신의 길을 걸어간 마르셀라였다면, 2편에서 매력적인 캐릭터는 바로 산초 판사이다. 공작부부의 연극에 의해 섬의 통치자가 된 샨초 판사. 그는 글도 모르고 어리숙해서 통치도 잘못할 거라는 모두의 생각과는 달리 취임첫날부터 자신의 지적 수준을 평가하기 위한 관문을 무사히 통과한다. 모두가 놀란다. 그의 현명함에. 그의 판결은 솔로몬의 지혜가 무색할 정도이다. 그저 속담정도만 입에 올리던 산초, 농사를 짓고 살지만 해박함과 현명함, 세상의 이치에 통달한 판단은 모두의 놀라움이다. 이 또한 세르반데스의 해학이다. 제대로 된 교육을 받고 자신들의 지식을 기반으로 귀족들이 다스리던 그 시대의 통치자들의 무능함에 대한 질타이다. 단 10일간의 통치였지만 그의 통치가 이치에서 벗어난 적은 한 번도 없다. 배우지 못했지만 일상적인 삶을 통해 얻은 경험이 배운 자들의 지식보다 더 귀감이 된다. 하지만 일상의 자유로운 삶을 영위하던 샨초 판사에게 형식에 얽매여 사는 통치자의 삶은 옥쇄 그 자체였다. 10일간의 통치 후 그는 스스로 권좌를 박차고 권력자의 자리를 내려놓는다. 그리고 빈손으로 들어간 그 지역으로 들어갈 때 타고 들어간 그의 사랑하는 당나귀 잿빛을 타고 빈손으로 나온다. ”그리고 내 주인이신 공작님께는, 내가 벌거숭이로 태어나 벌거숭이로 남았다고 전해 주시오. 나는 잃은 것도 얻은 것도 없소이다. 이 말은 곧 내가 다른 섬의 통치자들과는 완전히 반대로, 일전 한 푼 없이 이 섬에 들어와 일전 한 푼 없이 나간다는 뜻이오, 자 나갈 수 있게 비키시오.(661쪽) 세르반데스가 이 부분에 대해 여러 번 작품 속에 언급한 것을 보면 그 시대의 권력자들의 무능함과 치부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 아닌가 한다. 샨초는 자신의 자리가 아닌 것에 일말의 미련도 갖지 않고 박차고 나온다. 권력자라는 자리가 주는 대우와 음식, 그리고 편한 잠자리가 그의 것이 아님을 느끼고 나온 샨초 판사만이 현실적인 인간이다. 우리 모두가 생각하는 권력이라는 허상이 주는 허망함을 샨초 판사에 대비해 세르반데스는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야망과 오만의 탑 위에 오르고 난 이후부터는 내 영혼 속으로 수천가지 비참함과 수천가지 노고와 수천가지 불안이 들어오더구나(660)”
삶에 있어 모든 것이 늘 같은 상태로 지속될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참으로 부질없는 것이다. 오히려 삶은 모두 원을 그리며 흘러가는 듯하다. 말하자면 중심에다 한 점을 놓고 그 주위를 빙글빙글 도는 모양이다. 그러니까 봄은 여름을 추적하고, 여름은 한여름을 추적하며, 한여름은 가을을 추적하고, 가을은 겨울을, 그리고 겨울은 봄을 추적하니, 이렇게 세월은 멈출 줄 모르는 바퀴를 타고 구르고 또 구른다. 단지 인간의 목숨만이 세월보다 더 가볍게 그 종말을 향해 치닫는다. (655)
돈키호테는 어쩌면 꿈을 꾸고 있을 때 열정적이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행복하진 않았다. 그는 기사도의 욕망에 사로잡혀 있을 때는 마음 편히 자지도, 먹지도 못했다. 광기에 빠져 있을 때는 그의 얼굴에서는 기쁨과 만족을 볼 수 없었지만 광기에서 깨어났을 때 그의 얼굴이 한없이 평화로웠다. 그리고 편하게 잤다. 한없는 역설이다. 욕망과 탐욕의 꿈을 꾸는 현대인의 일상도 이와 다르지 않다. 우린 왜 마르셀라처럼, 샨초 판사처럼 부질없는 것들에 대한 욕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일까. 왜 그들처럼 진정한 자유를 향한 갈구를 외면하는 것일까.
어떤 이는 돈키호테를 통해 꿈을 향한 열정을 보았고, 어떤 이는 장자를 보았다고 했다. 어떤 이는 삶의 무상함이 보였다고도 한다. 이 또한 자신들이 살아온 삶의 시선에 비친 돈키호테의 모습이다. 작품은 하나이지만, 그 작품을 대하는 이들의 시선이 동일하지 않는 것은 각자가 살아온 삶의 무게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럼 돈키호테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은 어느 것이 맞는 것일까. 아니 정답이 있기는 한 걸까
퇴근길 전철 안에서 돈키호테를 생각하다 문득 머릿속을 스치는 노래 한가락이 떠올랐다. 내가 나고 자란 전라도 지역에서 종종 들었던 흥타령이다. 어차피 우리네 삶도 돈키호테의 삶처럼 한바탕 꿈이 아닐런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하고, 이룰 수 없는 꿈을 꾸었던 돈키호테는 행복했을까. 미쳐서 살다가 제정신으로 죽은 돈키호테. 현실을 직시하고 사는 것과 꿈을 꾸고 사는 것, 어느 것이 더 행복할까. 삶이 주는 허무를 택할 것인가? 아님 이루어지지 못할지라도 꿈을 택할 것인가. 그건 자신의 선택의 문제이다. 하지만 그 무엇을 선택하던 삶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는 것이다. 돈키호테의 삶이던, 샨초 판사의 삶이던, 그 밖에 어떤 이의 모습으로 살더라도 말이다. 하지만 정작 삶에서 중요한 것은 어떻게 사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죽느냐의 문제는 아닐까.
남도 흥타령 / 꿈이로다
꿈이로다 꿈이로다
모두가 다 꿈이로다
너도 나도 꿈속이요
이것저것이 다 꿈이로다
꿈 깨이니 또 꿈이요
깨인 꿈도 꿈이련만
꿈에 나서 꿈에 살고
꿈에 죽어가는 인생
부질없다 깨려는 꿈
꿈을 깨어서 무엇 하리
아이고 대고 허허~
성화가 났네 허~
<흥타령 전곡입니다. 영화 취화선의 내용과 가장 잘 어울리는 노래이기도 합니다. >
"이때 나무에서는 벌써 수천 가지 색으로 치장한 새들이 지저귀기 시작하고 있었다. 가지각색의 즐거운 노랫소리로 신선한 여명에게 축하를 보내고 인사하는 듯했다. 벌써 여명이 동쪽 문과 발코니로 아름다운 얼굴을 차츰차츰 드러내면서 머리카락을 흔들어 액체로 된 진주를 무수히 뿌리니 하얗고 작은 진주들이 비처럼 내리는 것 같았고, 풀잎들은 그 부드러운 액체에 목욕을 하며 싹을 틔웠다. 여명이 오자 수양버들은 달콤한 감로를 증류하고 샘들은 웃어 댔으며 냇물은 졸졸 흐르고 숲은 기뻐하고 초원이 풍요로워졌다." (<돈키호테> 2권 199쪽)
"이때 벌써 즐겁고 명랑한 여명이 빠른 걸음으로 오고 있었다. 들판의 들꽃들은 고개를 들고 일어났고, 수정같이 맑은 시냇물은 희고 검은 돌멩이들 사이를 헤집으며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강에 조공을 바치기 위해 졸졸졸 흘러갔다. 즐거운 대지와 맑은 하늘과 상쾌한 공기와 잔잔히 흐르는 빛이 저마다, 그리고 모두 함께 여명의 치맛자락을 밟으며, 다가오는 하루가 고요하고 맑을 것을 예고하고 있었다." (<돈키호테 > 2권 455~456쪽)
책의 표지 날개에 <돈키호테> 1권은 1605년에 2권은 10년이 지난 1615년에 발표 되었다고 쓰여있다. 내가 초등학교 고학년 때 읽은 축약본과 다른 완역본이 주는 매력을 고스란히 담은 이 책은 이 당시의 출판물에 가격을 정하는 방법과 승인서들, 특허장, 작가가 쓴 헌사 그리고 독자에게 드리는 서문 등을 담고 있어 돈키호테라는 조금은 평범치 않은 주인공을 내세운 이 소설의 시대 속으로 독자를 데려가는 데 용이하게 하고 있다.
1권은 돈키호테의 환상 속에 벌어지는 얼토당토 않은 모험이 두들겨 맞는 고행으로 끝나는 것의 반복을 읽는 것이 조금은 지루했고 중반부부터 돈키호테와 산초가 만난 이들의 이야기들로 꾸며지면서 점점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었다면 2권은 본격적인 돈키호테와 산초의 모험 위주로 이야기가 꾸며지고 조금 더 설득력을 갖추고 있다. 주인공이 벌이는 혹은 주인공에게 벌어지는 이야기들이 정교하고 풍부하게 꾸며져 있다. 그리고 작가 세르반테스가 우리의 주인공 돈키호테를 그의 편력기사에 대한 환상은 그대로이되 조금은 더 매력을 가진 인물로 그리고 있어 읽는 독자가 호감을 가질 수 있는 인물이 되게 하였다. 돈키호테가 1권에서 '슬픈 몰골의 기사'로 불린다면 2권에서는 '사자의 기사'로 칭해진다.
1권 이야기의 토대는 무작정 편력기사 모험을 떠나는 돈키호테와 종자 산초로 시작된다면 2권의 특이함은 1권의 이야기가 돈키호테의 당대에 출판이 돼있어서 사람들에게 널리 읽히고 있다는 전제로 이야기가 이끌어진다. 돈키호테와 산초가 가는 곳마다 그들에 대해 잘 알고 있으며 호감을 갖고 그들을 환영하는 사람들이 돈키호테와 산초에게 벌이는 지나치지 않은 장난들로 이야기가 꾸며지고 있다. 그 수없는 장난들 속에 산초는 그토록 염원하던 '섬 통치자'가 되기도 하는데 그에게 주어지는 사건들에 대해 현명하게 판결을 내리는 모습은 재미도 있으면서 산초를 (독자에게) 사랑스럽게 여겨지게 만든다. 산초가 통치를 하는 동안 돈키호테는 자신의 정결을 시험받는데 그는 어떤 유혹에도 한번도 본적 없는 둘시네아를 저버리지 않는다.
1, 2권을 읽으며 세르반테스가 굉장히 박식하고 지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사실 그의 뛰어난 지식 보다는 캐릭터를 통해 망설임 없이 구현되는 지혜로움, 인간에 대한 인식 그리고 그의 삶의 고난과 중년 이후 가족을 통해 인간에 대한 상실감이 있었을 텐데도 그려지고 있는 인간의 따스한 면들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는 것이 탐이나는 이야기였다.
다른 책들에 비해 쉬이 읽지 못한 우리 인류의 첫 소설(날개에 '소설의 원형'이라 쓰여있다.)이였는데도 읽고 난 지금은 다시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다면 책이 주는 그 깊이를 더 잘 음미할 수 있을 것이고 <돈키호테>를 읽는 기쁨도 더할 것이라는 생각이다.
서두에 세르반테스가 묘사한 '여명'이 너무도 아름다워 책의 문장을 옮겨 놓았다. 이 문장들은 그가 얼마나 뛰어난 작가인지를 한층 잘 알게 해주는 것이라 생각된다.
지난 해 스페인을 여행하기에 앞서 <돈키호테1; http://blog.yes24.com/document/8142191>을 미리 읽었지만, 돈키호테가 숭모하는 여인 알돈사 로렌조, 즉 둘시네아 공주가 등장하는 장면이 없어 묘하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여행 중에 가이드가 소개하는 뮤지컬 <돈키호테>에는 둘시네아 공주가 등장한다는 이야기를 듣고서는 <돈키호테2>를 읽어 확인해볼 필요가 생겼습니다.
1605년 세르반테스가 발표한 「돈키호테(1편)」는 같은 해에 6판까지 나올 정도로 인기를 끌었지만 정작 세르반테스는 판권을 출판사에 양도하는 바람에 경제적인 이득은 얻지 못했다고 합니다. 상황이 이런데도 세르반테스가 바로 2편을 내놓지 않은 이유는 분명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1614년에 타라고나에서 누군가 ‘알론소 페르난데스 아베야네다’라는 필명으로 <돈키호테> 2편를 출판하자 이를 참지 못한 세르반테스가 67세의 고령을 무릅쓰고 2편을 써냈다고 합니다.
제1편은 라만차 지방의 시골양반인 알론시 키하노가 기사소설을 지나치게 탐독한 나머지, 스스로 악을 물리치며 약한 자를 보호하는 편력기사로 활약해 보겠다며 위해 마을을 떠나 좌충우돌하는 이야기입니다. 1편을 읽고 돈키호테는 정신 나간 괴짜가 맞다고 했더니 속에 담긴 의미를 다시 새겨보는 것이 좋겠다는 권유를 받았습니다. 사실 <돈키호테>가 오랜 세월을 지나는 동안에도 꾸준하게 세계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은 주요 등장인물인 돈키호테와 산초 판사가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는 이상주의와 현실주의를 대변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해석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각각이면서도 하나가 되어야 하는, 즉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가지 성격이 조화를 이루는 삶이야말로 인간이 추구할 최종의 가치라는 점을 설파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소설을 분석적으로 읽는 고수들이 내놓은 개념일 것이고, 저와 같은 속물들은 그저 읽히는 대로 느끼는 것 아닐까 싶습니다.
제2편은 돈키호테의 세 번째 출정으로 시작되어 되는데, 기사대회에 나가서 이름을 날리는 것이 목표입니다. 돈키호테는 전편을 통하여 이미 유명인사가 되어 가는 곳마다 그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넘칩니다. 그들은 돈키호테를 놀려보려 즐거움을 얻으려는 세속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그를 걱정하는 마을 사람들은 돈키호테의 출정을 방해하는데, 특히 같은 마을의 학사 삼손 카라스코는 ‘거울의 기사’로 변장하고 돈키호테와 대결을 펼칩니다. 처음에는 돈키호테에게 패하지만 결국 바르셀로나에서는 돈키호테를 굴복시키고 마을로 돌려보내게 됩니다. 집으로 돌아온 돈키호테는 평범한 목부로 살려고 결심하지만 병이 들고, 결국 제정신을 회복하여 기사소설을 전부 태워버리라는 말을 남기고는 숨을 거둡니다. 주인공이 죽는다는 것은 3부의 가능성을 없애는 셈입니다.
제2편에서는 산초 판사가 영주가 되어 뛰어난 관리능력을 보여주는 장면도 나옵니다. 결국 앞서 말씀드린 현실과 이상주의가 대립하는 것 같지만 결국에는 합일점을 찾아낸다는 의미를 감추고 있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1편보다 나은 속편이 없다는 것처럼 삽입된 액자소설들이 탄탄하게 구성된 1편과는 달리, 2편은 마치 쪽대본으로 이어지는 우리나라의 드라마에서 것처럼 사건이 연속적으로 나열되는 단순한 구성이라는 점이 실망스러웠던 것 같습니다. 어떻게 보면 2편의 주인공은 돈키호테가 아니라 산초 판사가 주인공인 듯하다는 느낌도 들었습니다. 그리고 보니 <돈키호테>에서 궁금했던 둘시네아공주는 공식적으로는 등장하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돈키호테가 산초와 같이 둘시네아공주를 만나러 가지만 산초의 농간 때문에 엘 토소보의 시골아낙네를 둘시네아공주라고 믿게 된다는 것입니다. 결국 돈키호테와 둘시네아공주의 달달한 사랑이야기는 어디에서도 읽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돈키호테의 번역가 안영옥 교수는 <돈키호테, 어떻게 읽을 것인가> 라는 제목으로 돈키호테와 세르반테스에 대한 강연을 했다.
"우리 일반인들한테 돈키호테라고 하면 괴짜, 정상의 궤도에서 벗어난 사람과 같이 긍정적인 면보다는 부정적인 면으로 많이 인식하고 있죠. 돈키호테는 그런 하나의 이미지 혹은 부정적인 면을 갖는 사람이 아니에요."
『돈키호테』의 작가 세르반테스와 작품이 쓰인 시대적 상황에 대해서 간략한 설명이 있었다. 세르반테스는 스페인이 대 제국의 영광을 누렸던 까를로스 1세부터 영광의 뒤안길로 접어들던 펠리페 3세까지의 시절을 모두 경험하면서 특별한 삶을 살았다. 세르반테스가 살던 펠레페 2세 시절은 국가에 의해 종교를 강요받았고 종교재판을 통해 철저한 삶의 투쟁이 요구되던 시기였다. 종교재판을 통해 수많은 유대인들이 고통을 겪었고 제대로 된 삶을 살지 못했다. 세르반테스 역시 개종한 유대인으로서 고난과 역경으로 뒤덮인 굴곡진 삶을 살았다. 당시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로 인해 광우문학이 발전하게 되었는데, 광우문학이란 겉으로는 웃음을 주지만 그 안에는 사회비판, 인간성 말살에 대한 비판을 담은 문학을 뜻한다. 돈키호테 역시 이러한 광우문학의 형식을 띄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일반적인 기사소설에 나오는 주인공은 엘리트 계급이거나 왕족이에요. 그리고 귀부인을 두고 있고 사랑하는 귀부인의 명예를 드높이기 위해 모험을 떠나고 거인, 괴물과 같은 것들과 싸우죠. 싸우는 대상 역시 다른 왕국의 왕이고, 기사가 머무는 곳은 궁전이 대부분이에요. 기존 기사 소설이 어땠는지 또한 이 작품에 잘 나오고 있어요. 그런데 세르반테스는 이러한 것들을 다르게 작품에 등장시켜요. 일단 주인공은 이달고예요. 이달고는 이달기아라는 스페인의 하급귀족을 뜻해요. 다른 기사처럼 엘리트 계급이거나 왕족이 아니에요. 그리고 가난하죠, 당시 법전에 보면 가난한 사람은 기사가 될 수 없다고 나와 있어요. 게다가 개종한 유대인이고, 광인이죠. 광인도 기사가 될 수 없어요. 기사 서임식 역시 장난스럽게 이루어졌어요. 법전에는 광인이 제 정신이 되었다고 해도, 장난으로 기사 서임식을 받은 사람은 기사가 될 수 없다고 나와 있어요. 이렇게 작품에서 이야기 하고 있는 돈키호테는 기사가 될 수 없는 조건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런데 세르반테스는 이런 사람을 주인공으로 등장시키고, 결국 돈키호테는 모험을 떠나는 기사가 되죠.”
이처럼 세르반테스는 기존 기사 소설들의 권위를 실추시키기 위하여 기존 기사 소설에 나온 주인공이나 사물들을 놀림거리로 만들었다. 작품의 집필 의도에 대해 세르반테스는 “기사 소설을 공격하기 위한 것, 이세상과 속인들 사이에서 기사소설이 차고 넘치며 권위를 갖는 것을 무너뜨리기 위한 데 목적이 있는 것” 이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작품의 시대적 배경과 저자의 집필 의도등 배경지식은 『돈키호테』를 읽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