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학원에서 알바를 한지 어느덧 2년이 지났다. 학생들의 단어 시험을 봐주는 것이 주요 업무 중 하나인데 고등학생들이 보는 영어 단어장 중에는 어원을 기준으로 단어를 나누어 단어의 뜻을 쉽게 파악하고 암기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있다. 오늘날 영어는 명실상부한 세계공용어lingua franca이고, 한국에서 영어는 곧 권력이 되었다. 하지만 문제는 한국어와 영어는 도무지 공통점을 찾을 수 없는, 너무나도 멀리 떨어진 언어이기에 학습의 과정이 지난해지기 쉽다는 점이다. 언젠가 인터넷에서 본 자료 중에는 미국 외교부에서 선정한 언어 중 가장 배우기 힘든 언어로 한국어와 일본어가 꼽혔다고 한다. 미국인 기준으로, 영어와 가장 거리가 먼 언어가 한국어와 일본어이고, 그래서 미국인들에겐 두 언어가 그만큼 학습 난도가 높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언어 학습에는 절대적인 난이도보다는 모국어와의 유사성이 훨씬 더 크게 작용한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기에 한국인이 한국어와는 글자도, 문법 체계도 모국어와는 너무도 상이한 영어를 배우기 어려워하는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공부에도 왕도가 있는 법 아닌가. 외국인이 한국어를 배울 때 한자를 알고 있으면 모르는 단어의 뜻을 수월하게 유추할 수 있다. 한국어 어휘의 상당수는 한자어이고, 한자를 알면 동음이의어도 맥락별 용법을 쉬이 알기 때문이다. 영어도 마찬가지다. 영어의 문법과 발음에 온갖 예외가 많은 것은 그만큼 영어에 많은 언어들이 뒤섞여 일관성을 잃은 탓인데, 복잡한 영어의 역사에도 중심이 되는 변곡점은 존재한다. 『100단어로 읽는 중세이야기』에 따르면 영어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은 프랑스어이고, 프랑스어의 영어로의 유입은 중세에 두드러졌다.
역사학에서 시대 구분의 기준은 학자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중세의 시작은 476년의 서로마 제국의 멸망, 중세의 끝은 1453년의 동로마 제국의 멸망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서구 문명의 근간이었던 로마 제국의 명맥이 불완전하게나마 지속됐던 시기가 바로 중세인 것이다. 하지만 1453년에는 동로마 제국의 멸망 이외에도 역사적 사건이 하나 더 있었는데, 당시 서유럽의 최강국이었던 잉글랜드와 프랑스 사이에서 1337년부터 이어졌던 백년전쟁이 종식되었던 것도 같은 해에 일어난 대사건이었다. 워낙 중요한 사건이라 책에서도 반복해서 강조한 내용인데 1066년 프랑스 국왕의 신하였던 노르망디 공작 윌리엄이 잉글랜드를 정복하여 윌리엄 1세로 즉위하였다. 즉 잉글랜드 왕은 공교롭게도 프랑스 왕의 신하가 된 것이다. 그러나 잉글랜드 왕 헨리 2세가 프랑스 재정에서 막대한 비중을 차지했던 아키텐 지방의 상속녀 엘레오노르와 결혼을 하면서 이 지역의 통치권을 가져가 프랑스로서는 더이상 좌시할 수 없었다. 명목상 신하였던 잉글랜드 왕이 프랑스에서 프랑스 왕보다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아이러니로 인해 116년동안 전쟁이 이어졌다.
두 로마 제국의 멸망 사이엔 십자군전쟁과 백년전쟁같은 굵직한 전쟁도 있었지만 중세하면 역시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종교, 즉 기독교다. 중세의 기독교는 단순한 종교를 넘어 생활 전반과 사람들의 의식에 큰 영향을 미친 개념이었다. 기독교의 근간이 되는 성경Bible은 고대 이집트 신화의 오시리스와 이시스로부터 출발하여 페니키아의 비블로스Biblos 왕국, 고대 그리스에서 파피루스를 통칭하던 단어 biblos의 뜻이 확대되어 결국 책 중의 책인 '성경'이 되었다. 책은 100개의 단어를 세분화하여 '중세의 일상', '의식주', '사람들', '이름', '경제', '직업', '사랑과 명예', '종교', '오락', '왕과 전쟁'이란 주제별로 묶었다. 원래 전쟁사에 관심이 많던 내게 왕과 전쟁, 사랑과 명예에서 나온 기사도와 관련된 설명이 가장 잘 읽혔다. 또한 윌리엄William, 에드워드Edward, 헨리/앙리Henry, 샤를/찰스Charles, 루이Louis, Otto로 대표되는 중세 왕들의 이름으로 통사를 설명한 것이 역사를 공부하는 내게 큰 도움이 되었다. 비슷한 이름들이 반복되는 유럽사에서 헷갈리는 대목인데 이 부분의 요점을 정리해줬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q-나 ch-로 시작하는 영단어들은 프랑스어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이고 이 흔적이 일상어 곳곳에 남아있다는 대목이 흥미로웠다. 내가 따로 프랑스어를 배운 적이 없지만 프랑스어를 조금이라도 배운 적이 있다면 아마 이 부분의 설명이 가장 재밌게 다가왔을 것이다. 윌리엄 공의 잉글랜드 정복 이후 영국의 상류층은 프랑스어를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오늘날 영어의 고급 어휘들은 프랑스어에 기반을 두고 있고, 이 뜻이 확대되어 평민들이 사용하던 일상어를 조금씩 대체했다. 원래 켈트족이 살고 있던 잉글랜드를 로마, 앵글로색슨, 바이킹, 노르만족이 차지하면서 게르만어군의 한 갈래였던 영어는 이웃 언어들의 영향을 크게 받으며 오늘날 우리가 익히 아는대로 불규칙한 언어의 대표 주자가 되었다. 지금껏 유럽 언어 중 독일어, 스페인어, 러시아어를 배웠지만 영어만큼 체계성과 규칙성에서 거리가 먼 언어를 마주한 적은 없다. 비록 이 대목이 영어 학습의 가장 큰 난관이지만 영어 속에 숨어있는 역사를 배우는 것은 지루한 문법과 일관적이지 못한 발음을 학습하는 것보다는 훨씬 재미있는 일이다. 지금도 영어 속에 살아 숨쉬는 프랑스어의 영향을 알게됐으니 내가 다음에 배워볼 외국어는 역시 프랑스어가 최우선이 될 것 같다.
*. 책과함께 출판사의 서평단 활동으로 이 책을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