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아름다움은 고통을 통해 우리 몸속에 들어온다."
(시몬 베유)
노동, 시간, 노화, 몸, 여성, 장애, 세대, 인권, 퀴어, 혐오, (여성)노동, 동물, 지방, 권력, 지구, 공존 등 다각적인 방면에서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사용하는 왜곡된 언어와 권력자들이 목적을 위해 의도적으로 사용하는 둔갑된 권력 언어들에 대해 면밀하게 해체하며 이 언어들이 어떻게 사회에 작용하는지 신랄하게 비판한다.
지극히 사적인 육체의 고통에 대해 '창작을 출산에 빗대 은유하는 것이 정당한가'를 시작으로 우리의 고통이 정치 및 사회와 무관하지 않음과 여성에게 무언으로 강요하는 출산에 대한 사회적 분위기와 성착취 및 성폭력에 대해 짚는다. 이 지점에서 정치는 차별과 혐오, 여성의 '몸'을 악용하며 성소수자를 포함한 성의 대립을 의도적으로 조성한다. 이는 선거철만 되면 여실히 드러난다. 인권 이전에 성으로 분리시켜 그 프레임 안에서 평등하다는 속임수를 교묘하게 이용한다.
특히 20대 남성이 주목해야할 점은 여성이 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걸핏하면 혐오와 젠더 갈등을 들먹이며 (성소수자를 포함한) 성차별을 은폐하면서 동시에 정치적 제물로 던져진 '여성'을 적대시하고 대립과 갈등을 반복하도록 이를 조장하는 자들에 맞춰 춤을 출 것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그들에게 시급한 사회적 문제, 즉 높은 학비, 거주 불안, 저임금 일자리 등을 '함께' 연대해 해결 방안을 촉구해야 한다. (이렇게 써놓고 한참을 들여다봤는데, 나 스스로 고개를 갸우뚱 하는 중이다. 연대 이전에 전제해야 할 것이 있다는 생각이 불현듯 스친다.)
(중략)
ㅡ
현재 우리 사회에서 소수 엘리트 특권 의식은 당연한 듯 받아들여지고 있다. 학령기에 접어든 순간부터 대학 입시는 시작되고, 더 나은 학벌을 얻기 위해 반수와 재수는 필수라는 우스갯말까지 생겨났다. 노동환경의 많은 문제점은 사회적 의제가 되기보다는 개인의 능력 여부에 촛점이 맞춰져 노동은 왜곡되었다.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의 위계 인식은 점점 더 강화되어 사회학적 상식에 반하는 방향으로 흐르고 있으며, (육체)노동은 공부(엄밀히 말하면 성적)를 못한 데에 대한 죗값처럼 여겨지는 게 현실이다.
우리가 수시로 접하는, 노동 현장에서 발생하는 참혹한 사건 사고들이 여전한 까닭은 공부의 위계에 대한 의구심을 갖지 않기 때문일 터다. 저자의 말처럼 이 의구심을 확대하고 고민하지 않는다면 사회 구성원 대부분이 안고 있는 고통의 언어를 듣지 못할 것이다. 이 고통의 언어에 '나' 역시 예외는 아니다.
노동은 어떤 형태로든 생존을 위한 행위다. 노동 해방에 관해 말하기보다 노동의 가치와 노동자의 권리에 대해 인식하는 것이 먼저이고, 정당한 노동의 대가를 지불하며 최선을 다해 안전한 노동으로 만들 것인가를 논의해야 한다는 작가의 지적에 적극 동의한다.
ㅡ
계층 간의 시간 권력 차이는 더욱 심회되었다. 특히 시간에 쫓기고 종속당하는 플랫폼 노동 환경에서의 인간은 고립된 채 데이터만 연결되어 있다. 즉 기업 입장에서 플랫폼 노동은 노동자들의 소통과 연대를 막을 수 있는 최적의 형태다. 신호위반과 과속을 일삼는 라이더를 비난하기에 앞서 우리가 함께 고민해야 할 것은 플랫폼 노동자들이 배달 속도와 음식이 아니라 편파적이고 기만적인 구조다. 배달 성공률과 고객 만족도를 저장하는 데이터에 그들의 상처와 고통은 기록되지 않는다. 시간이 갖는 불평등은 비단 이뿐만이 아니다. 각종 앱에서 제공하는 소요 시간의 기준에 장애인, 소아(를 동반한 성인), 노인은 해당하지 않는다. 이러한 구조적 문제를 인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간과했던 나 자신에게 놀라는 중이다.
또한 가부장제 사회에서 시간의 주체는 남성이다. 나이가 들고 연륜을 쌓은 '어른'의 위치는 대부분 남성이 차지하고 여성의 시간은 무시 당하기 일쑤다. 그렇지 않아도 여성의 취약한 경제력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 심각해질 수밖에 없고, 그들에게 '은퇴'란 단어는 해당되지 않는다. 평균 수명은 여성이 더 길지만, 그 긴 노년의 삶을 여성이 더 가난하게 살아간다는 저자의 글이 서글퍼진다.
ㅡ
타인의 고통에 공감이 없는 공정은 억울함이 사회적 의제로 나아가지 못하고, 오직 '나', 개인의 억울함에 대한 집착으로 향하게 한다. 억울함을 투쟁으로 전화시키는 사람들은 '나'가 아닌 '우리'의 억울함을 위해 싸운다. 이에 관련한 몇 개의 장章을 읽으면서 점점 가슴이 답답해져 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부모의 학력과 자본이 그대로 세습되어 한쪽에서는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온갖 특혜를 누리고 다른 한쪽에서는 기본적인 안전과 인권도 보장받지 못한 채 실습 현장으로 나간다. 한여름 폭염에 에어컨 없는 휴게실에서 숨진 대학교 청소노동자, 정규직과 비정규직 죽음에 책정되는 목숨값, 21세기 OECD 가입국인 한국에서 소외와 빈곤으로 아사한 모자 등 불법이 아닌 합법적인 불평등이 개인의 도태라고 치부하는 우리 사회는 도대체 어떤 방향으로 가고 있는가.
오늘날 청년 세대에서 불공평에 대한 분노가 불공정에 대한 분노보다 상대적으로 작다. 저자가 <한국의 능력주의>에서 발췌한, 한국인들은 특권의 불평등에 분노하는 게 아니라 '특권에 접근할 기회의 불평등에 본노'한다는, 그래서 '공정 세대'라는 개념은 특정 계층의 억울함을 특정 세대의 분노로 둔갑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크다는 지적에 동의한다.
백인, 남성, 대졸자, 이성애자가 주류인 사회적 구조에서 '세대', '인권', '보편적 권리' 는 동등하고 공정한 언어로 사용되고 있을까. 공정이라는 담론 자체가 제대로 이루어진 적이 있었는지 돌이켜볼 일이다.
ㅡ
이 책은 권력자의 입장에 맞춰 둔갑하고 왜곡되어지는 정치 언어가 남발하는 작금에, 이에 대한 정확한 인지가 부재할 경우 대중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 그로인해 발생하는 오류와 그릇된 판단을 면밀하게 짚어간다. '선택의 자유'를 명분으로 노동착취를 기득권층의 손에 쥐어주겠다는 정치인의 호언장담, 상호소통의 의지가 없는 지도자, 과도한 자기 신념의 환상에 빠진 권력자 등 그들의 발언은 곧장 정치가 되고, 이 언어가 힘을 얻으면 민주주의는 위협받는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그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단어가 '자유'라는 사실에 헛웃음이 난다. 권력자의 언어는 설명이나 설득이 아닌 지배의 언어다. 재난과 타인의 고통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권력자들의 망언은 세대를 잇는 증언으로 잠재워야 한다.
저자는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많은 언어들은 '보이는 것'이 곧 '아는 것'이라는 사실을 전제로 만들어졌다고 얘기한다. 나 역시 무심코 쓴 언어들이 의도치 않게 타자를 비하하는 셈이 된 경우가 있었다. 우리 스스로 인식의 한계를 인정하고 꾸준히 개선해 나가야함을 잊지말아야 할 것이다.
저자의 말처럼 한국은 우주로 로켓을 쏘아올리는 지구상의 몇 안 되는 국가임에도 장애인은 아직도 이동권조차 제대로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 물리학자이며 환경운동가인 반다나 시바는 인간이 두 개의 법에 복종해야 한다고 했는데, 그것은 인권에 관한 법과 지구의 법이다. 우리가 이 두 가지만 온전히 추구하기 위해 노력한다면, 그래서 더 이상 이러한 책들을 읽지 않아도 되는 날이 오기를 바람한다.
287.
타자의 고통에 대한 무관심을 표출할 수 있다는 게 권력이다. 타자의 고통에 대한 감각이 없고, 자신을 불편하게 만드는 앎을 적극적으로 모르려고 하고, 모르지만 판단할 수 있다는 확신이 모이면 바로 죄의식 없이 폭력을 저지르게 된다.
♤ 출판사 지원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