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겪지만, 혼자서 해결하기 어려운 상태”
이것은 트라우마에 대한 해석이다. 겪어 보지 못한 사람은 알 수 없는 아주 무서운 말이다.
트라우마를 아주 잘 표현해 주는 속담이 있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
베를린 샤리테대학의 미하엘 린덴 교수는 ‘외상후울분장애(PTED)’라는 개념을 제창했다고 한다. 그는 “외부로부터 공격을 받아 분노가 생기고 복수심이 들지만, 반격할 여지가 없어 무기력해지고, 뭔가 달라질 거라는 희망도 없는 상태에서 굴욕감이 결합되며 생긱는 감정”리라고 정의했다.
여기에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인간의 본성이다. 인간은 이기적인 동물이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사람에 대한 배신을 밥을 물에 말아먹는 것만큼이나 쉽게 여긴다. 그러한 동물이 인간이다. 정신과 전문의 유은정 원장은 《혼자 잘해주고 상처받지 마라》는 책의 저자다. 이 책은 그 내용을 차지하고 이 제목 자체만으로도 많은 사람들을 위로해 주는 힘이 있다.
사람을 만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의로움(義)이 아니다. 사랑(愛)도 아니다. 그것은 바로 믿음(信)이다. 영어로는 Trust(신뢰)다. 그런데 이게 참 쉽지 않다. 인간은 누구나 페르소나(가면)을 쓰고 있기 때문에 제대로 그 심성(心性)을 알아보는 것은 풀리지 않는 불가사의한 신화와 다르지 않다. 인간은 이 문제를 평생 품에 안고 살아가야 한다. 그 과정에서 나타나는 부작용인 불신(不信)은 감수해야만 하는 치료제이기도 하다.
저자는 ‘아픔과 고통은 극복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야 하는 것 아닐까.’라고 생각한다고 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고통을 온전히 이해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아픔을 다독여주며 곁에서 있을 수 있습니다. 곁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고통은 위로받고, 아픔은 나눌 수 있습니다.”
가족 트라우마 유전 분야 연구자, 마크 월린(Mark Wolynn)은 저서 《트라우마는 어떻게 유전 되는가》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기억과 감정은 사라지지 않는다. 새로운 숙주를 찾아 옮겨 다닐 뿐.”
우리는 이 말에 주목해야 한다. ‘숙주’라고 표현 되었지만 보웬에 따르면 DNA를 통해 유전 된다고 했다. 그 이유는 태아는 엄마의 뱃속에서 이미 그러한 감정들을 느낄 수밖에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트라우마는 그 문제의 원인을 찾아 스스로 극복하지 않으면 결코 치유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이 책을 읽고 있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나 자신을 치유하기 위해 ‘트라우마’에 대한 책을 찾아보고, ‘고통’이나 ‘불안’ 그리고 ‘우울’과 같은 단어가 들어 있는 책을 읽고 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는 모르지만 현재는 그 과정을 격고 있다.
저자는 ‘세월호 사고’, ‘이태원 사고’, ‘미국의 9.11 테러’ 등의 사례를 들며 트라우마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특히 코로나에 대한 정신적 피해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의하면, 우울증으로 한 해 동안 정신건강의학과 진료를 받은 사람이 2017년 69만1,264명에서 2021년 93만3,481명으로 35퍼센트 이상 늘었다고 한다. 2019년 81만1,891명과 비교하면 코로나로 인하여 2년 사이 15퍼센트 정도 폭증했다고 한다.
‘사회적 거리두기’라는 용어의 문제점. 이 말은 ‘물리적 거리두기’가 되어야 한다는 채정호 교수님의 주장에 적극적으로 공감한다. 인간은 서로 기대어 살도록 설계 되어 있다는 것은 한자의 사람 인(人)에 비교하여 오래전부터 설명되어 왔다. 이는 인간은 사회적 동물임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사회적 동물에게 사회적 거리두기는 결코 용납될 수 없고, 용납 되어서도 안 되는 것이 맞다. 사람이기를 포기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렇다면 모든 것이 코로나 탓인가? ‘사회적 거리두기’가 정말 문제의 불씨가 된 것인가? 사회시스템이 완벽하게 갖추어진다면 정신건강 문제가 해결 될까? 개인에게는 정말 문제가 없는 것일까? 이것은 내가 생각하는 물음표들이다.
코로나가 전 세계를 혼돈으로 몰아간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코로나의 사회적 거리두기 때문에 정신적 고통을 호소하며 우울증 환자가 증가한 것 또한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그로인해 심리방역의 명칭은 ‘코로나 블루’에서 ‘코로나 레드’로 그리고 ‘코로나 블랙’으로 점점 심화해 나아간 것 또한 인정할 수 있다.
그런데 말이다. 이 모든 것들을 사회적 문제로만 몰고 가는 것은 무리가 있지 않는가 하는 게 내 생각이다.
4차산업혁명 시대에 들어서면서 전 세계는 가까운 이웃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사회적 이슈가 지차지게 노출 되고 있다. 각종 인터넷 뉴스와 SNS를 통해 일반인들에게 가감 없이 노출 되고 있는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일이다. ‘달갑지 않은 정보, 굳이 알고 싶지 않은 이야기’를 뜻하는 TMI(Too Much Information, 너무 과한 정보)라는 신조어가 그것을 잘 반영해 주고 있다.
이럴 때 일수록 우리는 떠도는 풍문으로부터 스스로가 자신을 지키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 모든 정보를 흡수하지 말고 정제하여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4차산업혁명 시대가 되면서 우리 인간들은 점점 더 나약한 동물이 되어가고 있다. 사회에 대한 의존도는 높아지는 반면 스스로 자신을 지키는 자립도를 낮아지고 있다는 말이다. 때문에 자신의 상처를 스스로 치유하는 자생력이 떨어지고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채정호 교수는 사회적 시스템이 더 잘 체계를 갖추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사회적 문제를 정치적 당파싸움으로 이용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다. 이 말은 맞는 말이다. 하지만 내 생각은 공자(孔子)의 사상을 따른다. 공자는 《논어》 〈안연〉편에서 말했다.
“송사를 듣고 판결하는 것은 나도 남들과 다를 게 없겠지만, 반드시 해야 할 것은 송사가 없게 하는 것이다. 聽訟(청송) 吾猶人也(오유인야). 必也使無訟乎(필야사무송호)”
이 말을 코로나 사태로 인한 정신적 충격으로 우울증이 증가 했다는 의학계의 말에 덧붙이고 싶은 말로 표현하면 이렇다.
“코로나로 인해 우울증 환자가 늘어나 그들을 치유하는 것은 정부에서 해야 하는 일이 맞다. 하지만 반드시 해야 할 것은 우울증 환자가 없게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울증 환자가 더 이상 늘어나지 않도록 하는 방법으로 무엇이 있을까? 그것은 ‘수신(修身)’에 있다. 스스로를 단련시켜 자존감을 높이고, 사회적 문제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판단력을 기르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수신(修身)의 방법으로는 무엇이 있는가? 그것은 인문학적 소양을 기르는 데 있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인문학적 소양을 이루기 위해서는 옛 선현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생각하는 힘을 길러야 한다. 어린 시절부터 이러한 과정을 거쳐야 성인이 되었을 때 TMI에 휘둘리지 않고, 올바른 판단을 하며, 사회적 문제에 휘둘리지 않는 단단한 인간이 될 수 있다.
채정호 교수의 《고통의 곁에 우리가 있다면》은 정치인들이 반드시 읽어 보았으면 좋겠다. 국민의 상처과 고통을 정치적으로 이용하여 자신의 이익으로 삼고자 하는 일을 중단하였으면 하는 바람이다. 더물어 정치인이라면 마땅히 국민의 상처와 고통을 보담아 주어야 할 의무와 책임이 있음을 잊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