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내용과는 별 상관없지만, 책 제목이 기왕에 <나쁜 사람에게 지지 않으려고 쓴다>인 만큼, 나는 왜 쓰는지에 대해 너무 진지하지 않은 정도로 한 번쯤 생각해 보면 어떨까. 예전에 읽었던 조지오웰의 책 <나는 왜 쓰는가>에서는 글을 쓰는 이유 네 가지를 말한다. 어떤 형식이든 모든 글쓰기의 목적은 이 네 가지 범주에 다 들어간다고 보면 된단다.
그 네 가지는 돋보이고 싶은 욕구, 미학적 열정, 무언가 남기려는 충동, 그리고 정치적 목적이다. 정치적 목적은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드는 문제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에 영향을 주려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돋보이고 싶은 욕구와 미학적 열정은 이어지는 부분이 있는 것 같고, 무언가 남기려는 충동도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건 아니다.
결국, 조지오웰이나 또는 그의 글을 <표현의 기술>에서 소개했던 유시민은 그들 자신도 인정했듯 정치적인 목적의 글을 쓴다. 내가 보기에는 이 책의 저자인 정희진 작가의 글도 정치적이다. 그가 책에서 그리고 책의 제목에까지 붙인 '나쁜 사람에게 지지 않으려는' 의도나 행위 모든 것이 조지오웰이 언급한 정치적 목적과 연결되어 있으니까 말이다.
나처럼 독서 후 감상 정도를 쓰는 사람은 아무리 마음이 있더라도 '정치적 목적'의 글을 쓰기는 쉽지 않다. 글이 노출되는 정도나 글쓰기 기술과 능력이 한참은 모자라기 때문이다. 정치적 목적의 글쓰기는 말 그대로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글쓰기 능력이 있어야 하고 정치적 신념을 실현하고자 하는 의지가 수반되어야 가능한 영역이다.
나의 경우에는 조지오웰이 말한 글쓰기 목적 네 가지가 모두 조금씩은 해당된다. 돋보이고 싶은 욕구로 글을 쓰지는 않지만 글을 쓰면서 생각이 정교해지고, 논리가 풍성해지면서 내가 관계 맺는 사람들에게 더 좋은 영향력을 미치게 된다. 거기에 부가적으로 미적 욕구와 돋보이고 싶은 욕망, 정치적 목적도 일부 포개지는 부분이 있다.
무엇보다 내가 책을 읽거나 글을 쓸 때 가장 즐겁고 저릿한 순간이 어느 때인가? 나는 책을 읽을 때 적확한 표현과 문장, 군더더기 없이 맵시 있게 잘 빠진 글을 보면 최고 수준으로 고양된다. 그리고, 그런 문장은 세상의 무엇보다 미적 완성도를 가진다고 느낀다. 나는 그 수준에 도달할 수는 없지만, 아주 가끔은 내가 과거에 쓴 글이 나 자신을 고양시키기도 한다.
글을 읽고 쓰면서 생각과 태도를 가다듬는다. 글과 행동은 물론 다르다. 글을 쓰게 되면 글처럼 행동하게 될까? 글에라도 정치적 올바름을 표현하며 일종의 행동하지 못하는 죄책감을 덜어버리게 되지는 않을까? 작가 은유의 말이 생각난다. 글을 쓰게 되면 책임감을 느끼게 된다고. 내가 쓴 글이 나를 행동하도록 이끄는 힘이 있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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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의 독후감을 읽는 것은 지루하다는 편견을 오랫동안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편견을 깨준 책이 저자의 서평, 독후감들이다. 이 책을 읽는 내내 지루할 새가 없다. 아니, 오히려 긴장시키는 책이다. 만나는 구절마다 기존의 통념을 부수고 우리 사회현실의 빈틈을 헤집어 드러내기 때문이다. 독후감/서평을 이렇게 쓸 수도 있구나 라는 신선함과 읽는 즐거움, 무엇보다 배울 게 많아 좋다. 이 책에서 저자가 소개하는 책들도 찾아 읽고 싶고, 이 책도 두고두고 다시 읽으며 나와 우리 사회, 글쓰기에 대해 생각하고 싶다.
재작년 영화로 보고 나서 궁금증이 들어 책으로 찾아 읽고 다시 영화를 본 소설이 가즈오 이시구로의 <남아있는 나날>이다. 소설에서 주인공인 집사 스티븐슨은 집사의 자격 중 하나로 ‘품위’를 꼽으면서 장황하게 설명하는데 왜 그리 초라하던지 그가 말하는 품위가 차라리 허세에 가깝다고 느꼈다. 저자는 이 책의 제목 <나쁜 사람에게 지지 않으려고 쓴다>와 관련하여 ‘품위’에 대해 정곡을 찌르는 말로 나를 일깨워준다.
“품위는 약자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약자에게는 폭력이라는 자원이 없다. 이런 세상에서 나의 무기는 나에겐 ‘있되’, ‘적’에겐 없는 것, 바로 글쓰기다. ‘적들은’ 절대 가질 수 없는 사고방식, 사회적 약자만 접근 가능한 대안적 사고, 새로운 글쓰기 방식, 저들에게는 보이지 않지만 내게만 보이는 세계를 드러내는 것. …… 그것이 ‘품위 있게’ 싸우는 방법, 글쓰기다.” (14p)
글쓰기라고 하면 흔히 어떻게 하면 잘 쓸까 고민하는 데 그치기 쉽다. 저자는 글쓰기의 ‘3대 요소’가 “정치학(입장), 윤리학(방법), 미학(문장)”이고, 그중에서 핵심은 윤리라고 한다.
“핵심은 윤리다. 소재에 대한 태도와 글쓰기 방식이 정치적 입장과 미학을 결정한다. 탈식민주의와 페미니즘 사상의 핵심은 재현의 윤리이다. 누가 말하는가. 누가 듣는가. 누구의 목소리가 큰가. 누구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사람들이 듣기 싫은 말은 무엇인가. 사회는 누구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가. 이러한 권력 관계의 동학은 교육 현장, 출판 시장, 미디어 같은 구체적인 장에서 어떻게 구현되는가. 글은 우리의 삶을 어떻게 결정하는가.” (15p)
그러면서 저자는 “윤리적인 글의 핵심은 다루고자 하는 존재(소재)를 타자화하지 않는 것”이며, 글을 쓰는 “그 과정에서 자신을 알고, 변화시키고, 재구성하는 것”이며, “재현 주체와 재현 대상의 권력 관계를 규명하고, 다른 관계 방식을 모색하는 것”이라 한다. 그러고 보니 여성주의 글쓰기가 왜 어려운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다만 글을 쓰면 나 자신을 더 잘 알게 되고, 내가 변화해야 할 지점을 인식할 수 있고, 재구성할 부분이 생긴다는 것엔 실감한다. 글과 그 글을 쓴 사람은 한 몸을 이루는 정신과 육체 같아서 글을 쓰는 행위는 결국 자신의 삶을 만드는 일이라 생각한다.
“‘나쁜’ 사람에게 지지 않으려고 쓰려면, 나부터 ‘나쁜’ 사람이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글을 쓰는 과정은 나의 세계관, 인간관을 찾아가는 과정이며 나를 검열하는 과정일 수밖에 없다. 이 문제를 감당하지 못하면 글쓰기를 포기할 수밖에 없다.“ (16쪽)
“주장할 것이 없는 사람, 주장이 없어도 되는 사람은 글을 쓸 필요가 없다. 안주 상태에서는 참된 문학이 나올 수 없다는 것이다. 단도직입적으로 ”글이란 뜻을 드러내면 그뿐“이다.” (90p)
“글과 글쓴이 사이에는 거리가 있다. 그 거리는 다정하지 않다. 가까울수록 적대적이다. 외면, 길항, 동일시 ……. 당사자가 자기 현실을 쓰려면 공감받기 어려운, 헤쳐도 헤쳐도 계속 달려드는 칡넝쿨을 쳐내야 한다. 타인의 경험은 보이지만 내 경험은 나조차 믿어지지 않는다.”(116p)
“‘이야기’는 곧 읽기와 쓰기. 반응하지 않는, 감정 이입 없는 글쓰기는 불가능하다.” (149p)
주변에서 보면 자기 생각과 영혼이 없는 글을 ‘보편적’이라거나 ‘객관적’이라며 발표한다. 사실 부끄럽게도 그동안 써온 내 글도 그런 축에 속하려 애썼다. 게다가 사적인 이야기는 드러내기 꺼림칙해서 두루뭉술하게 포장하기 일쑤였으니 이래저래 발전이 없다. “무지와 편견의 보호 속에서” 살아온 시간이 만만하지 않아 글쓰기에서도 나를 소외시키곤 한다. 저자의 글쓰기의 윤리에 대한 관점은 이런 나에게 또 다른 차원에서 배워야 할 것이 많다는 걸 절감하게 한다. 책 속에 좋은 내용과 통찰이 많은데 아쉽게도 글쓰기에 관한 부분만 일부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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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롭지만 좋은 거 지지 않으려는 마음처럼 읽다보면 마음이 가열해진다. 읽으면서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한다. 자칫 정신이 풀리면 문장의 뜻이 의미로 바로 안 온다. 집중해서 읽는다. 왜 이렇게 더워지지 왜 이렇게 가슴이 뛰지 분명 설렘은 아닌데 즐거움도 아닌데 기쁨도 아닌데 좋은 거다. 다 좋다고는 못해도 좋은 거다. 깊이 깊이 가열히 옷깃에 스미는 땀이어라 [고통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은 가능성뿐이다. 생사의 갈등으로 사투를 벌이고 있는 이들에개 제시되어야 할 것은 미지라는 기대가 있는 사회다.] [마음이 없다? 문자 그대로 말하면 물리적으로는 심장이 없는 죽은 사람이요, 기능상으로 뇌(생각)가 없는 사람이다.] [초파리가 말했다. "너희가 볼 때 우리가 똑같이 생긴 것 같지? 우리가 볼 땐 너희도 그래." ] ['좋은' 세상에서는 '나쁜' 사람이 잘 드러나지만 나쁜 세상에서는 '악'을 구별하기 어렵다.] [희망은 바라는 것이므로 어차피 현재에는 없다. ..... 나는 희망을 버리는 것이 치유라고 생각한다.] [안녕과 평화, 그런 것은 원래 없다.] [공부의 필요와 의미는 스스로 정하는 권리다. .... 장애인이나 여성이 자기 언어를 지니는 것은 지식의 개념을 재정의하는 전복적인 행위다. 사회적 약자에게 공부는 ...자신의 삶과 불일치하는 기존의 인식체계에 도전하는 무기가 된다.] [글과 글쓴이 사이에는 거리가 있다. 가까울수록 적대적이다.] [우리는 모두 각자 다른 몸들이다. 몸의 다름이 정치의 근거가 되어야 한다.] 지은이의 독후감도 독후감이지만 이 문장들이 옷깃에 스민다. |
<나쁜 사람에게 지지 않으려고 쓴다>를 읽으면서 얼마나 많은 밑줄을 긋고 있는지 모릅니다. 정희진 선생님처럼 똑똑해지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요. 그의 글쓰기에는 힘이 있습니다. 통찰력이 있고 줏대가 있고 목적이 있으니까요. 저는 그저 선생님의 글을 묵묵히 읽어나갈 뿐입니다. |
제목이 너무 멋져서 클릭해보니 정희진 작가님의 책이었다. 처음 접한 정희진 작가님의 책은 페미니즘의 도전이라는 책이어서 그랬나 작가님의 글은 좀 어렵다고 느꼈는데.. 그래도 제목의 의미를 알고 싶어서 구매하게 되었고 이 책을 읽어보니 전혀 어렵지 않았다. 페미니즘이 나에겐 낯선 분야라 더 그렇게 느꼈던 것 같다.. 제목부터 내용까지 그저 용기있고 당당하고 멋진 책이었다. 다른 책도 더 읽어보고 싶어졌다. '사회적 약자가 이 세상과 ‘품위 있게' 싸우는 방법, 글쓰기 약자에게는 폭력이라는 자원이 없다. 이런 세상에서 나의 무기는 나에겐 ‘있되', ‘적 '에겐 없는 것. 바로 글쓰기다. 사회적 약자만 접근 가능한 대안적 사고, 새로운 글쓰기 방식, 저들에게는 보이지 않지만 내게만 보이는 세계를 드러내는 것. 나보다 더 억울한 이들의 목소리를 듣고 그러면서 세상을 배워야 한다. 그것이 ‘품위 있게' 싸우는 방법. 글쓰기다.' |
'좋은' 세상에서는 '나쁜' 사람이 잘 드러나지만 나쁜 세상에서는 '악'을 구별하기 어렵다. 74 저자가 글을 쓰는 과정에 대한 책이며, 그 과정 속에서 자신의 방향과 그 방향을 지속해나가는 그의 열정이 돋보였다. 정치, 슬픔, 고통, 분노에 대한 그의 생각과 그로 인한 반응으로 생겨진 방향. 그 안에는 사회와 사람, '다수'라는 굴레에 포함되지 않는 '평범' 단어에서 소외된 삶이 있었다. 모두가 앞을 보며 달려가도 그는 전체를 보고 있었다. 읽기 전과 후가 달라지게 하는 분명한 책이고 힘이 있는 글이다. 책을 읽고 글을 쓰면서, 배우고 변하면서, 보이는 중심이 아닌 내가 있는 곳에서 주위을 향해 머리를 열고 둘레와 경계와 바깥에 대해 더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겠다. 말이 넘치는 세상. 듣고 싶은 말만 골라 듣고 하고 싶은 말만 골라 대답하는 세상. 누구와 함께할 것인지는 내가 선택하는 것이다. '정희진의 글쓰기' 시리즈 다섯 권 중에서 첫 번째였는데 다음 두 번째 권 '나를 알기 위해서 쓴다'도 정말 기대된다. ? 193 두려운 감정은 있지만 "부정적인 감정은 없다. 견디기 힘든 감정을 서투르게 다루는 방법이 우리를 더욱 괴롭힐 뿐이다." ? 227 "누구의 억울함인가? 정당한 억울함인가?" ? 228 "분노 표현 논쟁은 부차적이다. 분노의 이유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 누구의 어떤 분노인가. 가진 자의 더 갖지 못한 분함. 이 외의 모든 분노 포현은 격려되어야 한다. 그것이 가진 자의 탐욕이 실현되는 것보다 성숙한 사회를 만든다." |
사람들은 자신이 살면서 많은 글을 쓰고 있단 사실을 알지 못한다. 휴대폰으로 지인과 주고 받는 문자, SNS에 짧게 남기는 멘트 하나하나도 글임을 감안한다면 세상에는 글 못 쓰는 사람이 존재치 아니 한다. 글 쓰기가 세상에서 제일 어렵다고 말하는 사람들조차도 끊임없이 길고 짧은 글을 쓰고 있다. 그들의 글이 어떠한 목적 하에 쓰였을지 가끔 난 상상을 해 보고는 한다. 심오한 의도를 매번 품어야만 한다면 글 쓰기는 매우 혹독할 것이다. 내 경우엔 낯가림 심한 성격과 상대적으로 어눌한 말솜씨를 보완하기 위한 차원에서 택한 도구가 글이었다. 쓰고 지우고를 반복하는 일은 내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 보이는 과정과도 같았다. ‘나쁜 사람에게 지지 않으려고’ (글을) 쓴다는 건 과연 무얼 의미할까. 제목에서 풍기는 전투적인 냄새가 독특했다. 세상 사람 모두가 날 속이려 작정이라도 한 것처럼 여겨질 때도 없진 않았으나 그조차도 시간이 얼마 흐르지 않아 잦아들고는 했다. 지나친 흥분은 글 쓰기는 물론 다른 모든 것들까지도 멎게 만듦을 나는 잘 안다. 복수심에 불타서 쓴 글을 떠올렸던 나는 이내 부끄러운 마음이 일었다. 어디 자그마한 구멍이라도 파고 숨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절대적 강자는 없다. 권력은 한낱 신기루와도 같은지라 과거 한 때 절대자로 군림한 사람이 어느 순간 폭삭 주저앉고는 한다. 권력을 손에 쥔 이들은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온갖 수단을 지녔다. 심지어 그들은 자신이 지닌 부를 동원해 가상의 자신을 만들고 보여주는 일에도 능력을 보이곤 한다. 가진 게 없는 사람의 이야기는 다르다. 운동으로 치자면 마라톤 즈음에 해당하지 싶다. 타고난 신체 조건, 혹독한 훈련 등이 빚어낸 결과일 테지만, 올림픽 등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는 마라토너들 중엔 유독 아프리카 국가 소속 선수들이 많다. 지방이라고는 전혀 없을 것만 같은 탄탄한 몸매의 선수들을 보면서 나는 자신의 전재산을 바쳐 감서 투혼을 발휘한다는 식의 해석을 하곤 했다. 마라톤이 운동화와 유니폼만을 필요로 하듯 글 쓰기도 원고지와 펜만 있으면 충분하다. 이것저것 갖추지 않아도 바로 당장 시작할 수 있는 글 쓰기에 말로 가진 것 없는 사람이 택할 수 있는 최적의 도구다. 일종의 독후감에 가까웠고, 에세이라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각각의 이야기는 한 권의 책으로부터 영감을 얻은 듯한 느낌이 강했다. 비교적 많은 책을 읽으려 안간힘을 써 왔다고 자부했건만 아는 책이 그다지 많지 않단 사실은 충격이었다. 쉬운 책만 골라 읽어버릇 한 결과라고 생각하니 민망하기도 했다. 여기에서 그쳤더라면 나는 보다 많은 책을 읽어야만 한다는 사명감을 불 태우며 독서를 마무리 지었을 것이다. 책 제목을 그토록 심오하게 붙일 수 있었던 이유는 따로 있었다. 저자의 글에서는 시대와 사회가 읽혔다. 인간은 결코 혼자서는 살아가지 못한다. 아무리 고고한 척 군다 하여도 자신이 속한 세상과 알게 모르게 교감하면서 산다. 막상 삶을 살아가는 동안에는 내 삶에 굴곡이 얼마나 존재하는지를 감지하기가 힘들었다. 한 걸음 빗겨난 덕택인지 지난 10년가량의 시간이 참으로 어마어마했다는 걸 실감할 수 있었다. 슬프게도 누군가가 환호하는 동안 다른 누군가는 절망했는데, 후자의 수가 훨씬 많았다. 약자의 아픔에 공감하는 취지도 있기야 하겠지만 우리 대부분의 위치는 후자와 가깝다. 저자 또한 그러하므로 자신의 글에 세상 일을 녹였고, 자신과 가까운 이들의 목소리, 결과적으로는 제 자신의 목소리를 부지런히 담아냈다. 2014년이 언제인지 점점 더 헤아리는 게 힘들어지고 있다. 그러나 충분히 길다는 표현은 결코 사용해서는 안 될 것이다. 저자는 세월호 관련 글을 많이 썼고, 사람들로부터 도처에 널린 다른 아픔들은 놔두고 왜 세월호만을 그토록 애도하느냐는 식의 삿대질도 접했다고 했다. 이와 같은 말을 한 이들 또한 거대한 상처를 품 안에 끌어안고 있는 입장이다. 그들이 그와 같은 반응을 보인 까닭은 그들에게 슬퍼할 기회를 부여치 아니 한 세상의 잘못이 크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꽤 오랜 시간이 흘렀고, 혼자서는 얼마든지 세상을 잘 살아갈 수 있는 어른이 된 지도 여러 해임에도 여전히 엄마를 그리워하는 저자의 마음은 강렬하다. 스스로를 억눌러 가면서까지 강한 척하는 게 정답은 분명 아닐 것이다. 글 쓰기는 스스로를 갈고 닦기 위함이었다. 많은 책, 그 안에 담긴 많은 내용을 하나씩 소화하면서, 검객으로 치자면 정성껏 검을 닦으면서, 스스로를 단련시키는 과정, 그것이 바로 글 쓰기였다. 약자를 노래한 글들이 이토록 많을 줄은 몰랐다. 혼자는 결코 아니라는 뜻이다. |
정희진 선생의 글을 좋아하면서도 막상 그의 저서들은 가지고 있는 것이 없었다. 그러던 차에 이번 신간 소식을 접하고 고민없이 구매했다. 우선 제목이 참 마음에 든다. 정희진 선생답다는 생각도 들고.
글쓰기에 대한 책임과 동시에 기본적으로는 서평집이다. 개인적으로도 인상적이었던 책들도 다루고 있어 그에 대한 글들부터 먼저 눈이 갔다.
"진보는 싸가지만 있어도 충분하다" 강준만, <싸가지없는 진보> "오랜시간 찾아 헤매던 말이 정확하게 표현된 글을 읽을 때 살아있는 기쁨을 느낀다" 김영하, <보다> "자살을 정신력 문제로 보는 사람들이 있는데, 한번도 아픈 적이 없어야 가능한 인식이라고 생각한다." 김보통, <아만자>
대표적으로 위 세 권에 대한 그의 서평 일부는 어쩜 내가 하고픈 말을 그리도 인상적이게 요약해서 쓰셨는지...
선생의 건투(어쩐지 건필보다 그에게 더 어울리는 단어 같다) 를 빈다. 앞으로도 계속 지지 않고 쓰시기를! |