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는 엄마와 딸의 눈칫밥을 먹고 자란다 <딸은 엄마의 감정을 먹고 자란다>를 읽고
[책을 열며]
"네가 아니면 내가 누구한테 이야기하니?"
어느 연속극 속 대사는 오늘날 현실가족 사이에서 그대로 재현된다. 지난 30년간 한지붕 아래 아들이자 오빠로서 '엄마와 딸'을 지켜 보았다. 지금은 남편이자 아빠라는 이름으로 또 다른 '엄마와 딸'을 만나 함께 한지도 5년이 지났다. 결코 짧지 않은 기간을 여성들과 함께 보냈음에도 여전히 내게는 미지의 세계에 사는 사람들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여자도 여자를 모른다'는 어느 작가의 말이 사실이라면, 다른 두 별에서 온 남녀가 서로를 온전히 이해하기란 어쩌면 불가능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난 알고 싶다. 아니, 알아야만 한다. 엄마와 딸이라는 두 여성의 관계에 대해 배우고 또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슬기로운 가족생활의 지름길이라 믿기 때문이다. 이 여정에서 이정표가 되어줄 책 한 권을 집어든다. 바로 <딸은 엄마의 감정을 먹고 자란다>라는 책이다. 우선 책표지를 통해 엄마와 딸이 서로에 대한 미안함과 억울함, 그리고 고마움이라는 양가적 마음들을 동시에 갖고 있는 관계라는 걸 알게 된다. 심리 분석 전문가인 저자는 다년간의 심리 상담과 꿈 분석을 바탕으로 이러한 엄마와 딸의 숙명적 애증에 관한 거의 모든 것에 대해 이야기한다. 엄마의 '무의식' 속 욕구와 욕망은 엄마의 '감정', '시선', '결핍', '모성', '남편'이라는 여러 회로를 통해 딸에게 전달되는데, 각 회로에서의 고장을 파악하고 이를 바로 잡아나가는 과정이 곧 엄마와 딸 각자가 '회복'에 이르는 길이라는 것이다.
[책속으로-엄마의 감정에 대하여]
"아이가 가장 불안할 때는 엄마가 바로 등 뒤에 있을 때이다" - 자크 라캉
먼저 엄마의 '감정' 회로를 들여다보자. 남편이나 아들과 달리 딸을 자신의 분신처럼 여기는 엄마이기에 딸에게 아낌없이 사랑을 주는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저자는 딸을 위해 상담을 의뢰한 엄마가 바로 가장 큰 방해 요인으로 작용했다는 점을 지적한다. 다시 말해 딸을 위한 변화가 아니라 엄마의 불편한 감정을 해결해 달라는 요청이라는 것이다. 또한 딸이 심리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경우, 엄마는 그것이 해결되기 바란다고 하지만 그 범위는 엄마 자신이 불편하지 않은 선까지라는 저자의 설명을 보면서 그동안 내가 알고 있던, 아니 어림짐작만 해왔던 엄마와 딸 사이에 관한 많은 것들이 오해였음을 여지없이 깨닫게 된다.
[책속으로-엄마의 시선에 대하여]
"가장 먼저 사랑을 빚어내는 것은 시선이다." - 자코모 다 렌티니
엄마의 '시선'이 향하거나 머무는 곳을 살펴보자. "타인은 지옥이다"라는 니체의 말을 저자는 "자신은 지옥이다"라고 변주한다. 니체가 말한 타인도 결국 내가 투사한 타인이기에 타인을 내가 생각하는 시선과 생각의 틀로 이해하고, 더 나아가 타인과 나의 경계가 없이 동일화를 겪으면서 심리적 혼란과 지옥을 경험하게 된다는 의미다. 따라서 자기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집중하는 시간이 절실하게 필요하게 된다. 외부에서 원인을 찾거나 그것의 탓으로 돌리지 말고 자신만의 시선을 담은 인생의 항로를 찾아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아이도 엄마가 내놓는 정답이 아니라 엄마가 삶을 대하는 태도를 본받아 자기만의 삶을 살아낼 수 있다는 저자의 말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책속으로-엄마의 결핍에 대하여]
"어떤 신체 증상은 암호화된 질문이며, 어떤 것을 표현하려는 노력이다" - 대리언 리더
엄마의 '결핍' 회로에 대해 알아보자. 있어야 할 것이 없어지거나 모자라면 응당 채우려고 하는 게 사람의 심리다. 그런데 놀랍게도 결핍을 해소하지 않고 그것을 계속 유지하려고 하는 마음도 있을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저자는 '나는 이런 사람인데 어쩌라고?'와 같이 그냥 결핍감을 내버려두지 말고, '나는 네가 상상하는 엄마는 아니지만 네 엄마로서 충분히 너를 사랑하고 있고, 너도 엄마의 딸이라는 이유만으로 충분히 사랑받아 마땅하다'라는 것을 아이와 엄마가 서로를 통해 경험하여 그것을 해소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대외적으로 아무리 좋은 이미지를 가진 엄마라도 내 엄마로서 아이에게 개인적인 기억으로 체화되어 있지 않다면, 아이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부여될 수 없다고 한다.
[책속으로-엄마의 모성에 대하여]
"엄마가 가진 모성에는 사랑만 있는 것이 아니고 독성도 있다" - 마이클 아이건
엄마의 '모성'은 여태껏 엄마의 고유한 본능이라고만 여겨 왔는데, 모성이 의식적이고 선택적일 수 있다는 저자의 견해가 신선하게 다가왔다. 과거 엄마의 심리적 부재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 딸의 마음을 다독여주기 위해서는 이미 일어난 일을 만회하기 위해 지금 아무리 많은 것을 부어 넣는다고 해서 상처가 옅어지거나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엄마 스스로 인정해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이미 일어난 일을 충분히 인정하고 수용하고 충분히 겪어내고, 더 나아가 그에 따른 책임과 대가를 기꺼이 짐으로써 아이와의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 나가야한다는 것이다. 또한 저자의 어린 딸아이와 성인이 된 여러 여성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한 가지가 바로, 어떤 고통과 시련의 순간에 자신이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싶어 한다는 점이다. 현실적인 대안이 아니라 내가 가장 어려운 순간에 그저 나를 알아주는 '엄마'를 만나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부모와 자녀 사이에 안전한 관계가 확보되지 않아 벌어지는 갈등과 고통도 많다고 한다. 이를테면, 보호받음을 곧 사랑받음이라고 느끼는 아이들이 거꾸로 부모를 보호해야 하는 상황이 되면 아이들에게 애정 욕구 못지 않은 안전에 대한 욕구가 강해지는 현상이 그러하다.
[책속으로-엄마의 남편에 대하여]
"어머니가 아버지를 잃은 슬픔을 상징적으로 드러내지 않는다면, 자녀는 어머니 대신 아버지를 애도해야 하는 부담을 짊어진다" -대리언 리더
엄마의 '남편'은 그동안 미처 몰랐던, 혹은 모른 척해왔던 나에 대한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 책을 읽기 전부터 가장 관심이 갔던 부분이라 읽는 내내 나는 과연 어떠한 남편으로 비춰지고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 일기도 했다. 평소 아빠의 입장에서 엄마와 딸의 애착관계를 지켜보고 있노라면 엄마의 자리를 대신하기란 요원한 일이라고 여겨진다. 그런데 아빠와 아이의 관계를 불안해하는 엄마도 있다는 얘기가 뜻밖이었다. 여기서 저자는 아빠가 엄마와 딸의 2자 관계에 발을 들여놓는 건 아빠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하며, '엄마의 초대와 물러남'이 있어야 가능하다고 말한다. 반면, 책에 따르면 아빠가 엄마와 아이의 2자 관계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기보다 오히려 스스로 배제되거나 은근히 즐기며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경우도 많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아이와 엄마, 그리고 아빠의 3자 관계가 아니라 엄마 아래로 들어가 아이와 등등한 위치에 서려는 아빠도 있다고 한다. 이 모든 것이 아이에게 혼란을 야기하고 불안하게 할 수도 있다고 하는데, 이따금 "내가 애 둘을 키운다!"라고 푸념하는 아내와 늘 딸에게 친구같은 아빠가 되고 싶다고 구애하는 나의 모습를 돌아보게 된다. 또한 부모 자신의 삶을 충실히 살면서 아이에게 끝없이 마음과 곁을 내주면서도 '네 삶에 대해서만큼은 나는 아무것도 알 수 없고 할 수 있는 것이 없어'라는 일종의 무능의 자세도 필요하다는 걸 배우게 된다. 더불어 양육에서 있어 '누가 아이를 더 많이 돌보느냐'는 물리적 분배보다는 하루종일 아이를 돌보느라 지친 아내를 정서적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남편의 태도와 마찬가지로 퇴근 후 조금이라도 함께 아이를 돌보려고 노력하는 남편을 알아주는 아내의 태도가 중요하다고 저자는 조언한다.
[책을 덮으며]
책 곳곳에서 엄마와 딸의 관계는 물론, 각자의 자기 '회복'을 위해서는 '상실'과 '애도'라는 의식이 충분히 진행되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발견할 수 있다. 마치 비움으로써 채운다는 말처럼, 잃어감으로써 온전한 나를 찾을 수 있다는 역설적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우리는 살면서 저마다의 무의식적 욕구와 욕망에 대한 원인 혹은 해결책을 외부에서 찾으려고 한다. 그러나 상실을 허용하고 충분히 애도하지 않은 감정들은 그 모양을 달리하며 끝없이 돌아오기 때문에 자신의 마음 안에서 진정한 상실과 애도를 경험해야 한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이를 엄마와 딸에게 적용해보자면 어미 닭이 그동안 알을 품으며 느꼈던 만족감을 포기하는 일이 상실에 해당하며, 병아리가 스스로 알을 깨고 나오는 것을 지켜보고 견디는 과정을 애도라고 부를 수 있다. 이른바 줄탁동시(?啄同時)의 심리학인 것이다. 엄마와 딸 사이의 심리적 탯줄을 끊어낼 수 있을 때 비로소 여성이 아닌 한 인간으로서 자신에게 이르는 길을 찾을 수 있다는 것으로 읽혀지기도 한다. <딸은 엄마의 감정을 먹고 자란다>는 책 제목만으로도 누군가에는 격한 공감으로 일독의 욕구를, 다른 누군가에게는 인정할 수 없는 반감을 불러 일으킬지도 모르겠다. 일단 책을 읽고 나면 엄마의 감정, 시선, 결핍, 모성, 남편에 대해 생각하고 이해하려는 노력이 결국 자신과의 대화이자 자기를 들여다보는 행위 그 자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러한 이해가 바로 회복의 첫 단계가 아닐까 생각한다. 또한 엄마답게, 딸답게가 아니라 '오롯이 나답게' 사는 삶이 왜 중요한지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만든다. 끝으로 세상 모든 엄마와 딸이 주는 눈치밥 말고 한 공기의 사랑을 원하는 남자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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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에 대한 내 감정은 복잡하다. 점점 더 복잡해지고 있다.
엄마를 물론 사랑하지만, 가끔은 엄마를 생각하면 답답하고 짜증이 난다. 엄마하고 대화를 하는 것을 피하고 싶어진다. 예전에는 그러지 않았는데, 이렇게 복잡할 것 없이 엄마가 그저 좋기만 했는데, 엄마에게 내 모든 걸 말해주고 싶었는데, 지금은 왜 이럴까. 나만 이러는 것도 아닌 것 같다. 친구들과 얘기를 나누다보면, 나처럼 엄마와의 관계가 점점 더 힘들어지고 있는 친구들이 많이 있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엄마에 대한 감정이 점점 더 복잡해지는 이유를, 이 책을 통해서 깨닫게 되었다. 내가 엄마를 생각하는 감정이 복잡해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왜냐면 엄마도 나를 복잡한 감정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엄마는 나를 그저 딸로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분신으로 보기도 하며, 때로는 또래 친구와 같이 질투할 대상으로 보기도 한다.
"딸을 보는 엄마의 감정은 매우 복잡합니다. 엄마가 어린 시절에 홀대 받으면서 자랐다면, 자신의 어린 시절의 모습을 딸에게 투영시켜 자신의 부모와 같은 방식으로 딸을 홀대하기도 하고 소외시키기도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딸아이에게서 발견할 때에는 불안해하고 불편해하면서 어떻게든 그 부분을 없애려 하지요. 또한 엄마가 결핍이 많으면, 지나치게 퍼붓는 방식으로 자신을 보상하기도 합니다. 엄마가 딸아이를 타인으로 대하지 않고, 어린 자신으로 대하고 있기 때문이죠. (p.20)"
이 문장이 엄마에 대한 감정이 점점 복잡해지게 된 이유를 정확히 집어내고 있다. 나는 엄마가 자신의 어린 시절 결핍을 나에게까지 전이시키는 것이 미웠고, 엄마가 나는 자신과 다르기를 바란다면서 내 꿈을 주저앉히는 것이 짜증났다. 요약하자면, 엄마가 나를 딸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일부처럼 생각하는 게 부답스럽고 화가 났다. 그래서 엄마에 대한 감정이 갈수록 복잡해졌던 것 같다.
엄마의 결핍을 고스란히 물려받다 엄마가 태어나자마자 부모님이 이혼을 하셨다고 했다. 엄마는 마흔이 다 될 때까지 엄마 얼굴 한 번 못 보고 자랐다. 외할아버지는 노름에 빠져 있어서 엄마를 제대로 돌봐주지 않았다. 엄마의 양육은 할머니가 담당하게 되었단다. 할머니는 무뚝뚝하고 약간은 차갑기도 한 분이었다고 엄마는 말했다. 그래서 엄마는 어릴 적에 자기 감정을 어디에도 털어 놓을 데가 한 군데도 없었다고 내게 말했다. 오직 나에게만 한 이야기다. 우리집은 딸 둘에 아들 하나이지만, 엄마는 이런 내밀한 이야기를 오직 나에게만 한다. 그래서 우리 집에서 엄마에 대해 가장 많은 걸 알고 있는 사람은 나다. 나는 그 지위가 좋으면서도 불편했다.
어려서 감정을 털어 놓을 때가 없었던 엄마는 감정이 드문 사람으로 성장했다. 감정, 그게 엄마의 결핍이라면 결핍이었다. 엄마는 남들은 보면 눈물을 펑펑 흘린다는 영화나 드라마를 봐도 감정의 동요가 거의 없다. 거의 울지 않는 엄마는 남이 우는 것도 이해하지 못한다. 아니, 싫어하기까지 한다. 문제는 내가 울음이 많은 편이라는 것이다. 엄마는 내가 울면 혼을 냈다. 울지 말고 똑바로 할 말을 하라고 했다. 엄마는 내가 허구한 날 운다고 생각해서 내 눈물을 지겨워했다. 나도 오기가 생겨서, 내가 우는 걸 싫어하는 엄마 앞에서 울고 싶지 않았다. 엄마에게 하지 않는 이야기가 점점 많아졌다. 나중에는 엄마에게 좋은 것에 대해서만 이야기했다. 또 운다고 한 소리를 들을 까봐, 엄마에게 속상한 이야기는 하지 않게 되었다. 나도 엄마처럼 내 속상함을 털어 놓을 곳이 없어졌다. 엄마의 결핍이 나에게 고스란히 이어졌다.
나는 엄마를 닮았다. 그리고 엄마는 그걸 혐오한다. 엄마는 자기가 이상주의에 한 때 빠져 있었다고 고백했다. 엄마는 자기 삶만 쾌적하게 바꾸는 것이 아니라, 온 세상을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고 싶다는 큰 꿈을 가진 젊은이였다. 엄마는 개인의 영달보다는 전 세계의 풍요를 바랐고, 그걸 이루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는 시민 운동에 열심히 참여했다. 학교 선생님이 될 수 있는 길을 버리고, 엄만 사회 운동을 하는데 뛰어 들었다.
엄마는 그 선택을 후회하고 있었다. 조금 더 현실적이었다면 어땠을까 하고. 그 때 사회 운동을 하는 대신에 선생님이 되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말을 엄마는 종종 하고는 했다. 현실적인 기반 없이 이상을 달성할 수는 없는 것인데, 젊을 때에는 그걸 모르고 현실적인 기반을 다지는 데에 소홀했다고 고백헀다. 만약 지금 선생님이었다면, 월급도 충분히 나오고 연금도 많이 나올 테니 집안에서 자기 목소리를 좀 더 뚜렷하게 낼 수 있었고, 아빠에게 뭔가를 더 강력하게 요구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러지 못했다고 아쉬워하셨다.
엄마는 딸인 나는 자신과 같은 후회를 하지 않기를 바라셨다. 그래서 엄마는 내가 이상적이라고 보일 수 있는, 큰 꿈을 꾸는 것을 싫어했다. 엄마만큼 너를 사랑하는 사람은 없고, 엄마만큼 나를 잘 알고, 엄마만큼 내 미래를 걱정하는 사람은 없다는 이유를 들며, 엄만 내 큰 꿈을 어떻게든 주저 앉히려고 했다.
나는 배우가 되고 싶었다. 꿈에 대한 자신이 없기도 하고, 이 꿈을 말했을 때 부모님의 반응이 어떨까 싶어서 꿈을 마음 속에 꽁꽁 숨겨 왔다. 그러다가 참을 수 없는 지경이 와서, 엄마에게 어렵게 내 꿈을 고백했다. 엄마는 단칼에 나는 그걸 할 수 없다고 말했다. 배우가 되기에 나는 얼굴이 너무 크고, 무다리이며, 매력이 없다고 했다. 그래서 배우가 된다면 평생 가난하게 살 거라고 했다. 엄마는 내가 성실하고 착실하니, 공무원을 하면 잘 맞을 거라고 했다. 배우와 공무원, 그 두 가지 사이의 거리는 너무나 멀었다. 엄마가 나를 진짜 사랑해서 한다는 그 말이, 내 가슴 속에 아프게 박혔다. 그 말들은 평생 빠지지 않는 가시로 남았다.
배우라는 꿈이 쉽게 응원해줄 수 있는 꿈이라는 건 안다. 엄마의 말대로 내가 배우가 되었다면 나는 무명을 벗어나지 못해 평생 가난하게 살았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배우가 되겠다고 어렵게 고백했을 때, 엄마가 내 꿈을 주저 앉히기 위해서 했던 말들이 평소에 엄마가 나를 생각하는 나인 것 같아서 너무 상처받았다. 엄마는 평소에도 나를 보면서 내가 얼굴이 크고, 무다리라는 것만 생각했을까. 엄마는 나에게 맞는 최적의 직업이 공무원밖에 안 된다고 생각한 걸까. 엄마에게 나는 그 정도의 가능성밖에 없는 자식일까.
그 뒤로, 나는 배우가 되는 걸 완전히 포기했다. 그게 전적으로 엄마의 뼈아픈 조언 때문이라고는 할 수 없다. 주변에서 아무리 좋지 않은 말을 해도, 그 꿈에 대한 자신이 있었더라면 나는 여전히 배우가 되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하지만 엄마의 그 말이 영향을 준 것은 사실이다. 나는 엄마가 나를 사랑한다면서 해줬던 말들이 너무 버거웠고, 엄마의 사랑도 버거워졌다.
엄마가 이 책을 읽어줬으면 좋겠어 책을 읽는 내내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아무도 몰라주었던 마음을 누가 마침내 알아준 기분이 들었다. 이제는 엄마도 내 마음을 알아주었으면 하는 마음에, 나는 다 읽은 책을 엄마 침대 옆 협탁에 내려 놓았다. 자기 전에 책을 읽는 엄마가, 이 책을 발견하고 무심코 읽어야 겠다는 마음을 먹어주기를 바라면서. 그리고 엄마가 나를 자기 자신의 일부가 아니라, 독립된 한 명의 인간으로 봐주길 바라면서.
엄마는 종종 내가 많이 변한 것 같아서 서운하다고 했다. 예전에는 내가 물어보지 않아도 엄마한테 하루 동안 있었던 일을 다 말해주었는데, 지금은 그러지 않는다면서 서운헀단다. 지금은 열 번 물어야 한 번 간신히 대답을 듣는다면서, 뭐 때문에 내가 갑자기 이렇게 무뚝뚝한 딸이 되었는지 엄마는 궁금해하기도 했다.
나는 엄마에게 상처 받았다. 하지만 엄마에게 상처 받았다는 이야기를 하면, 엄마가 또 상처받을까봐 엄마에게 엄마가 남긴 상처에 대해 이야기하지 못했다. 그 대신에 나는 엄마와 대화를 하지 않는 쪽을 택했다. 더는 상처 받지 않기 위해서, 상처 받을 일을 만들지 않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게 엄마의 서운함이 되었다.
이 책이 내가 엄마에게 차마 상처가 될까 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대신 들려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엄마 몰래 침대 옆 협탁 위에 올려둔 이 책을 하루에 한 번씩 확인하고는 한다. 1장이 끝나는 부분에 책갈피가 끼워져 있었다. 엄마가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어쩌면 이제 우리는 다시 예전처럼 가감없이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이로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희망이 샘솟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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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매우 강추합니다. X세대의 딸들은 대부분 엄마에 대한 애증이 있을 겁니다. 그 애증을 개인에 대한 것이 아니라 구조적인 것으로 다룰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저도, 그리고 엄마도 보다 깊게 이해하게 되었고, 저같은 경우에는 책을 읽으면서, 오빠에 대한 해묵은 복잡한 감정까지도 수면으로 떠올려 볼 수 있게 되어 너무 좋았습니다. 책 뿐만 아니라 박우란 작가님이 이 책 관련 유튭에 출연하신 영상이 몇개 있는데, 그 영상을 같이 보면 내용을 더 깊이 있게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아요. 같이 보시기를 추천드려요. :) |
책을 읽으면서.. 어? 어? 이런 느낌이였습니다. 엄마와 나..그리고 내딸을 책 속에 주입시키면서 상황상황을 떠올려보았고 엄마가 나에게 했듯이 내가 내 딸에게 그러고 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특히나 "엄마가 헌신적으로 열심히 사는것이 중요한것이 아닙니다" 라는 문구는 뒷통수를 망치로 맞은듯 했습니다 엄마가 자식들을 위해 늘 헌신적으로 살아오셨고 그것에 늘 감사하면서도 그게 답답한적도 있었는데 결혼하고 저 역시도 제 아이들에게 나 대신 엄마를 택하면서 헌신적으로 살아왔던것이 당연하면서도 뭔가 늘 힘에 겨웠는데..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이 들었습니다 책을 읽으면서 딸로서.. 엄마로서.. 다시 한번 나를 되돌아보는 시간이였습니다 |
내 키만큼 부쩍 자란 첫째 딸 아이를 보면 항상 미안한 마음이 먼저 든다. 두살 터울의 자유분방한 남동생과는 다르게, 늘 묵묵히 조용한 첫째 딸 아이를 보고 있노라면, 마치 내 어릴 적 모습이 스치는 것 같아 마음이 아파오기도 한다. 나의 어릴적 모습도 지금 내 딸 아이와 비슷했었다. 나에겐 세살 터울의 남동생이 있었고, 부모님이 특별히 누구를 편애하진 않았지만 나는 늘 엄마의 사랑이 부족했고 이해받지 못하고 있다고 느끼면서 살았다. 무엇이든 잘 하고 싹싹해서 늘 예쁨받던 동생과는 다르게, 나는 공부도 잘 하지 못 했고 내성적인 성격의 아이였다. 남동생은 엄마의 자랑이었고 사랑이었으며, 나는 그저 딸로써 묵묵히 엄마 옆에서 엄마의 그림자처럼 살아 왔던 것 같다.
[딸은 엄마의 감정을 먹고 자란다]
이 책을 마주하고 읽어내려 가면서, 내가 그 동안 무엇이 힘들었는지 조금이나마 알게 되는 시간이었다. 엄마의 자랑이었던 아들에게는 사랑을 주셨지만, 딸이었던 나에게는 늘 당신의 힘듦을 하소연하시며 당신 마음을 알아주길 바라셨다. 그래서일까. 책에 나온 내용처럼, 성인이 된 이후에도 인생의 가장 중요한 선택의 순간에서 늘 엄마의 목소리가 개입했으며, 즐겁고 행복한 순간에도 문득 나만 이렇게 행복해도 될까 하는 엄마에 대한 미안함에 나의 소중했던 시간들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 돌보지 못했었다. 내가 지금껏 살아오면서 마주했던 힘든 시간들이 이 책을 통해 그려졌고, 왜 힘들 수 밖에 없었는지 알게 되면서 엄마와는 다른 길로 걸어야만 나도 행복해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들게 되었다. 하지만 지금 나는 열두살된 나의 딸 아이에게, 예전에 엄마가 나에게 했던 것처럼, 사랑이란 말로 포장을 하며 딸로써 엄마의 힘듦을 이해해주기를 바라고 있다. 점점 커가는 딸 아이의 얼굴과 행동에서 어릴적 나의 모습이 보였고, 이 책을 읽음으로써 나의 딸에게는 나와 같은 아픔을 주지 않으리라 곱씹으며 노력해 보려 한다.
- 엄마의 시선이 사랑이 되려면 -
"가장 먼저 사랑을 빚어내는 것은 시선이다" 라는 책의 글귀처럼, 나도 딸 아이를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두고 온전히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봐주며 사랑으로 응시해준다면 그것이 진정 엄마가 딸에게 줄 수 있는 사랑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안전하지 않았던 시선과 사랑의 부재 속에서 커왔던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이제는 나의 딸에게 따뜻한 시선과 온전한 사랑을 보내주는 그런 엄마가 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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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책 제목이 끌려서 사서 읽게 되었습니다. 책을 읽는 기간은 2~3일 정도 되었고요 저에게도 똑같은 점, 공감 가는 점이 많았고 기억에 더 남았습니다. 제가 생각했을 때는 사람이 살아간다는 것이 그래도 조금은 다르고 차이가 있을 거로 생각했지만 사는 과정이나 살아가는 것이 비슷하거나 닮은 점도 있다는 게 위로도 되고 위안도 되었습니다. 그리고 엄마와 딸 사이에도 동등한 관계는 될 수 없다는 것 어느 한쪽은 위를 지탱하고 다른 한쪽은 아래를 지탱해야 비로소 관계 형성이 되는 것처럼 사람 마음이 간사한 것 같습니다. 저도 아직 딸이지만 저 자신부터 반성하면서 엄마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도록 노력하려고 합니다. 그래야 먼 훗날 제가 엄마가 되더라도 제 자식에게 좋은 엄마이기 전에 한 여자 인간으로서 삶과 물음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지 않겠냐는 생각이 듭니다. |
소리로만 들어도 눈물샘을 자극하는 보통명사가 있습니다. 마지막 만남이 있고 20여 년이 다 되어도 그렇습니다. 비록 그림처럼 형상화할 수 없는 글이기는 하지만 언젠가는 꼭 해 보고 싶었습니다. 창조성과 개성이 넘치는 문구는 아니지만 “딸은 엄마의 감정을 먹고 자란다”는 낯설지 않은 문구로 모녀 사이의 관계를 가정 적절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 같아서 오래된 마음의 정리로 출발과 마무리 삼기에 좋아 보입니다. 천륜이라는 아주 오래된 관계어로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실타래처럼 엮어가며 풀어가는 애도가 있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마음과 기억이라는 것이 요상하다는 것을 요즘보다 더 강하게 느낀 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만물은 시간 앞에서 작아진다고 하는데, 요놈들은 오히려 더 강해지는 것 같습니다. 살아온 시간이 싸이고 싸이면서 갈수록 반대편 시간을 잡아먹는데도 엄마와의 모든 기억들은 ‘고마움’, ‘미안함’ 더 단단하게 만들어 버리고 있습니다. 때로는 눈을 감았는데도 3차원 홀로그램이 되어 더 잘 보이는 ‘그리움’에 자리를 양보하기도 합니다.
딸의 입장에서 엄마를, 엄마의 입장에서 딸을, 치사랑과 내리사랑의 쌍방향으로 흐를 수 있는 감정의 골짜기를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들과 딸, 두 어린 자녀를 둔 젊은 엄마의 목소리가 다양한 삶의 이야기 속에서 엄마의 원초적 모습을 입체적으로 볼 수 있습니다. 어렸을 때의 받은 경험의 기억은 30이 넘어서도, 60이 넘어서도 감정과 해석이 덕지덕지 붙은 무의식으로 변하여서 현실을 재구성하게 만들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만나는 미안함, 억울함, 고마움 등의 다양한 감정 10여 년의 수도 생활과 실제 상담 치료 경험이 만들어낸 아주 독특한 시각으로 가족과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에 물결을 일게 합니다. 그렇게 출렁이고 굴러가며 만들어지는 이야기 속에서 ‘자연적 인간’으로서의 엄마와 ‘사회적 역할’로서의 엄마를 마주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자연 속의 사회적 존재로써 내 안의 본성과 이성에 충실하게 가정을 넘어서 사회의 영역으로 확대하여 자신만의 자리를 만들게 합니다.
좋은 엄마는 없습니다. 새 생명을 잉태하는 것은 분명히 축복이지만, 반드시 그러한 것이라고 단정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능동적 동지애’를 원하는 육아라는 문제를 비롯하여 인간 대 인간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모습의 관계가 설정됩니다. 모녀지간에도 아주 긍정적으로 사랑만을 담기가 쉽지 않은 이유입니다. 인간의 관점, 사회적 관점이라는 이중적 관점으로 다가가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악독한 시집살이를 견디고서 전통적인 가부장적 문화에 최적으로 순응한 엄마는 특히 그렇습니다. 아들에게는 온갖 정성으로 한낮 뙤약볕의 괴롭힘에도 아랑곳하지 않으면서도 딸에게만은 가정 형편상 어쩔 수 없다고 하며 많은 양보를 권유합니다. 아들보다는 딸을 길게 늘어난 그림자처럼 자신의 연장선상의 존재로 여기는 장면을 목격하는 아들은 유쾌하지만은 않습니다. 어찌보면 엄마가 자신의 삶에 충실하고 욕망에 집중하여 발화하고, 딸을 위한 변화보다는 자신의 안녕과 평안을 위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해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 공간에서는 아이의 욕망과 부모의 욕망이 부딪힐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사회, 경제적으로 무능하거나 감정적으로 동지애가 부족한 아빠라도 끼어 있는 상황의 경우에는 두려움이라는 감정의 희생은 더 큰 변수가 됩니다. 최악의 경우에는 부모의 감정 쓰레기통으로 만들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엄마도 원초적으로 현실의 길흉화복에서 희로애락에 철저하게 반응하는 존재라는 것을 잊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무념무상의 절대적인 이상적인 엄마이기보다는 자신만의 길이 있는 현실의 엄마만 있을 뿐입니다, 절대적 가난에서 상대적 가난으로 시대가 달라졌고 맥락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아이에게는 아이대로의 길이 있듯이 엄마에게는 엄마대로의 길이 있습니다.
그래도 엄마는 위대합니다. 엄마로서의 고유함은 무한히 열려 있습니다. 모성이라는 것과 엄마를 찾는 것은 본능과도 같은 것입니다. 하지만 모든 엄마가 조건 없이 아이를 향한 사랑의 길로 접어든다는 것은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말처럼 사회의 관행이, 세상의 질서가 만든 환상이고 신화일지도 모릅니다. 아동학대가 벌어지는 것을 어렵지 않게 묵도하는 요즘 세태에서는 더욱 희생한 만큼의 보상 싹수가 보여야 정성과 사랑의 빛을 쪼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만큼 모성 본능에 제모습의 자격을 부여하는 것은 감히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본능을 세상에 보이는 것은 자신의 메시지를 선택적이고 의식적으로 행동하는 것이었습니다. 현실과 이상의 타협점에서 사유를 통해서 자신의 욕구와 욕망, 결핍과 상처를 애도하여 뜨거운 모성을 보여 줍니다. 초등학교도 못 다녔고 평생을 가난 속에서 온갖 고생으로 허덕이었지만, 극한의 굴레를 당신 대에서 마침표를 찍으려고 했습니다. 내 안의 상처를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이해하고 자신을 깊이 알아 가는 존재만이 생각이 실천할 수 있는 숭고한 작업이라는 도착점을 보게 됩니다. 있는 힘을 다해 자신을 의심하고 질문하고 살펴야만 교활한 무의식에 굴복하지 않고 아이에게 손길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부모의 역사를 이해하는 것이 내리사랑의 출발점인 것 같습니다.
엄마의 태도가 아이의 삶을 만듭니다. 엄마를 인생에서 맨 처음 만나게 됩니다. 의식이 완숙하지 않은 시기에는 세상의 모든 것이고 절대적인 존재입니다.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왔을 때에 엄마가 없는 경우에는 엄마를 찾아서 온 동네를 떠돌아다닐 정도입니다. 휑함의 허전함과 심지어는 두려움이 급격하게 몰려올 정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존재는 비언어적 메시지를 포함해서 앞으로 자신이 살아갈 미지의 공간에서 마르지 않을 최소한의 생존 비법의 밑바닥을 만들 수 있게 해 줍니다. 엄마는 사회화된 지식으로 만들어진 언어를 선택하여 말하고, 자녀는 그런 언어를 매개로 하여 세상을 나갈 준비를 하게 됩니다. 엄마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을 통해서 타인을 타인으로 보고 나를 나로 지킬 수 있는 삶을 꾸려가게 됩니다. 자신의 욕망을 충족하는 방법을 체화하게 됩니다. 모성애와 자신의 결핍 사이의 피 튀기는 골짜기가 한쪽으로 기울수록 아이를 향한 대리 충족의 공간으로 간절하게 다가오기도 합니다. 어떤 생각, 어떤 감정, 어떤 상상을 하든 그것만으로는 가치판단으로부터 자유로운 영역을 보장받는 경우에는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것을 넘어서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의 세상을 꿈꿀 수 있게도 합니다.
나를 자세히 보면 엄마가 보입니다. 비록 성(姓)은 달라도 엄마의 욕망은 고스란히 나에게로 대물림되어서 나 자신의 욕망인 것처럼 매일매일 에너지를 쏟습니다. 가족, 모녀의 천륜이라는 핏줄 연대는 딸에게, 딸의 딸에게로 시간의 매듭을 넘어서 멈추지 않고 질기게 심리적 반복의 끈으로 이어집니다. 엄마와 딸이라는 무궁무진한 가능성의 두 존재가 태생적으로 만나는 공간에서 만들어진 결핍과 욕구는 애증을 넘어서 서로의 행복을 담보하는 공생관계로 연결됩니다. 자연인과 사회인의 관계가 이익 균형으로 취사 선택의 경우보다 조화롭게 되는 경우에는 서로의 원초적 욕구가 서로 합일될 수 있는 지점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게 됩니다. 엄마의 말과 엄마의 감정을 통해서 아이의 무의식이 구조화되고, 그 위로 의식이 생기어서 질서가 부여되면서 다양한 감정이 움튼 세계관이 올라서게 됩니다. 엄마의 존재는 언제나 돌아갈 수 있는 최후의 안식처가 됩니다. 특히 객지 생활을 하거나 출산 직후에는 더욱 그러합니다. 현실의 고통에서 밀려오는 무기력과 우울감으로 엄마의 세계로 침전하고, 심지어는 엄마의 자궁을 그리기도 합니다. 마음 속에 만들어진 엄마의 자리는 새로운 관계를 만들게 하는 마음의 근육이 되어 더 힘을 내기도 합니다. 중요한 순간에 상황으로의 집중보다는 안으로 안으로만 자신의 역할과 이미지라는 초점을 찾아 쪼그라드는 자신감에 배가 되는 에너지 불을 댕기게 합니다. 세상의 상처를 이겨내고 타인에 대한 믿음의 밑바탕이 되는 정서적 맷집으로 이르는 길에는 아이와 소통으로 아이의 관심에 감각을 키우고 나 자신과 아이에게 무수히 반복해서 질문을 던지게 합니다.
나도 사랑스러운 딸이고 싶었습니다. 엄친딸이 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러하지 못했습니다. 근처에도 가지 못했습니다. 엄마에게 위로와 응원이 필요할 때에 도움이 되는 감정을 전혀 동고동락하지 못 했습니다. 풍수지탄(風樹之嘆)이라는 옛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존재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사랑에도 때가 있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지만 시간이 야속할 정도로 내 편이 아니라는 것을 정말로 몰랐습니다. 철이 지난 사랑은 이미 엄청나게 엇갈려서 구멍 난 가슴을 메꾸기 어렵습니다. 하물며 물리적으로 시도조차 불가능한 경우도 있습니다. 시간에 박복함은 어렸을 때 바라보던 엄마의 나이가 되어 보니, 엄마 모습을 찾아갈수록 기억을 강해지게 하는 것 같습니다. 4차 산업혁명의 한가운데에서 문명의 이기가 넘쳐나더라도 삶의 본질을 충족하는 일상의 매 순간에 엄마의 감성 자극을 생각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본성을 자극하는 무의식적인 감성에 따라서 마지막 페이지까지 오는 데에는 무리가 없습니다. 그렇게 덮고 나니 마음이 후련하기보다는 복잡해지기 시작합니다. 나 자신은 엄마에게 어떤 존재였는가를 쉼 없이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게 합니다. 내리사랑을 향한 현장에서는 치사랑의 기억을 소환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엄마보다 더 행복하면 괜한 죄책감이, 기대만큼 행복하지 못하면 미안함이 내 안의 엄마의 유령과 잘 동거할 수 있는 온전한 나 자신을 고민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삶은 계속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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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으면서.. 어? 어? 이런 느낌이였습니다. 엄마와 나..그리고 내딸을 책 속에 주입시키면서 상황상황을 떠올려보았고 엄마가 나에게 했듯이 내가 내 딸에게 그러고 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특히나 "엄마가 헌신적으로 열심히 사는것이 중요한것이 아닙니다" 라는 문구는 뒷통수를 망치로 맞은듯 했습니다 엄마가 자식들을 위해 늘 헌신적으로 살아오셨고 그것에 늘 감사하면서도 그게 답답한적도 있었는데 결혼하고 저 역시도 제 아이들에게 나 대신 엄마를 택하면서 헌신적으로 살아왔던것이 당연하면서도 뭔가 늘 힘에 겨웠는데..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이 들었습니다 책을 읽으면서 딸로서.. 엄마로서.. 다시 한번 나를 되돌아보는 시간이였습니다 |
처음 이 제목을 보고서는 사춘기 시작되는 딸아이의 마음을 더 잘 이해할수 있지않을까 해서 선뜻 구입하게 되었는데~~.. 일하랴 살림하랴. 집에와서도 아이들 공부챙기랴 책읽을 시간도 부족하다. 틈틈히 읽게되는데... 점점 아이를 위해 읽는다기보다 내마음의 치유가 되는 느낌. . 아~~ 나의 이야기인것같은 느낌. . 한번씩 난 느낀다.. 내가 모성애가 부족한가? 일에 지치거나 남편이랑 다투거나.. 안그래야지 하면서도 아이들한테 더구나 첫 딸한테 그 감정이 부여가되고.. 그러고나서는 후회를 하고.. 매번 되풀이 되는것같은.. 나의 어린시절의 결핍이 그대로 나타나는것같은.. 공감되는 글귀가 많아서 시작은 어려웠는데 책이 잘 놓아지지가 않았다.. 피곤하고. 늦은시간까지 자꾸 보게되는.. 엄마는 엄마의 삶을 살면된다.. 맞다..그러한데.. 자꾸 딸아이한테.. 강요를 하게되는것같다.. 딸아이는 내가 아닌데.. 그냥 나는 엄마로서의 나로 살면 되는것을~~ 나의 부족함을 딸아이에게서 자꾸 채워나가려고 하다보니 자꾸 부딪히게 되고 서로 힘들어지게되고 알면서도 잘 고쳐지지 않았는데..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마음이 좀 진정되는것같다.. 솔직히 집중이 확 잘되진않는다.. 그런데 손에서 잘 놓아지지않았다.. 읽었던 글귀를 다시읽고 되내이고..또다시 읽고~~ 시간이 참 많이 걸려가면서 읽어진다.. 생각이 많이지게 만들어지는책.. 공감도되고.. 아ㅡ내 이야기인가.. 반성도되고~~ 이런저런 생각을 가지게 만들어주는.. 읽고 잊혀지는책이 아닌 자꾸 여운이 느껴지는 그런책.. 제목에서도 느껴지는.. 마음의 치유가 되는 그런 책입니다 |
엄마에 둘째딸이자 두딸을 둔 엄마로써 공감100배 흔히들 딸은 엄마 팔자 담는다 라는 말을 많이 하는데 ....인정하고 싶지 않치만 나도 모르게 친정엄마와 똑같은 행동방식을 취하고 있을때를 종종 느끼는 순간이 있었다. 그럴때마다 체념하고 마는 날 볼때면 화도 나고 했었는데... 부모와 자식을 위해서 참고 희생하는 내가 아닌 오롯이 내자신의 행복감이 우선 되어야 한다는걸 다시 한번 새기게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