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쿼런틴]은 [내가 행복한 이유] 다음으로 읽은 그렉 이건의 두 번째 작품이다.
하드 SF 소설답게 다소 난해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면이 없지 않아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룰을 잘 모르고 보는 스포츠 경기같다고나 할까? 하지만 룰을 100% 이해하지 못했다해서 경기를 즐길 수 없는 건 절대 아니다. [쿼런틴]은 추리소설과 스릴러 요소까지 결합 되어 사건의 경위를 찾아가는 그 여정이 치밀하고 흥미롭다.
이 소설은 다양한 과학적 이론들이 나오는데 ‘양자역학’ 이나 ‘슈뢰딩거의 고양이’ 처럼 얼핏 이해하기 힘든 부분도 있지만, 반대로 가장 흥미로웠던 건 인간의 뇌를 나노머신으로 컨트롤 할 수 있는 모드라는 기술이다. 이건 마치 (내 기준으로 본다면) 핸드폰 화면에 깔린 어플과도 비슷한 것으로..... 어쩌면 필요에 따라 구매하거나 다운로드 받아서 사용하는 여러 어플들이 머지 않아 인간의 머릿속에 직접 넣을 수 있는 세상이 오지 않을까? 읽는 내내 그런 생각이 들었다.
SF 마니아들에게는 축복과도 같은 그렉 이건의 작품이 다시 돌아왔다. 더불어 [쿼런틴]은 이야기를 즐기는 독자와, 이야기를 창조하는 작가들에게는 무한한 재미와 영감을 줄 작품임이 틀림없다.
-P313 ‘인간의 뇌가 고전역학적 세계를 바탕으로 양자론적 세계를 만들어 냈다고 믿는 것은, 그 반대 경우를 믿는 것보다 더 어려울까? 필연적으로 인간 중심적일 수밖에 없는 실험을 되풀이함으로써, 객관적이고 비인간적인 진실을 발견할 가망이 있기는 한 걸까
-P403 ‘<버블>은 결코 인류를 가뒀던 적이 없다. 단지 인류가 갇혀있다는 사실을 눈에 보이도록 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갇혔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것이 아니라. 그 너머에 무한대의 자유라는 선택지가 존재한다는 사실에 강제로 직면해야 했기 때문에 충격을 받은 것이다.
-P419 “나의 정서적 약점에 파고들어 협박하려고 했나?” 나는 피곤한 웃음소리를 냈다.
“자넨 정말 불쌍한 인간이로군. 맞아, 내 아내는 죽었어. 하지만 재밌는 뉴스를 하나 들려주지. 난 그런 일 따위엔 전혀 개의치 않아.”
2034년, 갑자기 밤하늘의 별들이 사라진다. 지구가 정체 불명의 검은 구체 안에 갇히게 된 것이다. 태양계가 우주로부터 완전히 격리된 것인데, 사람들은 이 장막을 버블이라고 부르며, 도대체 왜 이런 일들이 벌어졌는지 갑론을박하게 된다.
그리고 30여년의 시간이 흘러 그때 태어났거나 그 이후에 태어난 아이들이 성인이 되어 '나락의 아이들'이라는 테러 단체를 만든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닉은 경찰로 이 조직의 테러를 진압하는 공을 세우지만, 조직의 복수로 사랑하는 아내를 잃고 경찰을 그만두게 되는데, 어느 날 탐정이 된 그에게 의뢰가 들어온다.
이 소설을 러프하게 요약하자면 이런 이야기이고, 단 한 문장으로 정리하자면 닉이 의뢰를 받아 병원에서 실종된 여성을 찾게 되면서 일어나는, 그 과정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겪게 되는 일들을 통해 알게 되는 사실에 대한 이야기다.
결론을 포함해서 과감하게 스포를 하자면 알고보니 인류가 우주를 파멸로 이끌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인데, 사실 이렇게 얘기를 해줘도 소설의 내용엔 크게 영향을 미치지 못 하는게 양자역학에 대한 이론으로 무장되어 있지 않다면 왜 그러한지 원인을 도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깐 밤하늘의 별들이 사라지고 인류가 태양계 바깥 우주로부터 강제 격리된 지 30년 후 닉이 겪게 되는 모든 일들(이 소설의 주된 내용)이 바로 그 일과 관련된 것이라 할 수 있고, 그 가운데서 양자역학 이론이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이 책의 제목인 'quarantine'은 검역, 격리라는 뜻을 가진 영어 단어이다. 유럽에서 전염병 확산을 막기 위해 해안 도시들에서 배를 격리시켰던 기간인 40일에서 파생한 단어로, 이탈리아어 quaranta giorni 에서 유래한 단어이다. '격리'는 코로나 팬데믹 기간 동안 익숙하게 들었던 단어 중에 하나인데, 이 소설에서 매우 중요한 핵심 개념이다. 인류는 왜 태양계 바깥 우주로부터 강제 격리를 당하게 된 것일까? 우리가 어떠한 상태에서 누구를 격리하는지 생각해본다면, 그 이유를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무언가를 보호하기 위해서 누군가를 격려한다고 할 때 감염의 주체와 보호이 대상이 명확해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떤 이유로 인류는 우주의 위험이 된 것인지, '왜'라는 부분이 설명되어야 하는데, 그 부분에 대한 실로 지난한 섦명이 양자역학에 의거해 전개된다. 이 소설이 강한 호불호를 가지고 있다면, 이 과정에서 흥미를 가지느냐의 여부가 결정적으로 작용할 것이다. 이 부분을 설명하는 과정을 재미있게 따라갈 수 있다면 이 소설은 매우 지적인, 촘촘한 전개가 돋보이는 섬세하고 완벽한 소설로 읽힐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매우 지루하고 따분한 소설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SF애호가나 자연과학, 특히 물리학 전공자라면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책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개인적으로는 북반구에 사는 작가가 북반구를 배경으로 한 여느 책들과는 달리 남반구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멋진 소설이었고(당신이 알고 있는 작가 중 남반구에 사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는가? 호주로 국한해서 생각해보더라도 지금 이 순간 내가 유일하게 떠올릴 수 있는 작가는 단 한 명 숀 탠뿐이다. 대부분의 활동이 그러하듯 우리의 책 읽기 역시 북반구에 치중되어 있다), 홍콩의 중국 반환 이후 중국 이민자들이 많아진 호주를 반영(참고로 이 소설은 홍콩 반환 이전에 쓰였으니 이 부분 역시 미래에 대한 예측이라고 할 수 있다)하였다는 점도 백인인 작가의 편협하지 않은 시야를 보여주는 것 같았다.
위의 이미지는 구글에서 그렉 이건을 검색한 결과 나타나는 그의 책들이다.
나열된 책들의 표지만으로도 그의 소설의 소재나 주제, 방향성을 파악할 수 있다. 한눈에도 그가 하드 SF를 쓰는 작가라는 걸 알 수 있는데, 이런 점에 푹 매료될 수 있는 독자라면, 그의 소설이 매우 잘 차려진 성찬으로 여겨질 것이다.
잘 차린 밥상을 부디 맛있게 먹고 흡족한 포만감을 느끼기를!
구판을 읽고 내 독해력에 절망했지만 혹여 번역 탓일수도 있으니 개정판이 나온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지름.
역시 문제는 번역이 아닌 내 독해력이었음ㅋㅋ
SF가 '공상과학 소설'이란 괴상한 단어로 번역되어 통용되는 나라답게, 그럴듯한 과학적 개념 하나, 이미 몇 백만 번 이상 사용되어 우려낼 국물도 없는 클리세 몇 개 뒤섞어 찍어내면 팔리고 빨리는 상황에서 진짜 SF가 뭔지 제대로 보여주는 책.
양자역학을 제대로 이해한 작가가, 여러모로 신묘한 그 개념을 작품의 중심에 두고 제대로 활용하고 있음.
베드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 천천히 오래 읽을 수 밖에 없고, 그 과정이 고역스럽지 않은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