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책의 제목에 "품위"가 들어가는 책들이 심심치 않게 나오는 것 같다. 그만큼 요즘 시대에 품위와 관련된 이슈가 많다는 얘기일 것이다. 온갖 무례한 일들이 벌어지는 이 시대에 이러한 책들이 안내자 역할을 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다음은 책의 내용 중 인상적이었던 부분이다. "상대와 마주 앉아 얼굴을 보고 이야기하는 것과 컴퓨터 앞에 허리를 수그리고 앉아 타자를 치며 뒷공론하는 것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후자는 이런저런 반론의 댓글을 남긴 다음, 커피를 끓이거나 자기 할 일을 하면서 본인이 쓴 글을 잊는다. 그러는 동안 그 댓글을 읽은 상대방은 인종 차별주의적인 발언에 타격을 받고는 얼음찜질로 상처를 어루만지거나 분노로 거품을 물며 새로운 댓글을 달게 된다. 그러나 이 댓글은 읽히지 않는다. 방금 말했듯이 분노를 유발한 당사자는 자신이 쓴 댓글을 까맣게 잊은 채, 커피를 내린 다음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후로도 그는 철물점에 가서 사야할 물건들 생각에 빠져 있을 것이다." |
무례한 시대를 품위 있게 건너는 법 리뷰입니다. |
얼마 전 미국의 대선이 끝났다. 결과는 충분히 예측 가능했다. 아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긴장을 늦출 수 없었던 건 당연함이 당연하지 않을 수도 있음을 이미 한 차례 경험한 탓이 컸다. 어찌 그와 같은 인물이 한 나라를 대표하는 자리에 선출될 수 있었는지 난 지금도 의문이다. 해당 국가 사람들의 수준 낮음을 원인으로 차마 꼽을 순 없었다. 부정선거를 의심하느니 차라리 선거제 자체를 의심하는 편이 나았다. 유럽 전역에 끔찍한 역사를 선사했던 히틀러도 합법적인 선거에 의해 선출됐었으므로.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조금 더 나은 결과를 도출할 수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 편으로는 이번 선택이 과연 정녕 옳은 선택이 맞는가 의구심이 일기도 했다. 의심할 거리는 도처에 널렸다. 이제껏 인류는 진보해왔다고 배웠다. 경제적인 측면만을 놓고 본다면 이는 맞는 말이다. 불과 20여년 전만 해도 인터넷을 모르는 사람이 태반이었다. 스마트폰은 또 어떠한가. 개개인이 폰을 들고 다니면서 통화하는 시대가 열릴 거라는 상상 자체가 최근에 시작됐다는 사실은 믿기 힘들 지경이다. 그런데 이상하리만치 삶은 더욱 척박해졌다. 사람들의 얼굴에 드리운 그늘이 해를 거듭할수록 짙어만 진다. 코로나19로 대변되는 이상한 바이러스 탓만 할 순 없는 노릇이다. 뉴스를 틀면 믿기 힘든 소식이 한 가득 쏟아진다. 다같이 정신을 잃기로 작정이라도 한 게 아닐까 묻고파진다. 저자의 말을 빌리자면 그야말로 ‘무례한 시대’를 우린 살고 있다. 생존이 모든 욕구를 억눌러 버린 시대, 오로지 살기 위해 모든 걸 짓밟는 게 용납되는 시대. 부디 그런 시대는 아니었으면 싶건만, 언제나 슬픈 예감은 틀리질 않아 큰일이다. 개개인이 노력한다고 한 번 뒤틀린 흐름을 바로잡을 수 있을까 싶다. 단위가 하나의 사회, 더 나아가 거대한 시대인데, 개개인이 지닌 힘은 이에 대적하기에 한없이 미천하게만 느껴진다. 그렇다고 시류에 편승하고 싶은 마음은 안 든다. 솔직히 성공 대열에 합류한 사람들을 보면 부러움이 앞서지만 방향 감각을 상실한 채 달리기 바쁜 경주마가 된다는 게 위험할 수도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국가에 충성해서 높은 지위에 오른 사람들을 떠올려 본다. 그들의 삶은 한결 수월했겠지만 역사는 그들을 나치, 일제 부역자 등으로 기억한다. 묻고 따지지 않으면 그리 되기 십상이다. 아니, 그들은 외려 철저히 묻고 따진 끝에 스스로 그 길을 택해 걸었을 수도 있다. 믿음이 강렬하면 사실 아닌 것도 사실로 돌변한다. 그들에겐 자신들이 택한 게 곧 품위였다. 유대인 학살에는 가담했지만 유대인의 재산을 함부로 빼앗지는 않았다는 말로 그들은 자신의 품위있음을 증명해 보였다. 청렴한 공무원으로서 명령을 이행했을 뿐 그것이 나라를 팔아먹은 건 아니라는 식의 변명 또한 그들에겐 진심이었다. 일종의 발뺌이고 비겁한 변명처럼 들리지만 그들이 거짓말을 한 건 결코 아니다. 그들의 세상에선 그게 진실이었고 진리였을 뿐이다. 시대가 무례하더라도 품위까지 잃어서는 안 된다. 세상을 바꾸는 건 바보라는 말이 떠오른다. 한 개인의 삶 단위로 사고한다면 바보라는 평은 진정 옳다. 철로로 떨어지는 아이를 보자마자 뛰어내려 아이를 구하고는 제 목숨을 잃은 사람들을 우린 보았다.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는 제안을 자신의 신념에 반한다며 용기 있기 뿌리친 이들도 꽤 많다는 걸 우린 잘 안다. 너무 거창하다면 이건 어떠한가. 저자의 친구는 맥주를 고를 때 제조사가 도덕적으로 정당한가를 묻는다. 노동자들을 탄압하는 회사, 해고를 밥 먹듯 행하는 회사의 제품은 소비하기에 앞서 고민하고 거부하는 건 목숨을 걸어야 할 만큼 위험하진 않다. 아니, 겉으로 드러나는 실천이 아니어도 좋다. 무언가 행하기에 앞서 나는 물론이거니와 타인을 한 번 더 살피고 보듬을 수 있다면 그걸로 족하다. 상대의 아플 마음을 헤아려 인터넷에 익명으로 험한 댓글을 남기지 않는 거, 내가 그러하듯 상대도 미래에 대해 혹은 오늘날 누리고 있는 것들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을 느끼는 존재임을 인정하는 거. 쉬운 듯하면서도 어려운 변화를 위해 우리는 무엇부터 시작하면 좋을지. 모든 인간이 마땅히 지켜야만 하는 거. 저자는 품위가 그런 거라 말했다. 마땅히가 곧 저절로를 뜻하면 좋으련만, 슬프게도 우리는 품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해야만 한다. 시대가 우릴 이렇게 만든 것일까, 아니면 과거에도 인간은 부단한 노력 끝에 품위를 상실하지 않을 수 있었던 걸까. 어느 쪽이건 현 시대는 무례하다. 가만히 있으면 자꾸만 우린 무례한 시대와 닮은꼴이 되어간다. 내가 잘 살기 위해 너는 필요 없다며 막말을 일삼게 되고, 타인을 배척하고는 외로워 떨게 된다. 품위 없는 삶은 서럽다. 품위 없는 삶은 볼품없다. 우리의 삶이 멋드러졌으면 한다. 안팎 모두. |
최근 경제적 자유에 대한 열망이 높다. 재테크 열풍은 여전하다. 파이어족의 사례는 더 이상 먼 얘기가 아니다. 우리 주변에서 일어난다. 이러한 흐름은 품위 있는 삶을 살고 싶다는 사람들의 욕망을 보여준다. 그 품위는 돈에 대한 믿음이다. 품위의 사전적 정의는 ‘사람이 갖추어야 할 위엄이나 기품’, ‘사물이 지닌 고상하고 격이 높은 인상’이라고 한다. 결국 경제적 부가 우리 시대의 품위의 척도라는 의미다. 경제적 부가 반드시 품위를 담보하지는 않지만, 필요조건 중 하나라는 점에서는 아무도 이의가 없다. 사람답게 산다. 사람 구실을 한다. 이를 위해서는 경제적인 능력이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늘 그렇듯 수단을 목표로 삼게 되는 경우가 생긴다. 각자도생의 경쟁에 익숙한 우리 사회에서 돈과 생존의 문제는 품위 있는 삶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부의 추구가 나쁘다는 말은 아니다. 품위 있게 살고자하는 노력이 자칫 우리의 품위를 저해하고 있는 게 아닌지 걱정스럽다. 개처럼 벌어서 정승처럼 쓰면 좋겠지만 그게 어디 쉬운일이 겠는가. 버는 일도, 쓰는 일도 쉽지 않다. 악셀 하케의 <무례한 시대를 품위 있게 건너는 법>은 품위란 무엇인가, 품위 있는 삶에 대해 지속적으로 질문을 던진다. 저자는 현 시대가 혼란과 무례함이 판치고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우리의 저열함이 사회를 해체시키고 있다고 진단한다. 이런 분석에 기초하여 시종일관 품위를 찾아 해맨다. 왜냐하면 품위는 “매 순간 자신에게 질문을 건네면서 끊임없이 찾아가야 하는 대상(p.38)”이자 “모든 인간이 마땅히 지켜야 하는 태도이(p.43)”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품위란 무엇인가. 저자는 “한 인간이 스스로를 통제하는 행위”이며,. “다른 이들과 기본적인 연대 의식”과 “생을 공유하고 있음을 느끼”고 “삶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의식”이 “모두 동일하게 중요”하다는 것을 “일상의 모든 상황 속에서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마음(p.244)”이라고 정의한다. 한마디로 “평범한 보통의 삶 속에서도 타인을 배려하거나 고통에 동참하(p.36)”는 것이다. 그렇기에 무례함은 각자도생의 삶을 사는 우리, 소셜 미디어에서 분노를 표출하는 우리, 이민자들을 배척하고 소수자를 차별하는 우리 삶에서 드러난다. 이러한 무례함은 우리 사회와 공동체를 파괴한다. “우리에게 닥친 문제들을 단순히 증오나 거부로 풀 수 없(p.218)”음을 알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세상을 명쾌하게 설명해주며 세상을 보다 단순하고도 이해하기 쉽도록 만들어주는 ‘이야기’를 향한 그리움(p.182)”에 이끌려 간단한 해결책만을 원한다. 급진적인 표퓰리스가 득세하고, 사람들이 혐오와 차별에 물드는 것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우리의 뇌는 다양한 편향으로 프로그래밍 되어 있다. 원시의 뇌는 편을 가르고, 배신자를 처단하고, 이야기에 유혹 받도록 말이다. 그것이 우리를 지금까지 살아남게 해주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주어진 문제가 아니라 문제를 받아들이는 태도에 있다.(p.128)” “우리가 다른 사람과 공존하려면 더불어 살아야만 하고 또 더불어 살고자 하는 타인에게 일말의 관심이라도 가져야 한다.(p.155)” 우리 민족, 우리 국가끼리만 살아가기에는 세상은 너무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버렸다. 우리가 주어진 문제를 쉽게만 해결하려고 할 때, 그 결과는 제로섬 게임이 된다. 모두가 서로에게 관심을 가지고 무례함을 줄이고, 품위를 유지하려고 애써야만 윈-윈 게임으로 공존할 수 있다. 쉬운 일이 아님은 분명하다. 명확히 옳은 선택이 있음에도 우리는 본성은 거스르기 어렵다. 사람은 옳은 선택보다 쉬운 선택을 하게 마련이다. 경제적 자유와 품위는 양립가능하며 동시에 우리가 추구해야 할 가치다. 만약 이 둘이 충돌한다면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가? 말은 쉽게 할 수 있지만, 막상 양자택일해야 한다면 고민스럽다. 먹고사니즘을 넘어, 나라는 테두리를 초월하는 선택이 쉬울 리 없다. 우리와 모두를 위한 선택을 나는 할 수 있을까? 이 양자택일의 간극을 좁혀가는 것, 그것이 우리가 함께 고민해 나갈 부분이다. 무례한 시대를 품위 있게 건너는 법은 거기 어딘가에 숨겨져 있지 않을까. --------------------------------------------------- 나는 힘러의 전략에 눈길이 간다. 이처럼 인간의 기본 원칙에 해당되는 개념을 뒤틀어 체제를 유지하는 방식은 고도의 전략이라 할 수 있다. 이를테면 자유나 진실 그리고 정의와 같은 개념들을 고유의 뜻이 아닌,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닌 대척점에 있는 단어로 대체하는 것이다. 이런 전략은 대중으로부터 말을 빼앗음으로써 체제 유지나 전쟁을 성공적으로 이끄는 데 기여한다. p.29 품위가 없는 사람은 평범한 보통의 삶 속에서도 타인을 배려하거나 고통에 동참하지 않는다. p.36 케스트너의 소설에서 보여주듯이 품위는 개인의 문제이기도 하며, 매 순간 자신에게 질문을 건네면서 끊임없이 찾아가야 하는 대상이기도 하다. 또한 품위를 갖추고자 한다면 우리에게 익숙하고 자연스러운 것들을 가끔은 의심하고 반문할 필요도 있다. 다들 흔히 하는, 별다른 생각 없이 자동적으로 튀어나오는 타고난 언행을 할 때에도 혹시나 품위에 거스르지 않는지 곱씹어야 한다. 이처럼 우리가 인간으로서의 품위에 대해 몰두하고 신경 쓰고 노력한다면 이(p.37) 것이야 말로 문명의 진보가 아닐까? p.38 계층을 떠나 모든 인간에게는 책임이 있다. 그 책임은 바로 도덕성과 분별력을 통해 우리가 속한 체제를 든든히 유지하는 것이다. 체제의 토대는 도덕성과 분별력이 받치고 있어야 한다. - 아돌프 크니게 p.42 품위는 모든 인간이 마땅히 지켜야 하는 태도이다. p.43 품위는 타인과 더불어 사는 데 완충재와 윤활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토메가 지적하듯, 오늘날 사회는 두 가지 측면을 가지고 있다. 한편에서는(p.49) “사회 질서 유지를 위해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도덕적 규범”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 다른 한편에서는 수많은 개인들이 사회 공동체를 오직 사적 이익을 극대화하는 공간으로 활용하면서, 질서와 규범에는 무관심한 채 자유를 위한 고유의 행동반경을 방어하고 있다. 그리하여 현대 사회는 결속과 분열이 동시에 이루어지는데, 그 한가운데에 이른바 ‘중간 세계’가 있다. “이 중간 세계에서 개인은 타인과 서로 조율하고 화합하며, 서로를 받아들이면서(사적 영역을 존중하며) 나란히 성장해 간다.” 우리가 지금 바로 이야기하고 있는, 품위가 존재해야 할 곳은 바로 이 영역이다. p.50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이며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 이는 모든 당과 이념이 넘어야 할 과제이며, ‘품위를 갖추려는’ 사람들과 인간다운 사고를 하는 사람들의 선두에 놓여야 할 질문이다. -한스 팔라다 p.53 “지금 우리 사회는 모든 것이 복잡한 데다 온통 모순덩어리야. 이 시대를 사는 인간에게 가장 중요하고도 필수적인 능력은 이 모순과 복잡성을 받아들이고 견디는 거라고 생각해.” p.62 디지털 세계에서 뉘앙스 같은 미묘하고 세부적인 차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에서는 모든 것이 0 아니면 1이다. 극단적이고 차가운 디지털 세계에서는 그림자도 짙고 서늘하다. p.100 인간은 이야기의 전부를 설명하고자 하지 않으며 할 수도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인간은 근본적으로 의사소통에 대한 갈망(p.107)이 있다. 즉 어떻게든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한다. 함께이든 혼자이든, 옆에 앉은 누군가가 귀 기울여 듣지 않더라도, 마지막 맥주가 바닥나더라도 상관없이 말을 내뱉고 싶어 한다. -야나 헨젤 p.108 어리석은 사람들과 토론하지 마라. 그들은 당신을 자신들과 같은 수준으로 끌어내린 뒤, 숙력된 기술로 당신을 두들겨 팰 것이다. -마크 트웨인 p.119 무기력과 두려움은 한데 결합하여 상승효과를 일으킨다. 가령 두려움을 지닌 사람은 이 두려움의 원인에 대항하여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감정을 느끼게 된다. 그러면 이 두려움은 어느 순간 거대하게 자라나 우리의 감정을 지배하게 된다. 또한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느끼는 무력감은 쉽게 이해하기도, 받아들이기도 힘든 감정이기 때문에 한번 생겨나면 벗어나기가 어렵다. 외국인을 향해 심각한 두려움을 느끼는 이들은 보통 외국인을 만난 적이 없거나 외국인을 전혀 알지 못하는 경우가 다수이다. (만약 이들이 기꺼(p.127)이 외국인에게 다가가고 가까워지려 노력한다면 이전에 느꼈던 막대한 두려움은 다소 경감될지도 모른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주어진 문제가 아니라 문제를 받아들이는 태도에 있다. 이 시대를 사는 모든 이들은 각자의 삶을 지탱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알고 보면 우리 모두는 굉장히 비슷한 방식으로 나만의 투쟁을 벌이고 있다. 차이점이 있다면 주어진 전제 조건과 투쟁의 수단이 각기 다르다는 것뿐이다. 그러므로 상황을 무조건 두려움으로 받아들이기에 앞서, 이 점을 먼저 이해하는 것이 동시대를 더불어 살아가는 데 훨씬 더 중요하지 않을까? p.128 두려움에는 몇 가지 장점이 있다. 먼저 두려움은 대단히 유용한 편이다. 스스로 두려움을 인정하고 이 감정을 밀어내지도, 억누르지도 않으면 어쨌든 해가 되지는 않는다. 두려움은 억압하고 몰아내면 더욱 커져 이내 우리의 감정을 압도하기 때문이다. 두려움을 인정한다는 것은 감정을 혼자 간직하지 않으면서 비슷한 감정을 느끼는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는 경험까지 포함한다. 이 경험을 통해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학인 한다. 두 번째로 두려움은 (가능한 선에서) 상황을 적절히 판단하여 처리하는 데 도움을 준다. 무슨 뜻인가 하면, 현실을 상상의 영역으로 끌어들여 두려움을 견지하면서 상황을 이성적으로 접근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두려움은 원형과 조금 다른 모습으로 변모한다. 예컨대 증오는 두려움이 배출되는 다양한 하수구 중 하나로, 원치 않는 그리고 견디기 힘든 감정들이 빠져나가는 통로라고 할 수 있다. 즉 증오의 원형은 두려움인 셈이다. p.129 소셜 미디어는 이러한 관심의 이면을 끄집어내 터부나 스캔들을 일종의 심심풀이, 장난, 화젯거리로 소비하게 만든다. 소소하게 시작된 장난은 수많은 이들이 집중적으로 몰려들어 공유되면서 거대한 일이 되어버린다. 소셜 미디어에서 대중의 관심은 자산과 같기 때문에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게 마련이다. 즉 관심의 획득은 비즈니스로 직결되므로 관심의 욕구를 가장 만족스럽게 채우거나, 비열한 방법으로 선동하거나, ‘적당한 선’에서 타인에게 상처를 주며 관심을 얻는 이들은 상당한 이득을 얻게 된다. 문제는 이런 관심의 이면 때문에 온 세상이 소셜 미디어에 매달려 내내 클릭을 하면서 화가 난 채로 말과 글을 주고받는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관심이라는 단어가 점점 더 왜곡되고 오염되는 것만 같다. p.142 우리가 다른 사람과 공존하려면 더불어 살아야만 하고 또 더불어 살고자 하는 타인에게 일말의 관심이라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작은 관심은 결코 손해로 돌아오지 않는다. 물론(p.155)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정치인들을 포함하여 상당수의 현대인들은 분주한 업무와 정해진 일상에 치여, 타인을 향한 일말의 관심이 끼어들 여유조차 없다. 그로 인해(우리 삼촌의 이야기로 돌아가 비교했을 때) 인간에게 반드시 필요하며, 인간이라면 응당 받아야만 하는 존중이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p.156 “복지 사각지대라는 단어가 옳은 표현인지 가끔 의문이 들곤 해. 복지는 왜 모든 인간의 기본적 욕구를 채워줄 수 없는 거지? 인간의 근본적인 불안과 두려움을 막아주는 것이 복지인데, 복지 사각지대란 결국 복지가 닿지 않는 곳이잖아. 참으로 역설적인 말인 것 같아.” p.157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급진주의화되고 있다. 이들은 낯설고 생소한 모든 것을 증오로 느끼며 이 증(p.169)오라는 감정 속으로 도망친다. ... 이 모든 현상들은 불안이 극심해진 우리 사회의 단면이라 할 수 있다. 불안정과 불확실성이 만연한 현실 속에서 각 개인이 나름의 안정감과 자존감을 확보하기 위해 찾아낸 대안인 셈이다. 개인들의 이런 행보는 결국 광적으로 치달아 다른 사람들과 새로운 것을 향해 벽을 쌓게 하고 이견에 부딪혔을 때 조율하는 능력을 떨어트린다. p.170 인간은 횡경막이나 심장과 같은 기관들에 단단히 고정되어 있는데 이 모든 기관들은 결코 지성적이지 않다. 인간의 몸과 마음을 이루는 기관들은 불쾌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보다 차랄 왜곡하고 날조하기를 즐긴다. -알렉산더 클루게 p.178 때때로 우리는 진실이 아닌 다른 무언가를 더욱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그렇(p.181)다면 진실보다 더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인간에게는 아주 오래된 갈망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세상을 명쾌하게 설명해주며 세상을 보다 단순하고도 이해하기 쉽도록 만들어주는 ‘이야기’를 향한 그리움이다. 단순명료하고 방향성을 제시하며 의미를 부여하는 이야기가 존재할 때 인간은 안정을 느낀다. 이러한 욕구는 현실 세계에서는 채워지기가 힘들다. 현실은 너무 복잡하고 고단한 일들로 얽혀 있기 때문이다. 주어진 상황이 더욱 어렵고 복잡해질수록 단순함에 바탕을 둔, 문제 해결책을 가진 지도자를 향한 갈망이 더욱 커진다. 세상을 간단명료하게 해석하며 “내가 여러분들을 위해 다 해결하겠다”고 말하는 지도자에게 마음이 쏠리는 것이다. 설령 그가 거짓말을 하더라도 사람들은 거짓 여부에는 관심이 없다. 중요한 건 사실이 아니라 감정이다. p.182 하라리가 거론한 이야기의 힘은 우리가 어떤 가치를 공통으로 확신하게 될 때 인류에게 미치는 영향을 여실히 보여준다. 예컨대 품위와 같은 가치 말이다. 품위 역시 우리 인간이 함께 이루어낸 가치이다. 품위라는 가치를 공통으로 확신하는 사회는 올바른 행동과 태도가 무엇인지를 알고 절실히 소망할 때 비로소 형성될 수 있다. p.184 “문명이란 혼돈을 덮는 얇은 막에 부화한다고 말이야. 지금 우리 시대는 그 얇은 막이 손상되어 차츰 벗겨지는 것처럼 보여.” p.186 진보적 자유주의는 일종의 안전지대로 그 안에서 사람들은 이따금 마음의 안정을 느끼며 스스로 도덕적으로 높은 위치에 있다고 간주한다. 그러면서 자신의 세계관을 어지럽히는 모든 것을 사냥하여 없애려 한다. 따라서 진보적 자유주의를 추구하는 이들은 정치적 올바름에서 벗어난 무례한 상황을 만나면 끊임없이 교훈을 던지며 가르치려 한다. (p.199) 이때 누군가에게 새로운 깨달음을 건네는 건 중요하지 않다. 핵심은 스스로 옳은 편에 서 있다는 긍정적인 감정을 얻는 일이다. p.200 “우리에게 닥친 문제들을 단순히 증오나 거부로 풀 수 없다는 소리지. 대신 항상 너그러운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늘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문제를 대해야 한다는 거야.” p.218 사과는 우리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소한의(p.238) 행위 중 하나이다. p.239 품위라는 개념에 대한 명확한 정의 ... 한 인간이 스스로를 통제하는 행위라고 말이다. ... 품위란 다른 이들과 기본적인 연대 의식을 느끼는 것이며, 우리 모두가 생을 공유하고 있음을 느끼는 것이라고. 또한 삶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의식은 크든 작든 모두 동일하게 중요하며, 이를 일상의 모든 상황 속에서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마음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p.244 당신이 아는 모든 인간과 당신이 그들에게 가하는 모든 행위는 언젠가 어떤 방식으로든 서로에게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러므로 각각의 개인은 다른 모든 이들에 대해 책임이 있다. 어떤 개인적인 신념이 있다 하더라도 이 책무를 잊는 것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 타인에 대한 책임은 도덕의 근간이라 할 수 있다. ... 인간은 서로 다르다. 그리고 우리는 이 차이를 통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콰메 앤터니 에피아 p.283 무례함과 품위의 문제는 오늘날 새로운 의제로 떠오른 ‘차별’이나 ‘혐오’와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전 세계적으로 복지국가가 쇠퇴하고 개인의 사회적 지위가 점점 취약해지고 있다. 안타깝게도 이러한 현실은(p.291) 새로운 국가, 새로운 사회를 요구하는 투쟁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대신 각자도생을 택하는 경향이 뚜렷하다. 자신보다 약한 사람들을 희생양으로 삼거나 책임을 전가하여 이 난국을 돌파하려는 것이다. 이때 타깃이 되는 집단은 바로 이미 차별을 받고 있는 소외된 사람들이다. 부정적인 편견을 조장하고 심지어 차별을 정당화하는 언행을 서슴지 않는다. 그렇게 해서라도 ‘나는 살아남아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가 제시하는 무례한 언행의 예시들은 대부분 이 현실에 터를 잡고 있다. 이때 무례함은 단순히 개인적인 무례를 넘어서서 공존을 깨고 사회를 파괴하는 사회적인 해악이 된다. p.292 우리는 무례함과 품위의 개념을 새롭게 정의할 필요가 있다. 작금의 현실에서 우리가 함께 살아가기 위한 조건이 무엇인지 돌아봐야 할 때다. ... 품위는 무례함을 범하지 않는 것에서 나온다. p.2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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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의 책은 우리 독서모임원 한명이 추천받았다는 책으로 선정했다. 인터넷에 검색해보니 '도처에 널려있는 천박함' 이라든지 '인류 역사상 거대한 하수구'라는 목차들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그런데 읽을수록 목차만 못한 빈약하고 편향적이라고 느껴지는 내용들이 아쉬웠다. 에세이인지 인문학인지 장르가 애매하다고 생각했고, 인용들이 대부분을 차지하여 저자의독창성을 느끼기 부족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