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곧 이야기로소이다
<삶의 발명>을 읽고
모든 생명은 연결되어 있고 지구는 더 이상 황금 보물을 찾아 정복할 곳이 아니라 잃어버린 의미와 신비를 되찾는 곳이다. 나는 거북이 알과 맛있는 귤에 걸맞은 이야기를 따라가볼 생각이다. "이 이야기가 딱이야!" 그런 이야기를 찾을 수만 있다면 세상에 돌려줄 것이다.(227쪽)
정혜윤 작가의 『아무튼, 메모』, 『슬픈 세상의 기쁜 말』, 『삶의 발명』을 읽으면 '이야기'를 간단한 명사로 생각하기 어렵다.
'이야기'라는 단어가 어디까지 확장할 수 있는지 새로운 사전을 만든 것 같다. 근데 한 권으론 부족해서 세 권으로.
그래서 나는 세 권을 정혜윤 작가의 이야기 3부작이라 부르고 싶다.
- 이 슬픈 세상에 아무튼 메모까지 해가며 왜 '이야기'가 필요한지,
- 그게 우리의 삶을 어떻게 발명하는지,
- 발명한 그 삶이 우리를 어떤 기쁜 말로 데려가는지
를 안내하는 이야기 3부작.
『삶의 발명』은 어떤 '이야기'를 이야기할까 기대하며 읽었다.
작가 마음에 들어온 이야기, 작가가 매혹된 이야기를 잘 따라가면 된다.
한 사람에게 사랑을 품게 한 이야기들이 154페이지에 이르자 중요한 질문이 떠오른다.
"이제 결정적으로 중요한 질문은 하나뿐이다. 딱 지금 이 시기에는 어떤 이야기가 필요할까?"
『삶의 발명』이 정의한 '이야기'를 소개하겠다.
이야기의 다양한 사전을 점검한 뒤 여러분께서는 어떤 이야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실지 궁금하다.
『삶의 발명』을 읽고 나도 사전을 새로 썼다.
내게 '이야기'란 '이야기를 이 세계에 돌려주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는 결과까지 포함한다.
'지금 이 시기에 어떤 이야기가 필요하냐'던 작가의 질문과 '지금 이 시기에 어떤 이야기를 돌려줘야 하나'라는 나의 고민이 만났다.
질문과 고민이 같은 답이어도 좋겠다고 생각한다.
원치 않으면 이야기를 떠나도 된다는 결심도 했다.
아래 문장에서 태어난 허락이기도 하다.
"나는 '메머드 이야기'를 떠나기로 했다. 그리고 계속 나의 이야기를 찾아 길을 갔다." (202페이지)
어떤 이야기가 잘 안 풀릴 때 떠나려는 결심은 어렵다. 결심도 어렵지만 실행은 더 어렵다.
회피. 포기. 실패라는 단어가 나를 죄책의 수렁으로 몰아넣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 문장을 읽고, 다시 돌아가더라도 잠깐 떠나보는 것은 결코 회피나 포기나 실패가 아니라 계속 나의 이야기를 찾아가기 위한 추동이라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요즘 나는 캐나다의 추리 소설 작가 루이즈 페니의 '아르망 가마슈' 시리즈를 읽는 중이다. 전부터 이 시리즈의 존재를 알았지만 이제야 비로소 읽기 시작한 건, 이 시리즈가 원작인 드라마 <쓰리 파인즈>를 봤기 때문이다. 드라마에서 아르망 가마슈에게 어떤 사람이 이런 말을 한다. "당신은 최악의 상황에서도 최선을 발견하는 사람이군요." 그 말이 좋고 그 말을 듣는 아르망 가마슈의 성품이 좋아서 아르망 가마슈 시리즈를 읽게 되었다. 그러니까, 지금의 나는 그런 사람을 좋아하는 거다. 최악의 상황에서도 최선을 발견하는 사람.
정혜윤 작가의 <삶의 발명>을 읽으면서 작가님도 그런 사람이구나 생각했다. 서문에서 작가님은 이 책을 집필하는 동안 교통사고를 당했다고 고백한다. 사고 직후 치아가 몇 개나 부러졌다고 하신 것을 보면 큰 사고였던 것 같다. 나라면 가해자를 욕하고 나한테 이런 사고가 일어나다니 하늘을 원망했을 것 같은데, 작가님은 사고 덕분에 겸손을 배웠다고, 삶이 얼마나 소중한 선물인지 깨닫는 기회가 되었다고 하셔서 놀랐다. (그래도 작가님 더는 다치지 마시고 아프지 않으시길... ㅠㅠ)
이 책에 나오는 사람들도 그러하다. 책에는 라디오 PD인 저자가 만난 다양한 사람들의 사연이 나온다. 그 중 가장 충격적이었던 사연은 일제강점기 때 포로감시원으로 일했던 조선인 전범들의 이야기이다.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일본이 조선인들을 포로감시원으로 데려갔다는 사실은 리처드 플래너건의 소설 <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을 통해 알고 있었다. 조선인 포로감시원들은 병사로 전쟁에 끌려가느니 포로감시원으로 끌려가는 편이 대우가 나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일본은 패망했고 일본군에 부역한 이들 중 다수는 전범으로 처형되고 나머지는 가까운 가족에게조차 자신이 한 일을 말할 수 없었다.
이들은 '무지가 죄'라며 자신들의 선택을 후회했지만, 이들보다 훨씬 더 큰 죄를 지은 일본인 전범들이나 친일파들은 여전히 떵떵거리며 잘 살고 있다. 책에 나오는 대구 지하철 사고, 씨랜드 화재 사고, 고 김용균 노동자 산재 사고, SPC 산재 사고의 유족들은 여전히 고통받는데, 사고에 직접적인 책임이 있는 사람들은 잘만 살아간다. 가해자 측에 조금이라도 연루된 사람들 또한 괴로워하고 자책하는데, 결정권자였던 사람들은 영화 <밀양>의 가해자처럼 스스로 용서하고 용서받았는지 아무런 반성이 없다.
여기까지는 내가 늘 접하는 이야기이고 나도 늘 하는 생각인데, 저자는 이런 이야기에서조차 희망을 발견한다. 전범으로 지목되어 사형을 앞둔 조선인 포로감시원들이 힘든 상황에서도 서로를 보살핀 이야기, 사고로 가족을 잃은 유족들이 다른 사고가 일어났을 때 가장 먼저 사고 현장으로 달려가 유족들을 챙기는 이야기, 인간만큼 동물의 생명도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저자는 이런 이야기들이 계속해서 '발명'되는 한, 우리의 삶도 계속해서 살아볼 만한 것이 된다고 말한다. 이런 이야기들을 계속해서 전해주는 저자에게 고맙다.
《삶의 발명》 은 정혜윤 작가님의 산문집이에요.
제목을 보면서 '삶'이라는 단어 옆에 '발명'이 마음에 들었어요. 능동적인 에너지가 느껴졌거든요.
저자는 이 책을 거의 완성한 상태에서 교통사고를 당했던 경험을 이야기하면서, "겸손을 배우기 딱 좋은 날이었다. 내가 무엇을 누리든 그것은 한순간에 사라질 수 있다. 하지만 모든 것이 다시 시작되었다. 많은 것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가 나에게 또 한 번 주어졌다. 살아남는 것이 중요한가, 변화하는 것이 중요한가. 나를 통해 묻는 사건이 일어난 것만 같다. 경이롭게 재생할 수 있다면 나를 위해 슬퍼해준 분들에게 은혜를 갚는 일이 될 것이다." (6p)라고 했어요. 누구든지 저자와 같은 일을 겪고 나면 엄청난 충격과 함께 많은 생각들을 하게 될 거예요. 저자는 지금 살고 있는 삶에 '더 나은', '더 좋은', '더 새로운'이라는 단어만 넣으면 삶은 갑자기 도전할 가치가 있는 모험으로 변하기 때문에 이것이 삶의 발명이라고 했어요.
어떤 깨달음을 얻느냐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무엇이든 각자의 생각과 마음이 빚어내는 삶이며, 의미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해요.
작가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그들의 이야기 속에서 슬픔과 회복과 기쁨과 애도와 희망을 그리고 사랑을 찾았고 그 이야기들이 모여서 '작가' 를 나타내는 듯 했다.
삶, 살아내는 것 자체가 주는 숭고함과 아름다움, 그리고 그 안에서의 지구에 모든 생명체들의 각자의 이야기들.
작가의 마지막 말처럼 '나의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는 삶을 나도 살아내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